• 생태자본주의는 안되는데
    생태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있나?
    [정의로운 경제] 이제 생태-복지 선순환 고려해야
        2023년 07월 04일 12:0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기후위기 해법

    이제 너무 명백한 현실이 되어버린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앞에 아무도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는 지금, 사회운동은 물론 정치와 행정, 심지어 기업들까지 저마다 무언가 해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단순한 기후위기 진단을 넘어 온갖 차원의 기후완화 대응 방안은 물론 기후적응 방안들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기후와 생태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한 모색이 다소 양극화되는 경향도 있다. 한쪽에서는 기업들이 기존의 이윤추구 행위를 계속하면서도 ESG나 RE100 같은 추가적인 조치들을 통해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에도 기여할 수 있다며 이른바 그린와싱과 뒤섞인 주장들을 내놓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무한축적을 본성으로 한 자본주의에서 기후생태위기 해결은 불가하다면서 탈자본주의 – 생태사회주의가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극단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면서 그 외에 대단히 많은 종류의 대안과 정책들은 대체로 외면 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기업의 자발적 실천 방안이나 생태사회주의적 대안이 예외적일 수 있고, 탈탄소 산업전환-탈성장 경제전환과 관련된 꽤 구체적이고 다양한 해법들이 나와 있다. 기업의 자발적 실천을 넘어 시장 실패를 교정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제기된 탄소가격제도는 물론이고, 시장주의적 해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국가 개입을 통해 전환을 모색하는 녹색산업정책도 있다.

    더 나아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중립적이면서 성장의존형 경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생태경제학적 대안들, 즉 정상상태 경제나 도넛경제, 포스트성장경제나 탈성장경제의 여러 버전들이 다차원적인 차원에서 해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대안들에 대해 그저 지구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시장에서의 기술 혁신과 효율성 향상으로 기후대응을 하려는 ‘생태 현대화론’이라고 간단히 무시하거나, 탈자본주의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서 폄하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더 나은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성장주의에 빠진 것은 우연인가?

    기업의 자발적 기후대응이나 시장의존적 기후완화 해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래도 꽤 많은 비판이 있었다. 반면 생태사회주의 해법이 가질 수 있는 약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토론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생태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춰 들여다보자. 생태사회주의는 기존 소비에트식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환경 파괴를 방치한 ‘생산주의적 사회주의(productivist socialism)’, 또는 생산력지상주의라고 일단 거부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녹색자본주의(green capitalism)’ 역시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생태사회주의는 ‘녹색성장’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녹색자본주의’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생태경제학 관점과 다른 해법을 추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녹색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반대로 ‘녹색사회주의’는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을까? 사실 이제까지 녹색자본주의나 녹색사회주의 어떤 것도 현실세계에서 증명된 바가 없다.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불가능하거나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찍이 이반 일리치는 “자본주의 꼬리표를 달았든, 사회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든 (고에너지 정책에 의존한다면 – 인용자) 그런 사회적 관계는 똑같이 혐오스런 일일 것”이라며 생태적 관점에서는 두 체제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원로 탈성장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도 “성장사회를 다시 문제 삼는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다시 문제 삼는다는 얘기이지만, 그 역은 자명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자본주의와 생산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인류를 진보 쪽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규정된 생산력의 발전에 근거를 둔 성장사회에 대한 동일한 프로젝트의 두 개 변수”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라투슈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나 자본주의를 일부러 제거하지 않아도 자본주의 정신, 특히 (이윤 증대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는)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만 있다면 탈성장 사회에서는 서서히 자본주의적 요소가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20세기에 자본주의가 생태에 파괴적인 했던 것은 필연이고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은 우연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게 된다.

    자본주의가 생태 파괴적임을 인정한다는 것의 의미

    물론 자본주의가 생태 파괴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차원에서 지적되었다. 특히 맑스주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 임금노동-자본 외부에 자본주의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거대한 ‘수탈’체계들이 있다면서 그 중 하나로 지구생태계를 지목했다. “자본이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필수조건들, 즉 인종화된 수탈, 사회적 재생산, 지구생태계, 정치적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외부로까지 시야를 확장해서 자본주의 존립조건을 설명한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프레이저나 ‘자본주의의 두 번째 모순’을 주장했던 제임스 오코너 같은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들이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에는 자연에 대한 수탈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프레이저는 그저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연수탈이 왜 확실히 일어나는지에 대한 자신의 원인 진단을 말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인간에 의한 생태파괴는 국지적이었지만 존재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함께 냉전의 또 다른 축이었던 사회주의도 기후위기를 초래한 동참자였다. 결국 자본주의가 기후위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지는 않다. 자본주의 안에서도 기후위기 대처방식은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고, 자본주의를 벗어나서도 기후위기는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라는 특정 경제제도와 생태파괴를 적절히 연결시키고는 있지만, 인간의 경제활동 일반과 지구생태 한계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그냥 자본주의로 귀속시켰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의외로(?) 탈성장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프레이저는 “일부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탈성장을 제도화하여 고정된 대항 지상명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장의 물음(어떻게든 성장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어떤 종류로,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고, 기후과학의 정보에 바탕을 둔 다차원적인 성찰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면서 탈성장에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탈자본주의에서 생태사회주의로 vs 복지국가에서 생태국가로

    그런데 탈자본주의 해법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그 방안이 꼭 20세기 성장의존형 사회주의에서 생태사회주의로 변신하는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20세기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성장주의를 받아들였던 성장의존형 복지국가를 생태적 관점에서 전복시켜 탈성장의 미래를 기획할 수도 있다.

    최근 알로이 로랑 같은 일군의 정치경제학자들과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이제 복지가 경제성장이 아니라 생태전환과 손잡고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미래에 구축되어야 할 복지가 경제성장에 의존하기보다는 생태시스템 안에 탑재되어 생물권의 재생능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존 복지국가나 생태복지국가와 다른 ‘사회생태국가’ 비전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접어든 현실에서 이제 과거처럼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에 집중하는 대가로 생태적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외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에 생태와 복지의 선순환을 먼저 고려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경제성장에 대한 필요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무리한 경제성장으로 지구생태계가 복지를 위협하도록 자초할 것이 아니라, 지구생태계가 만들어주는 안전한 삶의 공간확보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지국가에서 생태사회로의 발상의 전환 방식이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탈자본주의 등의 파격적인 개념들을 선호하는 것은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줄 장점이 있지만, 현실에서 필요하고 유용한 정책들을 폄하하고 외면할 위험성 역시 안고 있다.

    * <정의로운 경제>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녹색전환연구소 자문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