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에게 보내는 답장
    [나의 생각] 중단, 견지, 탈퇴의 결심
        2023년 06월 29일 01: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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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지인들이(사실은 몇몇이 아니라 다수) 애정을 가지고 쓴소리과 충고를 나에게 보내줬다. 소위 ‘성찰과 모색’, 즉 금태섭 전 의원이 참여하고 있는 제3지대 신당 추진 흐름에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전하고 멈추라고 요청한다. 그래도 좌파의 일관된 길을 걸어왔던 당신이 주변의 우려를 뿌리치고 소위 중도파들과 함께 무언가를 모색하는 ‘방향 전환’은 적절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낫다는 조언이다. 2,30여년을 함께 한 주변 동지들과의 인간적 관계가 부서지거나 금이 가는 것에 대한 걱정도 전한다. 나름 고마운 개인적 충고이다. 마음도 무겁다. 하지만 개인적 관계의 무거움은 별개로 하더라도,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어떤 의견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개적으로 답장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다소 길고 장황하다. 심란함의 징표이니 양해를 부탁한다.

    1. 전향했냐? 정치적으로 너무 멀리 갔다는 우려에 대하여

    전향은 내외부적 계기를 통해 자신의 신념 체계와 가치를 부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걸 말한다. 일종의 방향 전환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상적 이념적 전향은 국가권력의 폭력에 의한 강제 전향의 경우가 많았기에 부정적 기억들이 강하다. 그러기에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비전향이 존중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폭력에 의한 것과 그것에 맞서는 것 사이에는 무언가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전향과 비전향 외에도 자기비판과 성찰, 진화와 변화 등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낮설지만. 특정한 시기의 정치방침, 활동방침에 대해서 거창한 전향(정확하게는 변절, 절개를 꺾음)의 잣대를 꺼내는 것은 스스로의 걍팍한 흑백 논리적 기준만을 드러낼 뿐이다.

    정치적으로 너무 나갔다는 의견은 금태섭 등의 흐름이 진보정치, 좌파정치와 결을 달리하는 중도파, 중도우파적 흐름이며 이들과 연합하는 것은 진보와 좌파의 순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뜻일 게다. 다르게 물어보자,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자들의 정당이었나, 정의당은 좌파 정당인가? 아마도 사회주의적 지향과 좌파적 흐름이 비교적 강한 조직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 자체가 사회주의 정당, 좌파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할 것이다. 그럼 ‘진보’정당이라는 잣대는 어떠한가? 사회적으로는 민주당도 진보(정당)세력이라고 하는데 과연 정당하고 온당한가? 함께 할 수 있는 세력과 연합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은 운동의 주체(사회주의자, 좌파)가 어떤 강령과 목표를 지향하는가, 그들의 시대인식과 실천과제는 무엇인가에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당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유시민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꾸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민주당과 거리를 두고 있는 금태섭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선 때 윤석열을 지지했지만 국민의힘에는 합류하지 않았던 그의 행적이 연좌제처럼 남아 있는 건가? 노골적으로 민주당에 합류하거나 지지하는 것을 두고 혀를 끌끌 찰지언정 전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민주당과 단호하게 결별하고 국민의힘 근처에서 움직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명백한 전향이라며 입장을 밝히라고 하는 것은 온당한가? 유시민은 되고 금태섭은 안된다, 또는 유시민은 안되고 금태섭은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유시민이라는 개인을 전적으로 불신하는 게 아니듯이 금태섭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평가하고, 우리가 지향하고 대중들이 공감할 시대적 과제를 밝히고, 나아가 그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대상과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개개인을 평가하며 ○○○은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긋는 것, 그것을 전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회주의자 또는 좌파 공동체의 순결성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본다.

    2. 진단 후 처방이듯, 상황과 정세를 먼저 보고 방향과 길을 정해야

    그래서 개인뿐 아니라 정치세력들은 현재의 상황,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국내외적 환경, 글로벌한 상황을 먼저 살핀다. 왜냐면 실천의 방향은 사상, 이념적 지향과 구체적 현실의 접목이지 주관적 관념이나 머리 속의 설계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과 신냉전이 현재의 글로벌 정세를 규정하는 요인들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의 정세를 심층에서 규정한 것은 이승만과 김일성, 박헌영이 아니라 미소 냉전의 도래와 전면화였다. 마찬가지로 미중 경쟁과 신냉전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지속되고 있는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내 정세에 어떻게 반영되고 굴절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북핵과 김정은 체제의 문제도 10년 전과 지금이 다른 것은 이러한 미중 갈등–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려 북중러-한미일의 대립적 삼각구도가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북한 김정은 체제의 핵개발 정책과 행위에 대해서 중국과 러시아는 10년 전에는 비판과 견제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지지와 후원 입장에서 유엔 안보리의 결정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반전반핵”이라는 좌파의 상식적 기치가 부인되고 기각되고 있는 현실의 배경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저성장 경제의 지속과 민생 위기의 반복, 저출생과 인구절벽의 위협, 세대 갈등과 지속가능한 복지 시스템의 위기가 맞물린 복합 위기의 상황이다. 안보 위기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위기 국면도 국내적 요인과 함께 국제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심오한 한방. 새끈한 정책 몇 개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한 사회적 리더십의 주체가 ‘정치권’이지만 야당 민주당과 여당 국힘은 내로남불-법치만능의 악무한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가 상대방이 대한민국 위기의 주범이라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있다. 누구 탓을 떠나 현재의 우리 사회가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전환기적 국면에 처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안보 위기와 경제 위기, 사회 위기에 해결은 커녕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정치’ 위기가 더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정책적 구조적 측면에서 좌파적 근본적 변혁적 정책과 해법이 대안이라면 그길로 가야 한다. 최저임금을 최대한 올리고, 국민 생계 지원금을 전국민에게 대폭 지급하고, 필요한 공공 인프라를 국유화하고, 교통 및 각종 공공서비스의 요금을 동결하거나 무상으로 제공하고, 국민연금 지급액도 생활비 수준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지금 필요하고 유효한 슬로건이라면 그렇게 가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요구들이 실현될 수 있는 경로, 경제사회적 구조를 어떻게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점이다. 요구는 나열하지만 그것에 따르는 집행과 운영의 책임은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 여기가 포퓰리즘, 무책임 선동정치, 이익정치의 극단화로 이어지는 지점들이다.

    3. 나의 과거 행적을 돌아본다. 나는 왜 진보통합파에서 반대파로 돌아섰나

    민주노동당 마지막 시기인 2008년 나는 분당에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곧 노동운동 등 대중운동에서도 정파적 분열로 이어질 것이고 정치적 분리정립의 대중적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게 내 반대 근거였다. 그러나 나는 범좌파에서 소수파였고 결국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에 합류했다.

    진보신당 시기 2년을 지나면서 2009~10년 경부터 나는 진보정치의 통합을 주장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통합을 주장했지만 결국 진보신당 내부에서 다수의 지지(1/2는 넘었지만 2/3에는 이르지 못한)를 얻지 못했고 또 민주노동당 측에서는 국민참여당과의 3자 통합을 주장하면서 결국 나의 정치적 주장은 패배했다. 나는 진보신당에서 3자 통합에 합류하는 흐름, 즉 통합진보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진보신당(노동당)에 잔류했다. 진보신당 일부의 참여가 아닌 전체적 참여를 촉구했던 입장의 결론이었다.

    노동당(진보신당의 후신)에서 당원총투표를 통해 당의 진로를 결정하자는 의견이 부결된 이후 나는 노동당을 탈당하여 무당파로 있으면서 노동정치연대에 합류하여 새로운 진보정치의 재결집에 힘을 보탰다. 그게 2015년 통합진보당과 그 후신 세력과 구별 정립하는, 정의당-노동정치연대-진보결집-국민모임의 4자 통합으로 이어졌다.

    비교적 일관되게 나는 진보정치의 단결과 통합을 주장한 편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에는 통합진보당 주류 세력과는 구분 정립하는 진보통합론이었다. 그 이후 정의당의 평당원으로 있으면서도 녹색당 등과의 통합은 적극 지지했다. 녹색당과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으면 당명 변경 등 정의당의 재창당을 통한 자강 노력을 지지했다. 개인적으로는 ‘녹색정의당’으로의 당명 개정 의견도 피력했다. ‘녹색’이라는 가치는 특정조직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진보당과 정의당의 통합-연합에 대해서는 나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10여년 전의 시점에서는 의미 있을 수 있었지만 지금 현재의 시점과 정세에서는 정의당과 진보당의 통합(연합)은 시대역행이라고 본다.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의 감정적 상처와 적대감들을 이유로 드는 이들이 있지만 나의 근거는 다르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핵개발과 핵 위협에 대한 단호한 비판 입장, 민주노총 등 조직된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지지와 비판의 균형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북 입장에 우호적이고 민주노총의 다수파인 진보당과의 통합과 연합은 잡탕 정치로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진보당이 여전히 보이고 있는 민주대연합과 민주당 친화적 성향도 중요한 결정적 걸림돌이다. 물론 이런 구별 정립의 필요성이 사안과 실천 활동에서의 공조와 연합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나는 정치에서 좌파의 입장에 근거하되 늘 최대연합을 지향한다. 그러나 최대라는 것은 상황과 목표, 과제들에 대한 공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최대이다. 최대연합은 당연히 동질적이지 않고 이질적이다. 그래서 이질적 세력들의 공통기반, 공통과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관건이다. 러시아의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북핵과 북중러 연합의 퇴행을 비판하고 대항력을 형성하는 것, 민주주의와 복지 강화의 기조를 견지하는 것, 자유와 평등의 균형과 존중, 경제적 구조개혁의 방향성 등등이 현시기 최대연합의 조건들이다.

    4. 어떤 비난과 저주들에 대한 단상

    지난 6월 23일 조선일보의 사설 <괴물 정당이 돼 버린 민주당, 양심의 문제 아닌가>의 내용은 나에게도 해당되고 그래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비판이었다. 조선일보의 비난과 저주라고 치부하고 눈감을 문제는 아니다. 사드 이슈를 전자파에 사람이 튀겨진다는 괴담으로, 광우병 이슈를 “뇌송송 구멍탁”이라는 공포로, 한미FTA는 경제식민지로의 전락으로, 천안함 사건은 “자폭”이라는 논리로, 박근혜 7시간을 각종 난삽한 음모론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동해 바다와 태평양 모두가 핵폐수에 오염”된다는 괴담으로 몰아왔던 게 민주당 아니냐고 맹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민주당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진보정당들과 진보적 시민단체들도 위의 행위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판과 의혹 제기는 일정하게 과장되기 마련이다. 이슈를 명료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소 과장하거나 단순화하는 경향은 있다. 그러나 이런 이슈들에서 좌파들과 진보진영은 어떤 시각과 대안을 모색하면서 어떻게 쟁점화하고 전선을 형성했는가를 돌이켜보면 조선일보의 저 비판을 “조선일보니까 무시해”하고 넘길 수 있는지 의문이다. 방역주권, 경제주권, 안보주권이라는 맥락에서 이슈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구조적 대안적 방안을 제시했는가 자문한다면 반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역량의 부족과 정치적 나이브함을 깨닫고 반성적으로 돌아본다면 우리는 조선일보의 결론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괴담류의 과장과 단순화라는 패턴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민주당이 그러하고 진보정당이 그러하고 시민운동도 그러하다는 점에서 나는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이런 대형 이슈, 사회경제적 거대 이슈에서도 괴담류의 실천 행태에 대해서도 자기비판과 반성적 평가가 필요한데, 윤석열 정부 이후 벌어졌던 행태들을 돌아보면 더 참담하다. 룸살롱 쥴리설, 첼리스트의 청담동 음모론, 검언유착의 가짜 뉴스. 천공의 대통령실 이전 관여설 등등 모두 아니면 말고 식이든지, 심하면 지금도 쥴리와 청담동 카페설을 진실로 신봉하는 이들이 적지 않는데 이런 세태는 뭘 의미하나? 그 기괴하고 천박한 음모론을 펼치던 이들, 열광하며 퍼나르던 이들, 옆에서 슬쩍 정치 쟁점화시키던 이들 중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다. 장삼이사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리더라고 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괴담과 음모론을 퍼트리고 있다는 것은 정치가 단단히 고장났다는 징표이다.

    정치의 위기는 진영론, 양대 거대정당의 독점 등의 구조와 세력 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권, 특히 제1야당이자 국회 최대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이런 괴담과 과장, 선동, 공포, 음모의 정치관에 의해 오염되고 감염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보수당인 국힘은 이런 민주당의 행태를 국민들에게 환기시키고 반복재생시키는 걸 제일 중요한 정치전략으로 삼고 있다.

    5. 민주대연합과 독자 진보정당의 연관성, DNA와 변질

    요즘 생각해보면, 독자 진보정당, 민중의 정치세력화, PD운동 등등을 해왔던 나도 민주대연합과 민주당의 영향력과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자평하게 된다. 전두환 군사정권 이래 반독재 반파쇼 전선이라는 게 가장 우선적이었고, 민주당 등 자유주의 야당과 좌파 진보진영은 그 전선 속에서 헤게모니를 다투면서 일면 협력, 일면 비판-견제를 하는 관계였다. 좌파와 사회주의자는 민주당 자유주의 세력들과 무조건적 결별과 분리를 주장한 몽상가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추종과 굴종(이게 비판적 지지론의 본질)이 아닌 독립된 세력으로서 연합과 비판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세력으로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민주노동당 등 독립 진보정당 건설과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게 나의 개략적 역사 평가이다.

    끊임없이 반복재생되는,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는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후보단일화 등은 이런 과거의 흔적들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특정 시기의 선거연합 방침 등을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그 논란을 포괄하는 흐름은 나 개인을 포함하여 우리 진보정당에 여전히 민주당 의존성과 민주대연합의 DNA가 남아 있는 징표라고 자백하는 게 솔직하다는 생각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쨌든 보수정당인 민자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흐름들에 대당하는 비판 세력의 제1 지위는 민주당 계보의 세력들이 가졌다. 진보정치 또한 당연히 보수정당을 비판하고 대안적 사회를 모색하는 집단이었기에 민주당과 필요한 연합을 할 수 있었고 해야 했다. 단 대안사회의 비전에 대해서는 소소한 이견이 아니라 전략적 차이가 있었기에 연합을 하더라도 제한적 일시적 전술적이었다. 당연히 그 전술을 둘러싼 협상과 갈등도 때로는 작게 때로는 격렬하게 있었던 것이다. 때가 되면 나타난다는 각설이처럼, 때가 되면 나타났던 이러저러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잡소리와 이에 대한 분노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와 좌파는 자유주의 세력들과 분리 정립하지만 이들과의 제휴와 협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개인적으로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자유주의 세력들의 변화 변질 과정도 좌파에게는 중요한 상황 변수이다. 한국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상징이었던 YS와 DJ의 결별과 상이한 행보, 보수정당의 변화 과정과 함께 민주당의 역사도 이러저러한 변화와 전환의 흐름을 이어왔으며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도 중요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와 좌파의 고유한 노선과 비전을 만들고 다듬고 실천하고 대중화하는 노력과 함께 정치적 연합-협력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용할 것인지도 다른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문재인-조국내전으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흐름에 대한 평가가 중요해진다. 특히 조국내전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직접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 다원주의, 법치주의 등을 자기철학으로 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공통적 지반을 상당 부분 갖고 있다. 스탈린주의와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플러스 알파,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담대한 시도인 데 반해 이들 현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에도 미달하는 측면이 더 많았다는 점 때문이다.

    조국내전을 분기점으로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치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자유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자유주의 세력으로서의 본성도 부정하는 결정적 변질로 보는 것이다. 내로남불 정당이라는 건 이런 평가의 대중적 표현이다. 변질은 외부에서의 비판과 관계 정립을 통해 정정될 수 없다. 변질은 임시처방이 아닌 근본적 수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과연 내부에서 그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그건 그들의 몫이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에 대한 비판과 견제, 새로운 사회비전 제시와 실천의 1차적 몫은 이제 변질된 민주당이 아닌 좌파로서의 DNA를 간직한(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진보정치의 어깨에 놓였다. 정치세력의 규모와 의석 수 등의 물리적 측면이 아닌 정신적 이념적 대안적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의당 등 진보정당은 과연 좌파정당이고 그런 정체성이 뚜렷한가? 여전히 반윤석열이라는 이름 아래 민주당과의 거래와 합작을 통한 물리적 몸집 키우기에 나서려는 것은 아닌가? 민주당을 대체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유주의’의 DNA을 내장한 정치세력으로의 성장 전환은 가능한가?

    이런 내적 질문 외에 뼈아픈 질문도 던진다. 정당이 대중의 신뢰를 먹고 산다고 할 때 지지율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낮은 지지율을 보이더라도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당원과 활동가들은 그 희망을 가지고 노력한다. 가능성의 중요지표가 대중의 ‘호감도’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낮은 지지율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힘-민주 기성의 거대양당보다 정의당의 호감도가 더 낮고 비호감도가 가장 높다는 지점이다. 왜 그러한지 그 원인 진단이 필요하고 발본적인 처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6. 합작노선의 목표, 즉 비판과 공격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한국 정치에서 부재하거나 변질되어 사라진 자유주의 세력과 지금은 쪼그라들었지만 좌파-사회주의 DNA를 가진 정치세력 간의 연합과 합작을 지지한다. 이는 민주당의 변질과 타락이라는 점과 맞물려서 민주당 외부의 자유주의 세력에서 연합 대상을 찾게 한다. 물론 제1 대안은 정의당 등이 내부에서 좌파적 고민과 자유주의적 고민들이 공존하면서 내부의 생산적 긴장과 함께 외부적으로 확장하고 대중적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슬프지만 그게 쉽지 않고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는 정의당의 물리적 상태가 아닌 정신적 상태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도 맞물린다. 개인적으로 진보당은 사회주의+자유주의 측면이 부재하거나 미흡한 (반미) 민족주의 지향의 정당으로 판단한다. 민족주의의 긍정-부정성은 별개의 판단 영역인데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일제하 정우회 선언과 신간회, 중국의 국공합작을 비유로 들 수 있지만 상황이 유사하지도 않고 맥락이 오해될 수도 있을 듯하다. 신간회는 사회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연합이었지만 특정 조직 간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반면 국공합작은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뚜렷한 실체적 조직들이 협약을 맺고 합작을 한 것이다. 신간회는 원점에서 신당을 추진하는 방식과 유사하고 국공합작은 흡수-신설합당(^^) 방식과 유사한 형태이기에 현 시점과 비유를 한다면 곡해의 여지가 상당히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언급한 것은 합작이든 연합이든 신당이든 뭔가를 모색할 때의 ‘목표’가 무엇이냐가 분명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기때문이다. 신간회나 국공합작의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였고 항일이 목표였다. 비록 신간회와 국공합작의 구체적 수위와 방식은 달랐지만.

    진보와 중도, 혹은 사회주의-좌파와 자유주의의 합작은 민주당-국민의힘의 양당 체제의 혁파를 목표로 해야 한다. 국민의힘이라는 보수당의 이념과 사회 운영에 대해서 비판하고 대당하되, 긍정성을 상실한 변질된 민주당을 대체하는 세력으로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이게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목표라면, 그 내용적 알맹이와 대안 비전은 무엇인가, 당연히 제기될 지점이다.

    구체적 정책 문제를 뒤로 미루면, 안보위기-경제위기-사회위기-정치위기에 대한 처방과 비전의 방향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적 복합 처방이 필요하다. 안보위기에 대해서는 미중-우크라이전쟁-북핵 등의 상황에서 반전반핵의 기조-한미일 안보협력의 온건 버전,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구조적 저성장의 지속 국면에 걸맞는 구조개혁과 사회적 합의, 인구절벽-세대·성별 갈등 심화 등의 사회위기에 대해서는 보편복지-선별복지 논쟁을 넘어선 필요한 곳에 충분한 복지와 세대·성별 갈등 완화를 위한 정책. 정치 위기에 대해서는 제3세력의 강화를 통한 양당 진영 대결의 완화와 대통령제-의회중심제 등의 정치구조 변화에 대한 정책 등이 구체화되어야 할 지점과 방향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면 나오는 질문들이 있다. 그런 합작의 방향 자체에 대해 찬반과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전에 금태섭과 그 그룹은 정의당 등과 합작의 의사가 있는가? 또는 그 그룹이 신뢰할 만한 정치세력인가? 금태섭은 신뢰할 수 있는가 등등.

    당연히 내가 금태섭에 대해 개인적으로 신원보증을 할 수는 없다. 또한 금태섭이 일본 군국주의의 전야였던 시기 사회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인 태도와 반군부적 입장을 명확히 했던 요시노 사쿠조나 이탈리아 토리노의 지식인 활동가로 자유주의자였음에도 공산주의자 그람시를 존중하고 또 그람시도 그의 자유주의적 강경함을 존중했던 피에르 고베티 같은 원칙적 자유주의자는 아닐 거다. 그럼에도 좌파-사회주의 혹은 정의당 등이 합작을 고민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금태섭 정도의 자유주의자는 배제하고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이 또한 상황적 정세적 요인에서의 판단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언급은 하고 싶다. 문재인 5년 동안 정의당은 진보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집권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이지는 않았는가? 문재인 정부 시기 야당인 국민의힘과는 다른 결에서 상당한 의미의 준야당 역할을 했던 게 금태섭 전 의원과 김경율 회계사, 진중권 씨 같은 몇몇 개인들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 않나? 물론 그들의 비국힘 야당 역할이 정의당의 진보야당과 같은 방향이었는지를 짚어봐야 한다. 하지만 그건 문재인 5년 시기 정의당이 진보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는 전제하에서이다.

    또한 이 질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유주의자, 자유주의 중도세력으로 금태섭과 그의 그룹에 대해 이러저런 잣대로 엄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정의당 또한 좌파정당인지 사회주의정당인가, 그리고 진보정당이라면 민주당 친화적 태도와 명확하게 분리하고 자신의 좌파적 진보적 비전을 대중적으로 제시하고 대중적 기대와 신뢰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지? 과연 이 잣대와 기준에서 정의당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진보-좌파 정당으로서의 정의당과 원칙과 기준에서 불충분할지 모르지만 자유주의 중도그룹으로서의 금태섭 등 신당 추진 흐름이 합작하고 이를 새 정당으로 재구성 재확립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불완전함과 미흡함을 상호 보완하고 채워가는 과정이 될지, 서로의 미흡함이 악화되는 과정이 될지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리더십은 위기와 갈등을 강제로 사라지게 하거나 눈 감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위기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관리할 때 빛나고 존중된다는 점만 강조하고 싶다.

    7. 사회주의의 길은 포기하는 것인가

    나에게 결정적인 약점은 너는 사회주의로의 길,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사회에 대한 꿈을 버렸는가? 아니라면 그 꿈과 좌파-중도 합작이라는 것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공백이다. 아프고 뼈저린 지점이다. 그러나 공백인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쌓아왔떤, 내가 지향했던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사회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리적 이념적 건축물(이런 비유는 물론 한계적이다)은 곳곳이 부서지고 파손되고 상처입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볼품이 없고 앙상하다. 그러나 기둥과 대들보는 무너지지 않았다. 집이나 건축물의 가장 원초적인 기능은 추위와 더위 등으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듯,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 착취, 인간소외 등에 대한 본능적 이념적 저항물이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기둥과 대들보를 가지고 다시 세워내고 재건해야 한다는 게 궁색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를 꿈꾸지만 그것의 실현태로서 푸틴의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의 소련, 시진핑의 중국, 김정은의 북한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 지양하는 게 사회주의라고 할 때 러-중-북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좌파, 진보의 발본적 평가와 재구성이 필요하다. 실천 과정과 대중화 과정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당의 괴담류 정치에 대해 우리는 선을 긋지 못하고 동참하고 공범이 되었다는 자기비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어딘가의 골방에서, 관념으로서의 자기평가와 재정립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운동과 실천과 정치의 과정에서 이런 문제의식이 드러나고 확인되고 부딪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힘의 보수주의, 민주당의 변질된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합리적 진보좌파와 원칙적 자유주의의 결합이 그 공백, 평가, 대안을 모색하는 출발의 자리가 되거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사회주의 좌파운동의 어떤 관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도 연동된다.

    반미를 이야기하더라도 지구상에서 가장 강경한 반미세력인 이슬람국가(IS)나 탈레반이 동반자일 수 없다. 어느 친애하는 사람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평하기를 ‘가난한 자들의 트럼프’라고 선의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가난한 자의 트럼프’는 좋은 표현이 아니라 그와 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점을 드러낸다. 트럼프와 트럼프주의가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의 고통과 빈곤, 어려움을 강조하고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려고 보호무역주의 등을 추진했더라도, 그것이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의 트럼프’는 결국 트럼프를 위해 가난한 자들이 일회적으로 소비될 뿐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고 트럼프주의의 부작용과 반동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의 어떤 일화가 기억난다. 한국 최대의 민주노조이자 전투적 노조의 상징이었던 현대차노조, 민주노조라는 기반 위에서 어떤 때에는 집행부가 좌파 강경파 현장조직이 당선되고 어떤 때에는 우파 실리주의 현장조직이 당선되기도 했다. 똑같은 조합원 대중들이 어떤 때는 좌파를 어떤 때는 우파를 선택하는 걸 보면서, 그것은 정세와 노사관계의 흐름 그리고 그걸 본능적으로 체감하는 조합원 대중이 파업과 실력행사가 필요하다는 걸 느낄 때 강경파 집행부를 선택하고, 또 때와 상황이 파업으로 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많을 때는 실리주의 우파 집행부를 선택하기도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걸 좌파가 잘해서, 또는 좌파가 못하고 우파가 잘해서 당선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무지하고 관성적인 평가라던 누군가의 말이 기억난다. 물론 이 지적이 현장조직이나 활동가들의 노력, 실천, 영향력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짚어볼 지점들이 많은데, 좌파들은 늘 관성적으로만 대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관성적 반미, 관성적 좌파라는 웃픈 지적들이 나오기도 한다.

    페북에서 1960년대 일본사회당 에다 사부로의 구조개혁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에다 비전은 종래의 일본이 목표로 삼을 미래상으로 미국의 평균적 생활 수준, 소련의 철저한 생활 보장, 영국의 의회제 민주주의, 일본국 헌법의 평화주의 등 네 가지를 들면서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조정하여 나아갈 때 일본 사회주의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960년대의 주장이다. 지금으로 보면 조잡하고 착오적인 절충주의 버전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주의와 좌파가 반드시 견지하고 포함해야 할 내용들, 경제적 풍요와 복지 –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 반전 평화주의 등을 담고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다. 지금 시점에서 덧붙인다면 기후위기의 대안 모색과 녹색주의 실천이 빠질 수 없는 지점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나 단순 옹호가 출발점이어서는 안된다는 점, 노동운동-진보정치을 포함한 과거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적 정치 흐름에 대한 평가와 수용 여부도 포함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를 자유주의를 내재하되 그 내적 한계릃 극복하고 지양해야 하는 것이지, 자유주의 수준에도 미달하는 봉건주의, 집단주의를 미화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생각한다. 나의 이념적 진도는 이 자리에서 재출발한다.

    8.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는 구분 정립해야

    진보(좌파)와 자유주의(중도)의 정치적 제휴와 합작을 이야기한다는 게 제한적이라는 건 당연하다. 그게 실현될 수 있을지, 출발은 했지만 궤도를 이탈하여 사고를 유발하지는 않을지, 새로운 접합이 의미있는 에너지를 창출하고 현재의 정치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마중물이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다만 그 출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시작할 뿐이다.

    이게 다가온 내년 총선 결과를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꼼수이거나 정치공학의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 그러면 단기적으로 종결될 것이다. 선거 결과를 위한 공학적 접근도 필요하지만, 더 장기적으로는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새로운 만남과 자극. 상호 침투를 통해 자유를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 친화적인 자유주의의길을 모색하는 장기 로드맵이 공유되는 정치적 합작 실험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민주당은 변질되었다고 한마디의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나이브하다. 30여년 제1당, 혹은 제2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거대한 정치세력이 변질되었다고 한다면, 정의당 등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도 그것과 무관하고 면역력을 갖고 있다는 할 수 없는 게 정직한 접근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만과 착각이고, 그것 자체가 큰 문제를 안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중도 합작노선은 단기목표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유주의의 근본적 혁신과 재정립이라는 장기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지 못한다면 실패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대안일 수 없기에 작은 몸부림을 친다는 게 나의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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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편지를 보내는 A는 특정 개인이 아닐 수 있다. 복수의 고마운 충고자들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나는 현재 정의당의 당원이다. 당원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나는 위의 고민들을 위한 실천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한다. 그 경계에서의 균형감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해서 ‘관성적 습관적’ 좌파이어서는 안된다고 따가운 말을 던지는 그 무게만큼, 나 스스로에게도 “다 틀리고 나만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오만함과 독단을 경계하고자 한다.

    “가까운 길을 갈 때는 많은 짐을 짊어질 수 있지만 먼 길을 갈 때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는 여행 길의 금언과 “길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만들 수 있다”는 정치 길의 금언을 다시 생각하고 마음에 새긴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나의 실천적 결론은

    첫째, 나는 금태섭 전 의원 등이 추진하고 있는 제3지대 신당 추진 모임(성찰과모색) 참여를 중단한다. 주변의 애정어린 우려와 충고에 대한 고민의 결론이다. 사람과 활동가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분리하는 과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난 6개월 정도의 내 활동이 그런 한계와 문제를 드러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고 자기비판이다.

    둘째, 그러나 물리적 참여를 중단하는 것이지만, 위에서 밝힌 한국 진보정치와 사회주의-좌파의 미래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선은 철회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먼저 정의당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제기하고 토론하고 상호변화시키는 과정은 진지하게 실천하겠다. 나는 여전히 정의당의 당원이기 때문이다.

    셋째, 만들어지는 첫 과정부터 참여했고 지금도 평회원이고 내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전환’에서 탈퇴한다. 전환의 정치방침이 회의 구조를 통해 결정된 상황에서 나의 고민과 노선을 내부적으로 다시 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또한 전환의 결정된 방침과 나의 고민은 현실적으로 공존하기 힘들고, 전환의 동지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탈퇴를 요청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환이 한국 진보정치의 좌파로서, 한국 좌파의 혁신과 재정립에 기여하고 이끌어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끝>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장, 전 진보신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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