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 조봉암과
    대한민국의 영미 진보 유전자
    [기조강연문]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2023년 05월 18일 01: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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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의 주대환 부회장이 지난 13일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학술대회에서 ‘조봉암과 대한민국의 영미 진보 유전자’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강연문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과거에 대한 낡은 담론이 아닌 현재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미래 담론이기도 하다. 다양한 시각이 엇갈리고 있는 게 현실이고 토론과 건설적인 논쟁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편집자>

    진짜 프로 역사학자들 앞에서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어려운 주제로 말씀을 드리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오랜 노력에 감사를 드리고, 오늘 학술대회의 풍성한 결실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번에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를 발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조봉암과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결코 잊어버려도 좋은 끄트머리 비주류이거나 대한민국 외부로부터 유래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영미(英美)와 UN이 새롭게 태어나는 이 나라에 꼭꼭 씨앗을 심어서 유전자의 일부가 된 진보적 가치들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힐 수 없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되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작년에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을 대조해 읽어보면서 새삼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둘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같았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제3차 UN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고, 바로 이틀 후, 12월 12일 UN 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시대, 그런 때에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사주팔자가 좋은 것이고,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제헌헌법은 제8조에서부터 제28조까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리장전(權利章典)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세계인권선언이 인류 보편의(universal) 권리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먼저 인권의 평등함(제8조)을 말하고, 신체의 자유(제9조), 거주와 이전의 자유(제10조), 통신의 비밀 보장(제11조), 신앙과 양심의 자유(제12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제13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14조), 재산권(제15조) 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17조부터 제19조까지는 노동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세계인권선언 역시 노동, 교육, 사회보장 등 사회권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헌헌법 제17조부터 제19조까지는 세계인권선언의 제22조부터 제25조에 해당됩니다.

    나아가서 제16조에서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헌법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는 건국하면서 바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해방 당시 78%에 달하던 문맹률이 1950년대 말에 이미 22%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 제26조 1항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 및 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 및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접근이 가능하여야 하며, 고등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실력에 근거하여 동등하게 접근 가능하여야 한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한 사람은, 아시다시피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死別)한 후에 UN 인권위원회 의장을 맡아서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썼습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세상을 설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제9조 신체의 자유 조항에서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도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이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는 문제로 조봉암과 김준연이 큰소리로 논쟁하였습니다.

    인권 보장의 원칙론을 펼쳤던 조봉암 의원은 무소속 소수파에 불과했지만 그의 뒤에는 시대적 배경과 국제적 배후가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는 여러 세력들을 다스려야 할 현실적인 필요를 말하는 한민당의 김준연, 동경제대와 베를린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김준연 의원과 당당하게 논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봉암과 김준연의 격렬한 논쟁은 바로 대한민국 국회 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고,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운 국제 세력, 미국 민주당 트루먼 정부와 영국 노동당 애틀리 정부, 그리고 그 지도하에 있는 영연방 나라들, 또 그들이 주도하는 UN은 진보의 편, 조봉암의 편에 가까웠습니다.

    헌법 초안이 제헌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대체토론을 신청한 사람은 조봉암 의원이었습니다. 그가 헌법기초위원이었기 때문에 결국 서면으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토론은 가장 탁월한 토론으로,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으로 남았습니다. “이 분이 언제 헌법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던가?” 오랜 의문 끝에 저는 이 분 뒤에 어떤 국제적 배후를 느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53년 8월 15일, 신익희 의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 조봉암 부의장이 국회를 대표하여 라디오 방송으로 행한 광복절 기념사를 읽어보면 다시 한 번 온몸에 전율이 옵니다. 그 분은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가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뚜렷한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서 농지개혁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제헌헌법 제86조의 정신을 실천에 옮긴 사람으로 주로 알려졌지만, 헌법의 다른 조문에 규정된 진보적 가치와 정신들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분명하게 대변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요즘 새삼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탄생한 나라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의 해방과 독립은 카이로 선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 거대하고 참혹한 인류사 최대 전쟁의 대의(大義)와 목표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였다면, 동서양 문명이 융합되어 꽃피는 현대 한국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참혹한 전쟁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 천 만 청년들을 전장(戰場)으로 이끈 숭고한 정신과 가치는 무엇이었던가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 인종차별을 끝내고, 식민 지배 아래 노예 상태에 놓여있는 약소민족들을 해방시키자는 비전, 모든 인간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게 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최대의 성전(聖戰)이었고, 그 전쟁을 이끈 최고의 지도자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 해리 홉킨스, 그리고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꾼 이상주의자들이었고, 한국의 해방과 건국은 바로 그들의 이상이 실현된 것입니다.

    물론 영국은 보수당의 처칠이 이끌었지만, 노동당과 거국내각을 구성하였고, 함께 복지국가를 만들었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동당 애틀리 수상이 단독 집권하였습니다. 요컨대 영미의 진보가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였고, UN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이 남침하였을 때는 영미가 주도하는 UN이 군대를 보내서 나라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지도자는 민주당의 트루먼이었으며, 영국의 지도자는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이었습니다. 이 위태로운 신생국(新生國)을 구해준 건 영미의 보수가 아니라 진보였습니다. 만약 당시에 고립주의 전통의 공화당이 미국 정부를 맡고 있었다면 과연 전쟁 발발 3일 만에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당연하게 대한민국에는 영미의 보수주의가 아닌 진보주의의 유전자가 깊이 심어졌으며, 그 유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조봉암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조봉암을 죽임으로써 선을 넘은 이승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하고 마침내 몇 달 후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이승만을 권좌로부터 축출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물론 하지만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가 원래 설계한 만큼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나라로 발전하는 데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대법원 재심으로 조봉암 선생이 무죄 판결을 받은 해가 2011년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국제 기준에 도달한 시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1946년 6월 조봉암의 전향은 친소 공산주의로부터 영미 진보, 사회주의로의 전향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는가요? 한국전쟁을 치른 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반지성(反知性)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사회주의는 중도좌파(left of center)를 의미하고, 조지 오웰이 상징하듯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데 가장 날카롭고 반공(反共)전선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른 한국은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전인 1948년 12월에 한독당을 탈당한 조소앙은 ‘사회당’을 창당하고, 또 이승만 대통령이 축사까지 하여 격려를 하였지만, 전후(戰後) 조봉암은 ‘진보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당 기관지의 제호(題號)로 중앙정치(中央政治)라고 하고 자신의 노선이 ‘center of center’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정적들의 의도된 무지와 색맹(色盲)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조봉암의 전향은 분명하고, 또 큰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1946년 8월 한독당을 탈당한 신익희의 노선 전환과 함께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조봉암의 경우는 그가 아니었으면 이른바 ‘3•1운동의 아이들’, 대정 데모크라시의 청년들, 해방 당시 생존한 독립운동 경력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 세대가 대한민국 건국에 몽땅 다 참여하지 않을 뻔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군정을 펼치고 있던 미국 민주당 정부, 이를 돕고 있던 영연방 여러 나라 정부들,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전향을 한 조봉암이 어디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 전쟁 직후, 1954년에 죽산이 쓴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영국 노동당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미(英美)식 의회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통일론도 사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사실 국제사회에서 바라볼 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반도 사람들의 언어 습관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지금도 남북한이 서로에게 쏟아 붙는 말 폭탄을 듣고 있으면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겨우겨우 휴전을 시켜놓았더니 또 금방 전쟁이 터질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반도를 바라보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견제할 세력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조봉암에게 그런 역할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북한의 요구로 내걸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요구로 내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일 야당 운동에서 조봉암을 배제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촌 김성수는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함께 진보당을 창당했던 서상일은 누구입니까?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죽산 구명운동을 한 장택상과 윤치영은 또 누구입니까? 이 분들은 모두 대한민국 탄생의 주역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었다고 영미 진보의 유전자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만들고, 문화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친중 친북 주사파가 우리나라 진보를 오염시키고 있는 이 때, 건국 당시에 조봉암이 대표하였던 중도좌파 영미 진보의 역사가 재발견되어야 할 시급한 현실적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조봉암을 친중 친북 NL좌파가 아전인수(我田引水)하여 반이승만 나아가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확산시키는 재료로 삼았습니다.

    영미 진보의 유전자를 되살린 대한민국 중심주의 중도좌파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공존하고 외교 안보 문제에서는 협력하는 그런 성숙한 선진국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봉암의 전향이 정치적 타산에 의한 변신이거나 심지어 위장전향이라고 믿는 분들이 여전히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과 시대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꼬뮤니스트가 극우 파시시트가 되는 것보다 꼬뮤니스트가 중도좌파, 사회주의자나 중도우파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이들 중도의 철학적 베이스가, 전혀 다른 경험주의이기 때문입니다. 후진국 사람이 선진국 사람이 되고, 전근대인이 근대인이 되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조봉암이 33세에 되던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면서 그의 코민테른 활동은 끝나고 해방이 되어 활동을 재개할 때는 46세의 장년이었습니다. 그 13년은 하루하루가 절벽 낭떠러지에 선 것 같은 긴장과 변화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추운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이란 장기간 감옥살이하면서 감기를 한 번도 앓지 않고, 간수들과 한 번도 다툰 적이 없고, 입소할 때와 출옥하실 때 몸무게가 같았다는 말씀에 숙연해집니다. 저도 젊은 시절 감옥살이를 여러 번 해보았지만 칼날이 시퍼렇게 선 그 분의 7년 감옥 생활은 어떤 고승(高僧)의 고행이나 참선보다 더 지독한 ‘도 닦기’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사색과 성찰의 깊이는 헤아리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또 출옥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시기에 인천에서 서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대중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 1946년 6월의 전향은 청년 혁명가 조봉암이 원숙한 중년의 대중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쓰리쿼터’라는 트럭이 있었습니다. 아마 해방 후에 미군들이 갖고 들어온 소형 트럭이라 미국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다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트럭이 생각나고, 아마 적재 중량이 ‘4분의 3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요즘 대한민국이 한 세기(century), 1백년의 4분의 3, 즉 쓰리쿼터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자꾸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쿼터가 남았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고 한다면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제 1악장, 1973년부터 1997년까지 제 2악장,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제 3악장이 끝났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기적의 100년, 제 4악장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새삼스런 관심입니다. 사실 저희가 젊었을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 옹색하게 매달려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발전하여 세계적인 나라가 될 줄도 몰랐습니다. 당시에 유행한 ‘분단체제’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불안정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래갈 수 없는 체제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라가 만들어진지 30년이 지나도 안정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는데, 처음 건국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던 시기, 1948년이나 49년이 어떤 때입니까?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압도하기 시작하던 때, 즉 세계 최대의 나라 중국이 통째로 공산화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때입니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은 미군만 철수하고 나면 유아사망(幼兒死亡)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인 판단은 한 두 사람만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한민국이란 신생아의 유전자에 무엇이 들어있고,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병약한 아이가 얼마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만이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75년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과연 어떤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 유일하게 선진국이 되었는가? 이 나라는 어떤 가치, 어떤 이상에 따라 만들어진 나라인가? 어떤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그 많은 신생국들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만이 이렇게 발전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조만식,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을 비롯한 건국 시기에 활약한 지도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헌법을 비롯한 법률과 제도가 하나하나 만들어진 제헌국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헌국회 속기록을 읽는 지식인 그룹들이 나타나고, 이들이 쓴 책들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이영일 전 의원이 쓴 <건국사 재인식>이라는 책과 권기돈 박사가 쓴 <오늘이 온다>라는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급히 피난길에 오른 조봉암 국회부의장이 피난을 떠나면서 차에 실었던, 그 짐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했던, 주요 국회 문서 중에는 바로 제헌국회의 속기록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두서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자소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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