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대화와 타협'의 조건
    [L/A칼럼] 스페인 종교재판과 1968년 메데인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2023년 04월 24일 03: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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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리나라의 유수한 진보매체에서 “정치적 대화와 타협(협치)”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현재의 정부여당이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고 독선적임을 비판하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어딘지 공허하다. 긴 얘기를 못하지만 정치적 대화와 타협은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우파와 좌파 등 서로 대립하는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일 때 그것이 가능하지 않고 어느 하나가 앞서 나갈 때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대화와 타협의 주장은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헤게모니를 가진 세력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를 말한다. 반면에 독선적 주장의 예는 극우 보수주의에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는 중세 유럽의 가톨릭이 후자의 잘못된 길을 걸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9세기 초중반에 전자와 후자의 대결이 있었다(대부분 스페인으로부터 1820년대에 독립을 하였고 약 50년의 내전을 거친 후 19세기 후반에 자유주의가 승리했다). 내전이 끝나고 나서야 자유주의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지형에서는 극단적 상황으로 흐르지 않고 관용, 대화, 타협의 자유주의적 가치가 나름대로 작동한다. 물론 일부 나라에서는 극우독재가 폭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런 극우를 일반 시민들이 오래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런 주장에 많은 사람이 의아해할지 모른다. 무슨 놈의 라틴아메리카가 그러냐고? 유럽이면 몰라도…

    중세유럽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통해 나타난 가톨릭의 폭력과 타락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 분명했다. 신은 항상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침묵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힘든 문제를 직면하게 되면 악을 부수고 선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신 대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보다 쉬운 방법을 택한다. 중세의 종교재판관들이 그랬고, 그리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종교재판을 지나치게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이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면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를 물리치는 것을 역사적 과제로 생각한 왕실이 기존의 지주귀족(기득권계급)과 결합하면서 농업경제였던 스페인에 경제 위기가 오면서 지주계급의 이익 보호를 위해 종교재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인종청소가 종교재판의 핵심이 되었고 이단을 단죄하는 종교재판은 교황청이 아니라 세속인 스페인 왕실이 통제하게 된다. 나중에 교황은 이의 잘못을 인식했다고 한다.

    1483년의 첫 번째 종교재판소의 총감독은 토르께마다(Torquemada)였지만 핵심적 배후 인물은 세비야의 대주교이고 나중에 톨레도의 추기경이 된 페드로 곤살레스 데 멘도사였다.

    이베리아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있었다. 포르투갈, 아라공, 까스티야. 앞의 두 왕국은 대서양과 지중해로 진출하는 성과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면 맨 후자는 내륙국으로서 유럽에서 이슬람(이교도)과 싸우는 최전선의 기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중세 스페인은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711년에 이슬람세력이 처음 쳐들어왔고 1469년에 까스티야의 공주 이사벨과 아라공의 왕자 페르난도가 결혼을 한다(오늘날에도 축구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의식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1492년에 그라나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약 800년에 걸친 기독교세력의 재정복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레콩키스타 Reconquista : 718년에서 1492년까지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카톨릭 왕국들이 남부의 이슬람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획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함).

    그런데 이슬람세력의 최전성기에도 북부 스페인의 산탄데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자치 공동체 깐타브리아)은 정복하지 못했고 북부에서부터 다시 재정복에 나선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스페인의 북부지방에 가톨릭 선교사,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어느 나라나 800년 동안 내내 전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이 어울려 공부하고 결혼하고 장사도 하였을 것이다. 새로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을 “모사라베”라고 불렀고 그라나다 함락 후에 나라가 없어진 모로인들을 “모리스코”라고 불렀다. 적어도 중세 봉건시기인 12-13세기에는 서로 다른 종교, 인종 사이에(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대화, 관용, 타협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중 어느 세력이 유독 강대해지면서 이런 대화적 균형이 깨진 것이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반에 스페인은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최전성기를 맞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현대 가톨릭에서는 특히 1965년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독선적 흐름을 벗어나 관용적 대화를 강조하는 가톨릭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이 공의회를 주도한 교황 23세(현재는 성인임) 겸손하게 “공의회를 통해 하느님 영의 바람이 불도록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뜻임을 시대의 표징을 통해 배웠다”고 한다. 교회가 독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시대의 표징 앞에 겸손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1968년에 콜롬비아의 제2의 도시인 메데인에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CELAM)가 열린다. 여기서 교황청이 아니라 주교회의 스스로 회의 주제 등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지도력에 대해 단명한 바오로 6세가 지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 주교회의는 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존중하여 라틴아메리카의 심각한 정치 경제적 현실이 변혁을 (예를 들어 발전과 종속의 문제 등) 요청하고 있음을 교회가 직시할 것을 결의했다. 특히 사회정의의 문제 즉 시대의 표징에 교회가 민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전부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개인의 사적 소유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차이가 있고 이에 따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위계적 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강조한다. 서로 충돌하고 모순적이다. 보통 때는 문제가 없지만 사회경제적 위기 시에는 ‘공공성’의 약점이 드러난다. 1970년대 후반에도 이런 위기가 닥쳐왔다. 당시 패권국가인 미국의 극우 기득권세력은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함께 남부의 보수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와 손을 잡고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이 승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독선적 문화정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현재 우리는 아주 거대한 위기 앞에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아르헨티나 출신 해방철학자인 엔리케 두셀은 그의 저서의 앞머리에서 “우리는 오천년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세계체제의 위기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 놓여있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경험은 약 500년이고 유럽에서 유럽인/비유럽인 사이의 인종주의의 잘못된 인식이 시작된 지는 약 천년이 되는데 이보다 훨씬 전부터 소위 문명/야만의 이분법이 시작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또한 두셀은 과테말라의 원주민 여성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리고베르타 멘추를 기억하며 동시에 1976년 아르헨티나의 극우 군부독재에 희생당한 지식인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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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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