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에게 보내는 뒤늦은 답변 :
    그들은 왜 이념을 위해 싸웠는가?
    [컬렉터의 서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신간회
        2023년 02월 13일 10: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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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야. 오랜만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너에게 글을 편지를 쓰는 것은 너의 질문에 오랫동안 하지 못한 답을 하기 위해서야. 너는 늘 호기심이 많았던 학생이었지? 어느 날 너는 일제강점기부터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이념을 둘러싸고 싸운 이유를 모르겠다고. 다 같은 식민지 조선인들인데 참 답답하다고. 공동의 적인 일본 앞에서 이념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냐고.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새로운 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계속 이어진 좌우 이념 대립도 그러하다고.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이 단순해 보이겠지만,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단다. 먼 훗날 300년 뒤에 우리 후손들이 이념이 뭐가 중요하다고 남북은 화합과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으르렁댔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늘 시간에 쫓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에서야 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딴 것이 아니라 최근 우연히 본 신문 기사 때문이다. 2023년 1월 18일 다음과 같은 기사가 온라인에 올라왔다.

    울산 고교 한국사 교사, 수업 중 “尹, 왜 20대 지지율 높은지 이해 안돼”…교육청 조사

    울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수업 중 정치 편향적인 발언을 했다는 민원이 접수돼 교육청이 조사에 나섰다. 18일 울산교육청 등에 따르면 최근 북구의 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A씨가 수업 중 특정 정치성향을 주입하는 것 같다는 민원이 시민신문고위원회를 통해 접수됐다. 민원에 따르면 A씨는 수업 중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머무르지 말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주말에 일해도 봉급을 받지 않는 제도를 만들려고 하는데, 왜 윤석열 정부에 대한 20대 지지율이 높은지 이해할 수 없다” 등 현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태원 참사는 정부의 책임”, “독립운동가 중 사회주의자가 많았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교사가 어떤 수업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현 윤 정부 하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을 종북 용공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는 구시대적 모습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도 그중의 하나인지 그 교사의 수업 내용을 직접 보고 듣지 못해서 판단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기사 마지막 부분에 문제가 되었다는 “독립운동가 중 사회주의자가 많았다”는 발언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저 내용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따져봐도 틀린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대립적인 것으로 알거나 그 둘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실제 수업시간에 일제강점기를 다룰 때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설명하지만, 그 운동 자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차이점과 공통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피상적으로만 다룰 뿐이다. 그래서 이 답장을 통해 너에게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왜 일본을 앞에 두고 좌(사회주의세력)니 우(민족주의세력)니 하면서 우리끼리 싸웠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네 질문에 대한 너무 늦은 답이기도 하다.

    3.1운동의 힘

    1919년 3.1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기가 막힌 마술을 두 가지나 부렸단다. 첫째는 ‘공화주의’ 마술이다. 3.1운동 전에는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두 개의 이념 지향이 존재했단다. 뺏긴 나라를 되찾으면서 어떤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복벽주의는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체제로 다시 복귀하자는 것이고, 공화주의는 왕이나 황제를 없애고 국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아 권력을 맡기자는 주장이었지. 공화주의는 1907년 비밀결사로 만들어진 신민회가 처음 주장한 이래 1910년대 대한광복회 등이 이를 이었으나 복벽주의에 비해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단다.

    그런데 3.1운동을 거치면서 신기하게도 복벽주의는 거의 소멸하고 공화주의 지향만 남게 된단다. 이걸 공화주의 마술이라고 내가 표현한 거야.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는 복벽주의는 황제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3.1운동 이후 세울 만한 마땅한 황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운동이잖아. 형식상으로야 마지막 황제는 순종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고종을 식민지화 과정에서 고난을 겪은 군주로 여겼고, 이 때문에 고종을 사실상 마지막 황제로 생각했다는 거지. 이렇게 3.1운동이 사람들의 생각을 한방에 공화주의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3.1운동을 ‘3.1공화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3.1운동을 단순히 독립운동 이렇게만 보는 것과는 구별되는 시각이지.

    [사진]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하는 군중들. 3.1운동은 독립운동이자, ‘공화혁명’이었다. 또 한편 이 운동을 분수령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3.1운동이 일으킨 마술은 이것만이 아니야. 이전에는 민족주의 운동만 존재했는데, 3.1운동 이후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단다. 물론 3.1운동 이전에도 개별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있었어. 칼 마르크스에 의해 정립된 사회주의 사상은 1848년 공산당선언을 통해 그 지향과 비전을 제시했지. 그런데 한동안 이 사상은 책과 이론, 그리고 일부의 정치세력들에 의해서만 실천되었는데, 레닌 주도의 1917년 러시아 11월 혁명으로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거야. 이상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이 사상은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우리 조선에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들어오게 되었지. 다시 말하면 1919년 3.1운동 당시 가장 핫한 사상이 사회주의 사상이었다는 이야기야.

    당시 3.1운동에서 전 민족이 다 같이 한목소리로 독립을 외쳤지만, 실현되지 않자 일부 지식인들은 ‘뭔가 독립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없을까’를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큰 관심을 끌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거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은 이동휘로 알려져 있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이동휘는 1913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래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전설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활동을 남겼는데, 그의 계몽 활동으로 재만한인(在滿韓人) 사회가 혜택을 얻고 무관학교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을 길러내고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방색을 타파, 민족적 단결을 이루어내는 활동을 하다가 1917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뒤 러시아 혁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3.1운동 이전에는 민족주의 운동만 존재하다가 3.1운동 이후에 사회주의 운동이 새로운 조류를 이루면서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줄여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줄여서 ‘사회운동’)으로 분화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니까 일제는 1925년 사회주의 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새롭게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에 대응하게 되는 거란다. 이 법은 줄여서 흔히 ‘치유법’으로 불렸는데, 오늘날 국가보안법을 ‘국보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거야.

    관점의 차이

    그렇다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왜 공동의 적인 일제를 앞에 두고 분열하고 싸웠을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 사이의 관점 차이 때문이었어.

    관점의 차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두 운동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그래서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하는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웜업이라고 생각하렴.

    먼저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해보자.

    이순신 장군은 어떤 분이시지? 한국인들 대부분은 그를 민족의 영웅, 또는 성스러운 영웅이란 뜻의 ‘성웅’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이런 생각 해본 적 있니? 이순신 장군이 영웅인 것은 일본 민족의 침략에서 조선 민족을 지켜낸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한 거지. 민족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지. 그럼 이제 민족의 안경을 벗고, 불교의 안경을 써보자. 이제부터 나는 독실한 불교 신자야. 나는 살생을 끔찍이 경계하는 사람인데,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혹시나 내 발에 벌레가 밟히지 않을까 조심조심 발밑을 보고 걷는 사람이야. 이런 내가 봤을 때 이순신은 결코 영웅일 수가 없어. 그는 살생을 너무 많이 했단 말이야. 일본군도 많이 죽였겠지만, 군령을 어긴 부하들도 일부 죽였겠지. 좀 과격하게 말하면 ‘살인마 이순신’이지. 이런 이유로 나는 이순신을 영웅으로 볼 수 없다는 거지.

    이런 예는 어떨까?

    오늘 밤 축구 한일전이 상암동 월드컵 구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흥분할 필요 없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거야. 그럼 민족의 안경을 끼고 이 경기를 보자.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하지? 당연히 한국팀이지. 일본 민족을 대표하는 일본팀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한국팀의 경기이니까 당연히 우리 선수단을 응원해야겠지. 그런데 이제 민족의 안경을 벗고 다른 안경을 쓰고 이 경기를 보자. ‘축구 기술’이라는 안경이야. 나는 수비형 축구는 끔찍이 싫어하는 반면, 공격형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우연히도 한국대표팀은 전형적인 수비형 축구를 구사하고, 일본대표팀은 공격형 축구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해보자. 그래서 나는 한국팀의 축구 스타일이 싫고, 대신 일본팀의 축구가 좋은 거지. 그래서 나는 상암동 구장을 방문해 ‘간바레 니폰’이라고 쓴 응원 피켓을 들고 목이 터져라 일본팀을 응원한다. 한국인인 내가 일본팀을 응원할 수는 없는 거니?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이게 이상하면 네 친구들이 유럽 챔피언스 리그 축구경기를 볼 때 영국 사람도 아닌데 토트넘이나 멘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런 팀을 응원하는 것도 이상한 거지. 또 일본 여성들이 배용준을 욘사마라고 부르며 열렬히 좋아하고, 브라질 여성들이 한국의 BTS를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니?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겨루는 피겨 스케이팅도 그래. 우리나라에는 ‘브릴리언스 온 아이스 아사다 마오’라는 이름의 아사다 마오 팬클럽이 있어. 그들은 한국인이지만 김연아가 아니라 아사다 마오를 응원하겠지.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니? 누군가는 김연아처럼 키 큰 여성보다 아사다 마오처럼 키 작고 아담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김연아만 응원하란 법은 없지 않겠니?

    마지막 예는 차로 하자. 마시는 차(茶)가 아니라 이동수단인 차(車) 이야기야. 내가 이번에 새차를 구입할 예정인데 먼저 민족적 관점에서 차를 구입해보자. 어떤 차를 사야 돼지? 당연히 현대차나 기아차를 사야겠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만든 차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이제 민족의 안경을 벗고, ‘안전’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고 차를 사보자.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야. 내 친한 친구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 하필 국산차였는데 에어백이 안 터진 거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이것도 그냥 가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니까. 내가 병문안을 갔더니 그 친구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는 거야. 너는 차를 살 때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 항상 안전을 첫 번째로 고려해 차를 사라고. 그래서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 가장 안전한 차를 찾아봤더니 우리 국산차들도 많이 좋아졌지만 안전한 차의 상징으로 ‘독일차’들이 많이 거론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독일차를 사기로 했어. 한국인이 내가 독일차를 사는 게 이상하니? 이게 이상하면 2022년도 기준 우리나라에서 수입차 등록 비율이 6프로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서울 강남구는 수입차 등록 비율이 18.3%야. 5대 중에 한 대는 수입차라는 이야기야. 더 놀라운 것은 부산 중구인데, 수입차 등록비율이 무려 50.9%, 즉 차 두 대 중에 한 대가 수입차라는 이야기야. 한국인이 수입차를 사는 게 이상하면 멀리 갈 것 없이 네 필통도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야. 네 필통에는 분명히 일제 펜이 최소 몇 자루는 들어 있을 거야. 너는 왜 일제 펜을 사 쓰는 거지? 네가 펜을 살 때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니? 이것이 일본 펜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필기감이 좋은지 나쁜지가 판단 기준이었겠지.

    지금까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관점이 달라지면 판단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잘 봐. ‘이순신은 영웅이다’, ‘한일 축구전에서는 한국팀을 응원한다’, ‘차는 국산차를 구입한다’ 이 세 가지 행동은 너무도 일반적인 상식이고, 별다른 의구심을 가져보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이지. 그 말은 우리 사회의 기본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이 ‘민족(주의)적 관점’이라는 거야. 그러니 이 관점에서 벗어난 다음의 행동 즉 ‘이순신은 나의 영웅이 아니다.(불교적 관점)’, ‘나는 일본 축구팀을 응원한다.(세계 축구 시민의 관점 혹은 축구 기술의 관점)’, 나는 독일차를 구입한다.(안전의 관점)’ 이것들은 무척 생소하거나 당혹스럽게 다가오는 거지. 다시 말하면 너희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민족주의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알게 모르게 교육 받아온 것이지. 너희들에게는 이미 ‘민족주의’가 탑재되어 있어. 이 민족주의도 물론 장점이 있다. 자기가 속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이익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면이 있지. 그런데 문제는 이 민족주의가 과도해지면 우리 민족 이외의 민족에 대해서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는 점이지. 사실 우리에게는 민족주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과잉이 문제야.

    왜, 이런 경우 있잖아.

    명동에 나갔는데,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있어. 그들을 보는 순간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솟구치는 느낌이 있어. 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3.1운동, 유관순, 김구, 독도, 의병 학살, 의열단……나는 그들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하고 싶다.

    이것이 민족주의가 과도하면 나타나는 행동이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들은 그냥 우리나라를 방문한 사람들이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지. 내가 일본에 가서 그들로부터 친절을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작은 친절에 감사하는 똑같은 세계 시민인 것을,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민족적 관점을 들이대고 우리민족, 일본민족, 중국민족 이런 식으로 선을 그어 구분하는 것에 익숙하단 말이지.

    자. 이렇게 웜업을 해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점을 살펴볼 차례야. 민족주의는 이해가 잘 될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너희들은 민족주의적으로 사고하도록 교육 받아왔기 때문에 이미 민족주의자야. 그런데 사회주의는 조금 생소할 거야.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는 위험한 것, 배척과 탄압과 말살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Vs 사회주의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 현재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 이때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현실을 어떤 관점으로 인식했을까? 그렇지. ‘민족적 관점’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되는 거지. 민족과 민족의 대립 구도로 현실을 인식했다는 이야기지. 일본 민족은 지배 민족으로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조선 민족은 피지배 민족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때 조선 민족 내부의 다양한 계층들이 있겠지. 지주, 자본가, 노동자, 농민, 학생, 빈민 등등 이들은 다 같은 편으로 묶이겠지. 왜냐면 같은 민족이니까. 같은 조선 민족이라면 처지와 형편을 떠나서 다 우리 편이다. 그러면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해방’, 즉 ‘독립’이다. 일본 민족의 지배에서 우리 민족이 벗어나 독립하는 것.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지.

    그럼 이런 질문을 해보자. 민족주의자들은 지고지순한 목표인 민족해방(독립)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었을까? 총칼을 든 무장투쟁은 어떨까? 이것은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다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라 바깥에서는 무장투쟁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쉽지 않았겠지. 그래서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합법적 방법 내에서 민족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실력양성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일본의 지배하에서 장기적으로 민족의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기르자는 운동이다. 점진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충분히 기르면, 나중에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 ‘선 실력양성 후 독립달성’의 논리인데, 지금 당장 독립이 어렵다고 인정한 것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독립 유보론’인 셈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이 실력양성을 위해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을 전개했단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이라는 단어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는데, 민족은 신성하고, 지고지순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지.

    자, 여기까지는 쉽지?

    그러면 금기의 사상인 사회주의로 가보자. 이제는 민족의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을 써야 돼. 사회주의자들이 쓰는 안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계급’이라는 안경이야. 이 안경을 쓰고 보면 식민지 현실을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주·자본가들의 유산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농민의 무산계급이 대립하고 있다. 유산계급은 무산계급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산계급이 먼저 착취의 현실을 자각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 굳세게 단결하여 계급혁명을 일으켜 유산계급을 타도하고, 계급해방, 즉 평등을 이루자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한 최고 가치는 ‘평등’, ‘계급해방’인 것이다. 그들은 낫(농민)과 망치(노동자)로 상징되는 무산대중의 단결을 강조한다. “무산대중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전 세계의 무산대중이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야.

    계급혁명을 상징하는 색깔이 무엇인 줄 아니? 그래 빨간색이야.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붉은색을 좋아한단다. 지금 현재 국가의 국기 색깔이 유난히 붉은색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 사회주의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어. 중국, 쿠바, 북한, 베트남 등이 그렇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이 붉은색을 좋아했으므로, 속된 말로 그들을 낮추어 부를 때 ‘빨갱이’라고 하는거야.

    [사진] 2023년 1월 베트남 한 시내에 걸린 깃발 등에 붉은색이 과도하게 들어간 것을 통해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 속 붉은 깃발 속 문양은 낫(노동자)과 망치(노동자)를 상징한 것이다. (박건호 촬영)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계급해방을 위해 타도해야 할 대상인 지주, 자본가 중에는 일본인 지주, 자본가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 자본가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민족보다는 계급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 그럼 네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지주·자본가라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떤 사상이 더 끌렸겠어? 당연히 민족주의지. 민족주의 입장에 서면, ‘민족이 같으면 같은 편’이라는 논리 속에서 나는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될 수 있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그로 인해 많이 배우기도 한 식자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나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주·자본가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위험한 사상이었지. 조선인 지주, 자본가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민족주의자들은 경악했겠지. 왜? 이것은 역량을 약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야. 민족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우리끼리 대립하는 것은 민족분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말한다.

    “계급해방(평등)도 좋지만, 일단 우리는 식민지배 상태이므로 먼저 민족해방(독립)부터 이룬 다음에 평등을 하든, 왕정을 하든, 그것은 이후 논의하면 되지 않소”

    그러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에게 기가 막힌 반론을 제시한다.

    “자. 당신들이 설정한 일본민족 대 조선민족의 대립 구도와 우리가 나눈 유산계급 대 무산계급의 대립 구도가 얼핏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소. 그러나 크게 보면 같은 것이오. 왜냐하면 유산계급의 대다수는 일본사람들이고, 무산계급 대다수는 조선사람들이기 때문이오. 민족모순이 곧 곧 계급모순이란 말이오. 그래서 조선인 무산계급이 계급혁명을 일으켜 유산계급을 타도하면 평등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독립도 이룰 수 있는 것이요. 계급혁명이 곧 민족혁명인 셈이오. 식민지배를 받지 않는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팔자 좋게 평등만 말하면 되지만, 우리처럼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평등과 독립, 이 두 가지 목표를 한 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오. 단 여기에서 하나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소수의 조선인 지주· 자본가는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오.”

    J야. 이렇게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들이 오로지 독립만을 추구했다면, 사회주의자들은 평등과 독립의 동시 달성을 내세웠단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을 독립운동가로 평가하고 혹은 정부에서 그 뜻을 기리고 표창하는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란다. 그래서 글 앞머리에서 울산의 어떤 교사가 해서 문제가 됐다는 “독립운동가 중 사회주의자가 많았다”는 발언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고,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는 거야. 독립운동가 중에는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설마 사회주의자 빨갱이들이 독립운동을 했을라구”

    이렇게 손쉽게 생각해버리면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어. 다시 말하지만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 둘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겠니?

    이 둘은 쓰는 용어부터도 달랐어.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독립’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민족’ 속에는 타도의 대상인 조선인 지주·자본가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은 지주·자본가를 뺀 나머지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인 ‘민중’, ‘인민’, ‘무산대중’, ‘무산계급’ 이런 용어를 많이 쓴단다. 혁명의 색인 ‘붉은색’, ‘적색’이란 말도 좋아하고, ‘계급’, ‘평등’ 이런 용어들도 좋아하지.

    다시 정리해보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봤고, 민족의 독립을 지고지순의 가치로 생각했다. 단 독립 이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지.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선 민족 전체가 분열되지 않고 힘을 합쳐 힘을 기르자는 취지의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이럴 경우 조선인 지주· 자본가는 사회 지도층으로 이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자들은 ‘계급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봤고, 계급혁명을 통해 평등과 독립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도 유산계급으로 투쟁의 대상이라고 보았던 거야. 나중에는 이들 식민지의 유산계급에 대해서 그 내부의 분화와 차이를 보기도 했지만.

    물산장려운동과 농촌 소설에 대한 다른 이해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이제 거의 다 왔어. 지금까지 그들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조금 막연하고 추상적이지? 이를 시대 현실에 대입해서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줄게.

    먼저 일제강점기 1920년대 전개된 토산품(국산품) 애용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살펴보자.

    이 운동을 전개한 쪽은 민족주의자들이었을까? 사회주의자들이었을까? 당연히 민족주의자들이었지. 이 운동 자체가 민족주의자들이 전개한 민족실력양성운동에 포함된 운동이기도 해. 민족적 관점에서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토산품이 많이 팔리면 우리 민족 전체의 경제력이 커지겠지. 그러면 우리 민족의 실력이 양성되는 거니까 민족주의자들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그런데 이제 민족의 안경이 아니라 계급의 안경을 쓰고 이 운동을 보자구.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을 좋게 볼 수가 없겠지. 왜냐하면 이 운동은 노동자· 농민 즉 무산계급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고, 유산계급의 배만 불리는 운동인 것이지. 노동자·농민 중심의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이 운동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을 맹렬히 비판했던 거지.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것이 왜 비판 받아야 되는지 너희들이 봤을 때는 이해가 안되겠지만,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안경을 쓰고 현실을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그런 차원의 문제였던 거지.

    이제 이해가 좀 되니?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농촌소설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농촌에서의 농민의 삶이라는 소재는 양쪽 다 똑같겠지. 그럼에도 민족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쓴 농촌소설과 KAPF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쓴 것은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단다.

    먼저 민족주의 작가의 작품!

    기본적으로 이들은 농촌 계몽적 성격의 소설을 썼단다. 무지몽매한 농민들이 계몽되는 것이 우리 민족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실력양성이고 그것이 민족실력양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 소설 제일 앞머리에는 농민들을 가르칠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문맹을 퇴치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농촌으로 들어가겠지. 그리고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과 농민들의 무관심과 건강문제 등의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결국은 계몽하기 시작하는 농민들이 등장함으로써 소설을 끝나게 되지. 아이들이 나무나 창가에 매달려 글을 배우겠다는 열의를 보여줌으로써 끝을 맺는 심훈의 [상록수]가 기억날 거야. 이광수의 [흙]도 이런 계열의 소설이지.

    그런데 사회주의 계열 작가가 농촌소설을 쓰면 소재는 동일해도 전혀 다른 소설이 나와. 처음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단다. 악덕 지주가 힘없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딸을 강제로 끌고 간다든지, 아니면 소작농의 손목을 자른다든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갈등을 부각시키겠지.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무산계급의 현실 자각과 조직화겠지. 그들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분노하며 같이 지주에 맞서 싸우자고 공동으로 대응하겠지. 그리고 소설의 끝은? 주로 낮보다는 밤을 배경으로 끝나야, 보다 극적이겠지. 한 무리의 횃불이 지주의 집을 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야”라는 외침이 들리겠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라 위의 농촌 계몽적 성격의 소설과는 전개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을 거야.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때 습격 당하는 지주가 일본인이라면 민족주의자들도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조선인 소작농민들이 일본인 지주를 공격하는 거니까. 이건 민족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민족과 민족의 대립구도’니까. 그런데 사회주의 계열 작가들은 때로는 습격 당하는 지주를 얄궂게도 조선인으로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야. 그들에게는 민족보다는 계급이 더 중요한 거니까. 이럴 경우에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격하게 비판했겠지. 조선인 소작농민들이 조선인 지주를 공격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끼리 싸우는 것이고, ‘민족분열’로 보일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외국에서 들어온 잘못된 사상에 빠져 우리 민족의 역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던 것이지.

    민족이 중요하냐? 계급이 중요하냐?

    오로지 독립이냐? 평등과 동시에 독립이냐?

    조선인 지주, 자본가는 우리 편이냐? 타도의 대상이냐?

    그들은 이렇게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했단다.

    이 정도면 네가 나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되었을 거야. 왜 일본 앞에서 우리끼리 편을 나누어 싸웠는지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대립했던 그들이 때로는 힘을 합치기도 했다는 사실이야. 이념과 노선이 다른데 그들은 왜 또 단결할 수 있었던 걸까? 이제 이 문제를 다루어보자.

    [사진] 왼쪽은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소설인 심훈의 [상록수], 오른쪽은 사회주의 계열의 농촌 소설인 이기영의 [고향]이다. 농촌과 농민이라는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그들은 다른 관점으로 당시 농촌 현실을 그렸다.

    신간회의 결성

    다음 글을 먼저 읽어 보자. 이 글은 1926년 11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정우회 선언]이야.

    우리는 우리 자체의 종래의 모든 소아병적 자세를 지양하고 우리의 승리로의 구체적 전진을 위하여 현실적 모든 가능의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또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히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아니하는 것에 한하여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건데 기억나니? 너는 이 글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들이 이렇게 어렵냐고 투덜됐지? 그런데 이 문건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단결해서 신간회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어. 핵심을 요약하면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해서는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아니하는 세력에 한해서는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나가자”는 이야기야. 왜냐하면 그들은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지.

    아직도 어렵다고? 이제 이 선언의 내용과 신간회 결성까지를 살펴보자.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반목했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 계열에서 이광수, 최린 등 일부 세력이 이탈을 하게 된단다. 그들은 ‘자치론’이라는 것을 내세우게 되는데, 이 주장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 지배를 인정하고 식민지 조선 내에서 의회도 만들고, 참정권도 얻는 등 일정한 정치적 권리를 얻자는 거지.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쉬울 거야. 그들은 이스라엘으로부터 독립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자치권만 인정받고 있지.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은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한단 말이야.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양성운동이 ‘독립 유보론’ 정도에 머물렀다면, 이들의 자치론은 ‘독립 포기론’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단다. 이 자치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이광수로 그는 동아일보에 1924년 [민족적경륜]이라는 글을 발표해 큰 파문을 일으킨다. 그의 공개적인 자치론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경악했고, 동아일보 불매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이광수는 큰 비판을 받았지.

    이광수, 최린 등 자치론자들을 역사에서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부르고, 독립을 포기하지 않은 나머지 민족주의 계열은 따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부른단다. 또한 자치론자들은 타협적 민족주의자 말고도 당시에는 “민족개량주의자”, “기회주의자”라고 불렸단다. 이렇게 한국인들의 운동 진영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으로 나뉘어 싸우는 중 자치론자가 등장함으로써 다시 민족주의 계열이 타협, 비타협 세력으로 분화되면서 ‘이렇게 세포분열하듯이 계속 분열을 거듭하다가는 우리 모두가 다같이 망할지 모른다’는 공멸의 위기감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1925년에는 일제가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을 제정함으로써 사회주의 계열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지. 그리하여 이렇게 서로 싸우지 말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대립과 갈등을 넘어 단결을 모색하자는 운동이 전개되는데, 이 운동을 ‘민족유일당운동’이라고 부른단다. 이 운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1926년이었는데, 이해 있었던 두 사건을 징검다리 삼아 이듬해인 1927년 2월에 민족유일당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던 거지.

    [사진]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힘을 합쳐 민족유일당으로 만든 단체였다.

    방금 징검다리로 표현한 1926년 두 사건은 무엇일까?

    먼저 1926년 6.10만세 운동을 들 수 있어.

    고종이 죽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지? 그런데 마지막 황제로서 창덕궁에 머무르던 순종이 1926년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게 된단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회주의 계열로 당시 조선공산당은 권오설을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 총책임자로 임명해 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나갔단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 계열은 이 운동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다만 그중 권동진 등 천도교 일부 세력이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해 같이 힘을 합쳤단다. 이렇게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일부 협력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이후 신간회가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끼쳤어. 물론 이런 운동 준비가 사전에 적발돼 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이 대부분 구속되긴 했지만 말이야.

    두 번째 징검다리는 [정우회 선언]이야. 6.10만세 운동으로부터 몇 달 뒤인 11월에 사회주의 계열 사상단체인 정우회가 공개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단결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게 앞에서 살폈던 [정우회 선언]이야. 이건 사회주의 계열 쪽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거야. 먼저 민족주의 계열에 대해서는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가 아닌 한 단결, 제휴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타락하는 형태’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니? 그렇지. 독립 포기론을 내세웠던 자치론자들을 말한 거야. 제휴 대상에서 배제하고 배격할 세력을 먼저 지목한 것이지. 이런 표현을 통해 그들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단결과 제휴를 주장한 거야. 그 다음에 봐야 될 표현은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을 충분히 승인하여’라는 부분이야.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

    자. 내가 예를 들어줄게.

    식민지 현실을 ‘서울역’이라고 비유해보자. 민족주의 계열은 이 서울역을 출발해서 어디까지 가기를 희망하느냐 하면 대전역이야. 대전역은 ‘독립’을 상징한다. 그들은 대전역까지만 가기를 원해. 내린 후의 구체적인 일정이나 계획은 따로 없어. 그런데 사회주의 계열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먼길을 떠나는데 그들은 대전역에 도착해도 내릴 생각이 없어. 그들은 내달아 부산역까지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 대전 거쳐 부산까지. 여기서 부산역은 ‘평등사회’을 상징해. 독립과 동시에 평등까지 이루겠다는 거지. 이렇게 그들 둘은 가고자 하는 종착역이 서로 달라.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운동이 분열되고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그들은 생각한 거지.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달라도 적어도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있는 동지야. 대전까지 가는 그 과정까지는 동지(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이야. 그 성질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서 힘을 합쳐보자는 거지. 서울역, 대전역, 부산역 이런 비유를 가지고 [정우회 선언]을 다시 읽어봐. 그러면 이해가 쉬울 거야. 다만 이 동맹은 대전역까지만 ‘한시적’으로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근원적 한계를 설정했음을 미리 알아 두어야 해. 이 동맹은 영원한 동맹이 아니고 조만간 닥치게 될 분열의 씨앗이 이미 들어있음을.

    이렇게 정우회 선언이 나오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이것이 결국 이듬해 결국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이렇게 결성된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이 힘을 합쳐 민족유일당으로 만든 단체였어. 회장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월남 이상재가, 부회장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벽초 홍명희가 맡았단다. 신간회는 강령은 다음과 같았어.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두 번째 항목의 ‘단결’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단결을 말하는 것이고, 세 번째 항목의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것은 자치론 배격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너도 이제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한다.

    이 신간회는 1927년 창립 후 원산노동자 총파업에 대한 지원,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대한 지원 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자들의 ‘해소(解消)’ 주장으로 1931년 결국 해소된단다. 해소는 ‘발전적 해체’라는 의미인데, 어차피 이 동맹은 ‘일시적 동맹’을 표방하고 결성된 단체임을 기억할 거야. 사회주의자들의 해소 주장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던 코민테른이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를 지적하며 그들과의 제휴보다는 노동자·농민 중심의 무산대중의 역량 강화에 힘쓰자는 노선 전환에 따라 나온 것이기도 했어. 계급노선의 강화를 표방한 거지. 이렇게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결국 결별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단결을 이뤘다는 소중한 경험을 역사에 남겼고, 이런 경험은 해방 이후 1946∼47년에 전개된 좌우합작운동, 1948년의 남북협상의 전개 등에 영향을 끼쳤단다.

    J야.

    ‘독립운동가 중에 사회주의자가 많았다’는 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관점과 생각들이 존재한단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도 배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과 생각은 무조건 잘못됐으므로 박멸하자는 그 독선이 역사에 얼마나 많은 살육과 야만을 저질렀는지 너도 잘 알 것이다.

    톨레랑스,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 것은 그때나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너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긴 글을 마친다.

    [사진] 왼쪽은 신간회 창립을 축하하는 신문 만평으로 깃발에 ‘대동단결’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른쪽은 신간회 창립 사실을 보도한 신문 기사이다.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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