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네굿' 보고 오열한 브라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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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6일 01: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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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의 21세기에 강신무를 선언하면서 지난 2002년 설립된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지난 해 9월부터 11월까지 남미 6개국을 돌면서 1인극인 ‘부네굿’을 공연했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 탈과 굿 양식의 제의연극을 소개하여 한국- 라틴 아메리카 간의 공연예술 교류를 확장하고, 남미 6개국의 연극단체와 탈 워크숍을 진행하며 탈을 통한 창작방법을 소개함과 동시에 남미의 공연예술 문화를 조사하고 공유하기 위해 순회 공연을 기획했다.

또한 아시아-라틴아메리카 민중연극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아시아-라틴아메리카 연극 단체의 교류 프로그램을 지속ㆍ발전시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이번 순회 공연을 기획한 목표다. <레디앙>은 그들의 남미 순회공연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의 명동거리와도 같은 플로리아노폴리스 도심 한복판에서 바쁘게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파는 아저씨도 일을 멈췄고 장신구를 팔던 원주민들과 그들의 아이들도 달려와서 공연장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무대 한복판에 브라질 지도가 그려져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솟대들 -빨강, 파랑, 하얀, 검정으로 4방위를 상징하는 색깔의 솟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공연을 기다렸다.

   
  ▲ ‘플로리아노폴리스’ 거리, 관객들 사이로 등장하는 ‘부네’
 

어느덧, 공연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부네가 관객들 사이로 등장한다. 시끌벅적했던 거리가 한순간 잠잠해지고, 200여 명의 브라질 사람들이 낯선 한국 땅에서 온 배우의 몸짓과 탈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부네는 브라질 지도 위에 놓여 있는 발전노동조합의 티셔츠를 어루만지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했다. 이 거리의 관객들이 직접 쓴 소원지를 태우고 지신을 밟으며 춤을 추는 부네의 움직임은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허물어주었다. 

   
  ▲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거리 공연에서 ‘부네’가 지신밟기 춤을 추고 있다.
 

공연이 끝난 후,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참아가며 웃으신다. 어떤 할머니는 배우를 끌어안고 오열한다. 이들에게는 또 어떤 아픔이 있는 것일까? 부네굿이 그들의 아픔에 어떻게 다가간 것일까,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을까… 

이어서 박진감 넘치는 리듬의 북소리가 울려퍼진다. 브라질 발전노동조합 산하 노동자 문화단체의 노래공연, 젊은 문화활동가들의 모임 Espiral의 난장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한쪽에서 커다란 종이에 자신들의 세상을 그리고 있고, 행사 참가자들은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시낭송을 한다.

젊은 타악그룹이 힘있게 북소리를 울리며 연주를 시작하자 Espiral이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하나의 원을 만든다. Espiral 활동가들은 원주민 아이들을 무등 태우고 거리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춘다. 삭막했던 했던 도심의 거리가 어느새 행복한 웃음소리와 자유로운 몸짓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날은 브라질 발전노동조합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공유하는 거리집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집회에선 일방적인 주장이나 선동, 단상이나 무대가 별도로 없다. 집회 진행자와 거리를 오가는 이들 사이에 경계도 보이지 않는다. 연출도 안무도 없는 시와 노래와 춤으로 한 데 뒤섞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국의 정치, 노동 문제를 공감한다.

   
  ▲ 브라질 발전노조 문화활동가들의 타악공연
 
   
  ▲ 젊은 문화활동가 그룹 ‘Espiral’이 거리의 인디오 아이들을 무등 태우고 춤춘다.
 

발전노조 문화부장은 룰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브라질의 노동조합 운동이 약해졌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가져간 한국의 노동운동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도 너희처럼 전투력을 회복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도 가난하고 약하다"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힘을 보았다. 너무도 여유롭고 당연하게 신자유주의 질서를 거부하고 있는 민중의 힘을.

“우리에게 예술이 왜 필요한가!”
이날, 행사장 옆쪽에 Espiral이 크게 써 놓은 글귀이다. 가난하더라도 예술을 품고 살아가는 민중의 삶엔 일류국가, 경쟁력을 운운하는 경제논리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예술을 물, 공기처럼 공유하고 있는 이들에겐 더불어 사는 게 당연한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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