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한 좌파 음유시인의 모든 노래들
        2007년 02월 24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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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모던포크운동은 미국의 대중음악 역사에서 정치적 행동주의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했던 분야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같은 현상은 없었다. 물론 모던포크운동에 몸담았던 음악인들이 모두 같은 정도로 정치적 문제제기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주제들을 노래하면서도 의식적으로 현장과는 거리두기를 했던 가수들도 물론 있고, 체면치례수준에서 집회나 노래모임에 얼굴을 내비쳤던 가수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크싱어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현실을 담아야 하고 현실은 언제나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노력했다.

    우리에게는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송을 부른 이로 기억되는 폴 사이먼도 무대에서는 ‘쿠바 예스, 닉슨 노!Cuba Si, Nixon No’ 같은 선동적인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혁명이 서서히 진압당하기 시작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파리협상도 진척되면서 ‘거리’에는 침묵이 번져나갔다. 동시에 그 거리에 기반했던 모던포크운동도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우울한 7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좌파들에게 60년대는 혁명의 시기였다. 반면 80년대는 끔찍한 반동의 시대였다. 반대로 우파들에게 60년대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지만 레이건의 80년대는 찬란한 승리의 시대였다. 그러나 좌파건 우파건 70년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우울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사실상의 패배는 미국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워터게이트 사건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넘어 냉소주의를 확산시켰다. 미국의 노동계급은 부유하다는 신화가 깨진 것도 이 시기였다. 60년대 공동체주의의 실패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불러왔고 가족은 이미 해체됐다. 보수건 진보건 미국사회는 전반적으로 희망을 잃고 방향을 상실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런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필 옥스는 1976년 4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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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하는 저널리스트 – 필 옥스Phil Ochs
     

    필 옥스는 톰 팩스턴과 함께 모던포크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가수였다. 1964년 음반 데뷔 후 죽기 직전까지 그는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1970년의 음악스타일 변경에도 불구하고 ‘전쟁’, ‘인권’, ‘노동’에 관해 노래한다는 모던포크의 정신을 고수했던 몇 안 되는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존 바에즈 같은 포크명문가 출신과 달리 필 옥스는 1958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포크에 별 관심도 없었고 정치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청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인 군사기숙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대학 입학 후 사귄 친구들과 미국여행을 통해 ‘세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옥스는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 신문을 발행하고 기숙사 친구와 ‘싱잉 소셜리스트The Singing Socialists’라는 듀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졸업을 포기하고 뉴욕에 올라와 포크 뮤지션들의 집합소인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가 1962년이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최대의 포크공연인 뉴포트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초청될 정도로 포크 팬들과 평론가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1964년에는 첫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1970년까지 매해 한 장씩의 앨범을 선보였지만 그해 3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카네기홀의 공연 이후로는 침체에 빠져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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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rds of Fame"
    Phil Ochs
    1976년

    Side 1
    1. I Ain’t Marchin’ Anymore
    2. One More Parade
    3. Draft Dodger Rag
    4. 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
    5. The Bells
    6. Bound For Glory
    7. Too Many Martyrs
    8. There But For Fortune
    Side 2
    1. I’m Going to Say It Now
    2. Santo Domingo
    3. Changes
    4. Is There Anybody Here?
    5. Love Me, I’m a Liberal
    6. When I’m Gone
    Side 3
    1. Outside of a Small Circle of Friends
    2. Pleasures Of The Harbor
    3. Tape From California
    4. Chords Of Fame
    5. Crucifixion
    Side 4
    1. The War Is Over
    2. Jim Dean of Indiana
    3. Power and the Glory
    4. Flower Lady
    5. No More Songs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1976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 후 그의 가족들이 추모앨범의 의미로 편집한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발표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정성들여 제작한 흔적이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특히 서로 다른 두 회사로 나뉘어 있던 음악활동을 하나의 세트에 모았다는 점에서 소중한 음반이다. 필 옥스는 1967년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일렉트라 레이블에서, 이후로는 A&M 레이블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명성의 코드"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발표된 필 옥스의 선집들은 모두 해당 음반사 시절의 녹음들로만 구성됐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의 데뷔 무렵부터 마지막까지의 음악활동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구성돼있다. 사망 직후였기 때문에 죽은 가수를 재조명하려는 유가족들의 뜻에 각 음반사들이 쉽게 동의해줘서 가능했다. 그러나 상업적인 이유로 이후로는 이런 기획과 협력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앨범은 같은 이유로 CD로는 제작되지 못했다.

    앨범 커버의 안쪽과 뒷면은 동료 음악인이며 역시 사회운동가에 비트족 시인으로 유명한 에드 샌더스가 필 옥스의 일생을 길게 쓴 글이 신문 지면의 형태로 빼곡히 적혀있다. 이 디자인은 이유가 있는데 필 옥스는 자신을 빗대어 ‘노래하는 언론인troubadour journalist’이라고 불렀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옮겨왔을 무렵에도 필 옥스의 목표는 직업적인 포크가수가 되는 것과 함께 명망있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두 가지를 혼합한 형태를 해결책으로 삼은 셈이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의 제목은 "노래할만한 모든 소식들All the News That’s Fit to Sing"이었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오랜 사시인 ‘인쇄할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를 본 뜬 것이다.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두장의 레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레코드는 데뷔앨범부터 모두 3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일렉트라 레이블 시절의 녹음들을 담고 있다. 첫 곡인 ‘나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으리I Ain’t Marchin’ Anymore’는 그의 초기 반전노래 중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아직 베트남 반전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발표된 곡이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밥 딜런의 대표적인 반전가요 ‘신은 우리의 편With God On Our Side’처럼 미국의 역사적인 전쟁을 차례로 언급하는 구성이다. 다만 밥 딜런의 노래가 반어법적인 표현을 통해 미국의 뻔뻔함을 드러내는데 비해 필 옥스는 직설적인 가사로 미국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징병기피자 랙Draft Dodger Rag’도 당시 미국의 징병제와 군사정책을 비판한 곡이다.

    ‘리처드 닉슨의 나라에서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자신의 초기 발표곡인 ‘미시시피주에서’를 개사해 다시 녹음한 곡이다. ‘미시시피주에서’는 당시 만개했던 흑인민권운동을 지원하는 노래였다.

    ‘종들The Bells’는 에드가 알렌 포의 시에 필 옥스가 노래를 입힌 것이고,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Bound For Glory’은 우디 거스리의 자서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노래다. 모든 모던포크운동의 순례자들이 그렇듯이 필 옥스 역시 대학시절 만난 우디 거스리의 음악과 글을 통해 포크의 미학과 미국의 역사에 대해 눈을 떴다.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은 신출내기 포크 가수로서의 신앙고백이자 예언가에 대한 찬가에 해당하는 노래다.

    ‘운이 없었더라면There But For Fortune’은 존 바에즈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필 옥스가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부터 첫 번째 레코드의 마지막 노래인 ‘내가 떠날 때When I’m Gone’까지의 7곡은 모두 그의 세번째 앨범이자 일렉트라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필 옥스 콘서트Phil Ochs in Concert"에서 뽑은 것이다.

    "필 옥스 콘서트" 앨범은 커버 뒷면에 8편의 마오쩌뚱 시를 영역으로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옥스는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란 말인가?’라는 문구를 함께 적어놓았다.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주석과 악수를 나눈 것은 6년 뒤의 일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으로 대중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은 ‘나는 리버럴이에요Love Me, I’m a Liberal’이다. 이후로 필 옥스의 무대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곡이기도 하다.

    케네디의 죽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듯이 흐느끼지만 말콤X의 죽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흑인민권운동에는 열정적이지만 그들이 옆집으로 이사오는 것은 꺼려하는, 사회운동에 참여하지만 혁명에는 거부감을 가지는, 노동조합의 간부직에서 공산주의의자들이 축출되는 것을 지지하고 한국전쟁에서 빨갱이들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는 자칭 ‘민주당 진보파’들을 꼬집은 노래다.

    필 옥스는 산별노조인 ‘미국방송예술인연맹AFTRA’의 조합원이었다.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포크가수는 많았지만 조합원증을 바지에 넣고 다니는 가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 1965년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캠퍼스에서 열린 베트남반대집회에서 노래하는 필 옥스(무대 위)
     

    두 번째 레코드는 67년 A&M 레이블로 이적한 뒤의 작품들을 담고 있다. 레이블의 교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당시 대부분의 포크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기타와 완성된 밴드의 지원을 받은 음악으로 전환했다.

    다소 저음의 목소리로 경쾌하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무기였던 그의 음악은 이제 바로크 스타일의 편곡이 덧붙여졌다. 거주지도 미국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두 번째 레코드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베트남 반전가요인 ‘전쟁은 끝났다The War Is Over’이다. 필 옥스가 활동에 변화를 준 67년은 미국사회운동의 주축이 민권운동에서 반전으로 이전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는 여전히 무대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와 행진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는데 ‘전쟁은 끝났다’는 일반 시위대의 입에서도 자주 불리어졌던 노래였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직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거의 마지막 반전집회에서 필 옥스는 10만명의 시위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불렀었다. 운동의 종결을 상징하는 의식으로는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그의 마지막 무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앨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노래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부와 명예를 위해 노래하는 상업적인 음악을 경계하는 곡이다. ‘인디애나의 짐 딘Jim Dean of Indiana’은 어린 시절 그의 스크린 영웅들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딘의 무덤을 직접 찾아가서 만든 노래다.

    마지막 곡인 ‘노래는 이제 그만No More Songs’은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인 1970년의 "그레이티스트 힛츠Greatest Hits"의 끄트머리에 실려 있다. 앨범은 제목과 달리 새로 발표하는 곡들을 모은 역설적인 유머였다. 필 옥스는 미국의 구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과거와 미래가 정면충돌했던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집회장 안으로 진입해 항의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거리에서 체포돼 잠시 구류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를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투쟁의 실패는 그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1970년 그는 초기 록큰롤을 흉내내는 음악스타일로 대중 앞에 섰다. 낡은 음악방식에 대한 회의와 대중성에 대한 고민, 운동에 대한 부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행동이었다. 그의 ‘변신’에 대해 찬반양론이 일었지만 논란보다는 외면의 비중이 더 높았다.

    이런 복잡한 심경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언을 담은 노래가 ‘노래는 이제 그만’이다. 이 노래는 이렇게 끝맺는다. "이봐요, 집에 아무도 없는게요? 미안합니다. (…) 목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노래는 없는 거로군요."

    * * *

    필 옥스에게는 중요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72년 세게 여행을 떠났던 그는 칠레에서 빅토르 하라와 우연히 만나 몇 일간 함께 여행을 했다. 이때의 만남은 빅토르 하라의 부인 조안 하라가 쓴 전기 "끝나지 않은 노래"에 기록되어 있다.

    1973년 9월 칠레 인민연합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빅토르 하라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옥스는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었다. 그해 말 귀국한 옥스는 즉시 죽은 친구와 대통령동지를 위해 자선공연인 "살바도르 아옌데와의 저녁An Evening with Salvador Allende"를 기획했다.

    1974년 5월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자선공연에는 그를 비롯해 전 법무장관인 램지 클라크와 피트 시거, 밥 딜런, 알로 거스리 같은 이들이 무대에 올라 칠레의 투쟁에 연대하고 쿠데타군을 비난했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세게 각지에서는 칠레연대콘서트가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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