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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리비아의 탈식민적
    복수국민국가 변혁과 대중대학 운동
    [책소개]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안태환(옮긴이)/갈무리)
        2022년 11월 26일 08: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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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이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하는 것입니다

    콜롬비아의 한 대학의 민법 강의실에서 토지 거래와 개인 재산권에 대한 설명을 듣던 원주민 학생이 교수에게 말했다. “우리 공동체에서 토지 매매는 불가능합니다. 땅이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답했다. “나는 지금 지식을 가르치고 있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가 콜롬비아에서 정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법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의 조교가 겪은 일이다. 드 소우자 산투스는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에 수록된 발표문들에서 여러 차례 이 사례를 언급한다.

    산투스는 민법 교수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지식”이라고 선언한 그 순간 원주민 학생은 지식을 모르는 무지한 자가 되었다고 본다. 민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원주민 공동체에서 배운 고유의 지식을 잊어야만 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학은 과학 지식의 단일문화를 방어하고 역사상 가장 극적인 범죄인 ‘인식론적 살해’에 공모해온 기관이다. ‘인식론적 살해’는 농민의 지식, 원주민의 지식, 아프리카계 후손의 지식에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그리고 지식의 죽음은 이 지식을 사용하는 사회 집단을 살해한 것과도 같았다.

    ‘지식의 생태학’을 창출해야 한다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 라빠스 북쪽에 거주하는 원주민 집단 빠까우아라족 공동체에는 사회적으로 인간 부모가 없고, 모두가 형제 관계를 맺는다. 대신 나무들이 이들에게는 부모이다. 빠까우아라족은 오늘날 빈곤이라는 야만 때문에 나무를 베어서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이 그들에게 자살행위와 같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드 소우자 산투스는 이를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독해한다. 지식의 식민주의는 서구 중심적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우주관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사유를 후진적인 것, 야만적인 것, 뒤처진 것으로 규정하고 묵살해왔다. 그래서 산투스는 ‘독립’과 함께 식민주의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산투스는 단일문화를 ‘지식의 생태학’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지식의 생태학’은 수천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들에서 축적되어 온 전통적인 지식과 근대과학의 기관인 대학의 체계적 지식이 수평적으로 공존하고 대화하는 상호문화성을 바탕으로 한다. 지식 생태학에서 무지는 도착점이 될 수는 있지만, 출발점은 아니다.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 각각의 지식은 무지를 만들어내지만 무지는 결격사유가 아니다. 드 소우자 산투스는 근대과학이 소중한 인류의 지적 자산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산투스가 보기에 근대과학은 “강이 영혼을 가진다”와 같은 문장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별자리가 존재할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산투스는 이야기한다.

    대학,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의 2장 「21세기 대학에 대한 토론」은 2007년 3월 27일 볼리비아 국립 종족학 민속 박물관(MUSEF)에서 열린 토론회의 기록이다. 이 자리에서는 대학의 현황과 개혁 방안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이 책의 저자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를 비롯해서 전 고등교육부 차관 구스타보 로드리게스, 라틴아메리카 문학 학자 기예르모 마리아까, 토론회 주최 단위 중 하나인 산안드레스 국립대학교 발전학 대학원 학장 세실리아 살라사르, 볼리비아의 저명한 사회학자 페르난도 마요르가, 모랄레스 집권 초기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아이마라족 원주민 출신 사회학자 펠릭스 빠치, 볼리비아의 좌파 사회학자 호세 미르텐바움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볼리비아의 대학 개혁 논의에는 한국 사회와는 다른 맥락이 있다. 볼리비아에는 공립대학(국립대학, 시립대학 등) 외에 사립대학이 있고, 탈식민적 상호문화성이 강조되면서 원주민 대학도 설립되었으며, 엘리트 중산층 외에 평범한 대중의 교육 요구에 따른 대중대학도 설립되어 있다. 예를 들어, 코차밤바에는 라 플라사 자유 대중대학이 있다. 볼리비아에서 대중대학은 하나의 대안적 사회운동으로 볼 수 있다.

    토론 참석자들의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대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볼리비아의 대학 개혁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고등교육부 차관이었던 로드리게스는 “지식을 전달, 창조, 전파하는 연구” 기관으로서의 대학은 볼리비아 사회에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있지도 않은 것을 개혁”하자고 말하기보다 “대학의 건설”을 고민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국립 가브리엘 레네 모레노 자치 대학 건설에 참여했던 호세 미르텐마움은 대학이 “야만적이거나 야생적인 원주민을 관리할 수 있도록 식민지 주민을 훈련하던 곳”이었음이 분명한데, 대학에서의 탈식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대학의 상업화에 대한 고민도 엿보인다. “컨설팅 업체와 공립대학 사이의 수치스러운 동맹”을 언급하는 마요르가는 “대학원 과정을 1천5백 달러짜리 2년 과정으로 만들어서, 토요일에 종일 수강할 수 있게 하고 논문도 쓸 필요 없이 졸업하면 두 개의 학사학위, 두 개의 석사학위 등 총 네 개의 학위를 주는데, 누가 이런 것과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종잇조각이 된 석박사 학위의 현실을 개탄한다.

    마지막 발표를 맡은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대학 개혁 논의는 모든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 지구적인 과정임을 분명히 한 뒤, 그 위기는 “대학과 대학 서비스를 상품화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보아벤투라는 2007년 당시 미국, 호주, 영국, 네덜란드 등 ‘선진’ 국가의 대학들이 과학기술·사회학·인문학·인류학 등의 학위과정에 특허를 내고 이를 제3세계 대학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대학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사례로 든다. 이런 경향을 역전시킬 대안으로서 산투스는 다시 한번 단일문화를 지식 생태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에보 모랄레스와 2009년 볼리비아 신헌법

    남아메리카 대륙 중부의 내륙국가 볼리비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2000년 볼리비아 대중은 물의 민영화를 저지하는 코차밤바 물 전쟁에서 승리했고, 2003년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를 퇴진시켰다. 이 두 사건이 역사적 분기점이 됨으로써 2005년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의 대선 승리를 견인했다. 2019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우파의 쿠데타로 물러난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대통령이었다. 2019년 집권한 전 대통령 자니네 아녜스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랄레스의 정당 <사회주의운동당>(MAS)의 루이스 아르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009년, 모랄레스의 임기 초에 볼리비아 사회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에는 상호문화성, 탈식민, 좋은 삶(Buen Vivir) 같은 볼리비아 대중의 수백 년간의 투쟁 성과들이 명문화되었다. 2007년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2007년 3월 산안드레스 국립 대학교 발전학 대학원과 <꼬무나 그룹>, <시민들의 유럽을 위한 재단>이 주최한 학술행사 ‘국가와 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 현재의 도전들’에 참여했다.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은 이 학술대회를 위해 볼리비아를 방문한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가 학술대회 심포지엄과 사회운동 단체와의 면담 자리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책에는 드 소우자 산투스의 발표뿐만 아니라 학술대회에 참여한 볼리비아 지식인들의 발표와 청중의 질의응답과 논평들이 수록되어 있다.

    책이 기록하고 있는 2007년 3월~4월이라는 시점은 볼리비아 사회에서 제헌의회 활동을 둘러싼 갈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폭발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수백 년간 볼리비아 사회에서 원주민들이 감내해온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종식할 것을 모랄레스는 공약했었다. 제헌의회는 2006년 8월 6일 볼리비아의 사법 수도 수크레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출범 전부터 이후까지 볼리비아 사회는 갈등 속에 있었다. 특히 인종적으로 백인과 메스티소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의 ‘반달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헌법 반대 세력은 볼리비아 원주민 공동체들에 대한 존중뿐 아니라 선출된 공무원에 대한 소환제도, 가스 산업 같은 경제 부문의 국유화, 자치 강화와 분권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제헌의회 추진 세력에 대한 폭행과 모욕을 서슴지 않았고 사건의 일부는 이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은 이러한 격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산투스는 볼리비아의 원주민 대중과 연대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의 현명함에 대해서 감동을 표현하고, 그들의 투쟁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음을 강조한다. 상호문화성, 탈식민성, 지식의 생태학, 인식론적 살해 같은 개념들을 활용하여 볼리비아 신헌법이 좀더 급진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제시하고, 앞으로 불어닥칠 위험들을 미리 예방하자고 제안한다. 산투스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극소수가 부를 축적하는 동안 대다수는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고통을 겪는 세계라고 본다. 이런 시대에는 지구의 ‘남’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볼리비아 신헌법 제정 타임라인 (출처 : Constitutionnet)

    2005년 12월 :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신헌법 제정이 공약 중 하나였다.
    2006년 1월 22일 :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6년 7월 2일 : 제헌의회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2007년 12월 9일 : 제헌의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이 승인되었다.
    2008년 2월 28일 : 국회가 헌법 초안을 승인하였고 국민투표일이 2008년 5월 4일로 정해졌다.
    2008년 3월 8일 : 중앙선거법원(Corte Nacional Electoral)이 준비 부족을 이유로 국민투표 유예 결정을 내렸다.
    2008년 10월 20일 : 정부와 반대 세력이 협상하여 2009년 국민투표 실시에 합의했다.
    2009년 1월 25일 : 국민투표 결과 64.43퍼센트가 찬성하여 헌법 초안이 통과되었다.
    2009년 2월 7일 : 모랄레스가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복수국민국가는 하나의 국가 안에 복수의 국민 공동체가 있음을 인정한다

    2009년 볼리비아 신헌법은 볼리비아를 ‘Estado plurinacional’(복수국민국가)로 선포했다. 이는 하나의 국가 안에 복수의 국민 공동체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단일 국민을 상정하는 근대국가를 재발명하는 아이디어이다.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가 사용하는 볼리비아의 공식 명칭은 ‘볼리비아다민족국’이다.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은 ‘다국민국가’라는 번역어도 사용한다. 이 책에서 ‘복수국민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는 첫째, ‘plurinacional’은 하나의 국가 안에 다양한 문화, 전통, 우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수의 ‘국민’ 공동체가 있음을 인정하는 국가 모델이기 때문이다. 둘째, ‘다국민’ 대신 ‘복수국민’으로 한 것은 ‘복수국민국가’ 이념이 하나의 것을 중심 또는 상위에 놓고 다른 것을 관용한다는 위계 서열적 뉘앙스를 가진 ‘다문화주의’를 극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헌법에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nal)를 명시하고 있는 나라는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두 곳이다. 에콰도르는 2008년 헌법에 명문화했다. 복수국민국가는 원주민 문화에 뿌리를 둔 ‘공동적인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이를 ‘좋은 삶’(Buen Vivir)으로 호명하고, 서구 근대문화에서 기원하는 ‘개인주의적인 것’과 원주민 문화에서 유래된 ‘공동적인 것’이 위계 서열 없이 수평적으로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토피아적 선언이다. “토지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재산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원주민의 생각, “나무는 우리의 부모이므로 벨 수 없다”고 말하는 원주민의 포스트휴먼 세계관을 구체적인 제도와 자치의 강화를 통해서 존중할 방법을 찾는 것이 복수국민국가이다.

    볼리비아 대중의 제헌권력으로부터 배운다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2010년의 한 인터뷰에서 남아메리카에서는 자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제국』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 반해서 제헌권력에 관한 그의 책은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말했다(e-flux 인터뷰). 이 책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을 읽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서구화된 그리고 소위 발전된 사회들이 양당 체제에 신음하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동안, 볼리비아 대중은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다양한 세계관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철학을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이 책은 저자 드 소우자 산투스의 발표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의 지식인들, 사회운동가들, 거리의 투사들의 논평과 질문들을 가감 없이 수록하고 있으며, 그래서 볼리비아 대중의 역동성과 변혁 열망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볼리비아 사회는 현재 여러 어려움 속에 있지만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사회운동이 식민 지배와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차별과 억압을 뚫고 복수국민국가라는 헌법 규정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한 성과로 보인다. 어떤 사회에도 다양성은 존재한다.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기도 한다. 볼리비아 사회는 강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사람과 그런 생각을 야만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산투스는 특히 지금까지 야만으로 치부되어 ‘인식론적 살해’를 당해온 그러한 생각들에 인류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자주 차이가 혐오의 근거가 되고, 거듭되는 팬데믹과 함께 생활환경은 나날이 재난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선출된 대의권력이 대중의 안녕과 배치되는 언행을 하더라도 제어할 수단이 거의 없다. 우리가 볼리비아 대중의 제헌권력으로부터 배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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