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⑥ 잘 살아보세~~
        2012년 08월 28일 12: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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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동작구에는 사당동에 ‘새마을식당’이 있다. 옛날 유리문 인테리어에 고기는 열탄에 구워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식당은 새마을노래, 잘 살아보세, 국민체조 음악 등을 틀어주며 70년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아버지께서는 라디오든 동네 스피커에서든 “잘 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저 노래는 왜 저렇게 축축 늘어져?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이라며 불만어린 투로 한마디 던지곤 하셨다.

    내가 새마을운동을 떠올릴 때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보다 ‘잘 살아보세’를 더 쉽게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인 듯하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애향단’에 ‘조직되어’ 새마을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억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집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70년에 같은 동네에서 이사를 했다.

    윗동네에 살다가 평야 쪽 입구인 아랫동네의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인데, 여기에서 ‘마을길 넓히기’와 ‘지붕개량 사업’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은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집 옆으로 버스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이 있고 아스팔트도 깔려 있지만, 우리가 처음 이사왔을 때는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소들평야'(지리 시간에 배우는 예당평야의 한 부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길 밖에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마을 총회에서 이곳에 경운기도 다닐 수 있는 큰 길을 내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처음에는 8톤 트럭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 도로를 내자고 했지만, 막상 재정 문제로 경운기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도로를 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내 기억에 남게 된 것은 이 문제로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왜 우리 마당이 길로 들어가야 하느냐”며 마을 총회와 아버지를 비난했다. “옆집이 좀 양보해서 밭을 내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길을 넓히는 것에는 찬성하면서도 막상 자기 논이나 밭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 마당 일부는 도로로 편입되고 말았다.

    지붕 개량사업에 관해 지시하고 있는 박정희

    그 때는 그렇게 넘어갔는데, 이 길은 80년대에 이르러 버스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시멘트 도로로 한 번 더 넓혀지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길을 지나는 짐트럭 등이 마당 쪽 처마와 충돌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면서 우리집 처마는 보기 흉한 모습을 한동안 하고 있어야했다.

    우리집은 74년도에 지붕 개량사업을 통해 초가 지붕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탈바꿈했다. 기와 지붕이었던 아래집은 그대로 두고 초가 지붕이었던 윗 집만 바꾼 것이다.

    당시 지붕 개량사업은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사업이었다. 해야 할 일을 제 때 하지 않는다고 엄마로부터 자주 ‘지청구’를 듣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초가 지붕에 이엉 올리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집은 제법 산뜻해졌다. 물론 그때는 그 슬레이트가 인체에 그렇게 해롭다는 석면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최근에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지붕 개량사업에서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도로 확장사업에도 정부의 지원은 기껏 시멘트 몇 포대와 ‘노깡’(시멘트 관)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마을 기금이나 동네 사람들의 부역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일부 동네에서는 도로에 편입되는 땅값조차 지불하지 않는 일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나마 마을 기금으로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당시 정부의 예산 배정 규모나 방식이 근면 자조 자립 협동을 강조한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생각해볼 때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새마을 운동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추구하던 유신정권이 농촌에 재정을 투자할 여유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이를 “나태와 타성에서 벗어나 근면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으로 무장하면 당신들(농민)도 잘 살 수 있다”고 호도하면서 농민들의 호주머니와 노력동원에 의존하여 겉모습이라도 바꾸는데 치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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