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적 시장주의자들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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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1일 10: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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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도중에 대통령이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합니다”라고 일갈했다. 경어체의 편지글 형식이므로 나도 예를 갖추어야 마땅할 터이다)

(1) ‘하얀 거탑’

학자들을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드라마 작가에 비유하면서 글을 시작하셨으니 저도 드라마 이야기부터 하려합니다. ‘하얀 거탑’이라는 주말 연속극이 있습니다.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해서 외과과장이 된 한 실력 있는 의사가 실수를 해서 한 환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세계외과학회 회장 부인의 수술에 온 정신이 다 팔렸기 때문이죠.

고인의 부인은 민변 소속쯤 되는 ‘운동권’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법정 드라마가 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과장의 권한은 가히 무소불위입니다.

전문의, 전공의 모두의 말맞추기가 시도되고 뻔한 사실이 왜곡되는 현실 앞에서 환자 가족과 한 양심적 의사가 법정에서 흥분을 합니다. 판사를 하셨으니 잘 아실 테지만 결국 진실이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저는 대통령이 말하는 ‘진보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미 FTA 추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한 얘기지만 대통령의 육성으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5월 14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현안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워싱턴=청와대 사진기자단.
 

먼저 한미 FTA의 추진 시점. 청와대와 정부 모두가 말을 맞춰서 2003년 8월, 이른바 FTA 로드맵을 만들 때부터 한미 FTA를 구체적으로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2005년 8월에 첫 보고를 받았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무려 2년의 시차가 납니다. 2005년 2월에서 5월까지 저는 FTA 정책도 업무 일부로 하는 국민경제비서관이었습니다.

이 일을 처음 맡기시던 2월 1일 새벽에 특별히 저에게 지시한 것은 한일 FTA의 재개 여부를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비밀리에 추진 중이어서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건가요? 통상교섭본부나 경제보좌관실은 제가 한미 FTA를 알 수 있는 라인이 아니라서 몰랐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된 바와 같이 통상교섭본부는 그 때 이미 ‘FTA를 전제로 하지 않은 실무협상’이라는 이름으로 한미 FTA 추진의 전제조건을 미국 측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협상 결과가 바로 ‘4대 선결 요건’입니다.

정부는 이것이 단지 통상현안이어서 FTA 추진 전에 해결하려 했을 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미리 들어주고 협상에 임하는 바보 같은 선수가 있다면 당연히 교체 대상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땅 속에 묻어 버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 방송사에서 대외경제위원회 문건을 공개하고 나서야 이른바 ‘4대 선결 요건’의 실체를 인정했습니다. 무엇을 위한 선결인가요? 미국과 FTA를 추진하기 위해서 미리 해결해야 할 네 가지 과제, 즉 스크린 쿼터, 쇠고기 수입, 약값 결정,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나요?

최근 정부는 한미 FTA의 연구가 충분히 있었다면서 상당히 긴 목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정말 정식으로 정부와 계약을 맺은 용역으로 보고를 받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일이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뉴스레터 같은 간략한 보고도 모두 포함시켰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사실들에 비춰 보면 2005년 11월까지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한미 FTA가 실제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과 FTA를 할 때 당연히 하는 절차인 민간연구기관 간 공동 연구, 산관학 공동 연구도 생략됐습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KIET)의 협동 연구는 2005년 12월에 발주됐습니다.

한미 FTA와 같은 어마어마한 정책이 2003년 하반기부터 착실히 준비됐다는데 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 연구기관이 FTA 개시를 목전에 두고서야 연구를 시작했을까요? 정부 주장이 사실이라면 세 원장 모두 사표를 받는 것이 정상적 인사일 겁니다.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께서는 지난 작년 8월에 이르러서야 TF를 만들어 투자자-국가 소송제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3년이나 검토를 하고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미처 몰랐다는 건가요?

또한 이 TF에 참여한 민간위원이 위헌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법무부와 건교부, 심지어 재경부마저도 이 조항의 삭제, 또는 축소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보고 받으셨나요?

이미 여러 번 얘기한 것이라서 졸속성 문제는 이만 하겠습니다. 성급히 추진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낫지, 하얀거탑의 의사들처럼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강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전략일까요?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진실은 아마 내주쯤이면 밝혀질 겁니다. 한미 FTA도 그리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의일 테니까요.

(2) 이익의 균형은 맞추셨나요?

청와대와 정부는 결과도 보지 않고 아직 진행 중인 협상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3년간 결과를 공개하지 않을 테니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만, 수백페이지가 넘을 협상 결과를 과연 국회의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제대로 비준 동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으니 걱정 말라고 국민들에게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수위 회의실 정면에 걸렸던 현수막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국민들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정부가 목표로 했던 미국의 비관세 장벽 중 무너뜨린 것이 있습니까? 수출기업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미국의 자의적인 덤핑 판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느냐입니다. 바로 무역구제분야의 문제인데 이 부문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제로잉, 관세 부과 후 자의적인 재개, 관세의 해당 기업 배분 등 몰상식한 조항은 다 빼고 미국의 법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 사항만 요구했는데도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데 사실입니까? 섬유부문 수출의 가장 큰 걸림돌인 얀포워드(원사기준) 원산지 기준은 바꿀 수 있다고 하던가요? 연안해운업은 인정받으셨나요? 전문 자격증의 상호인증은 어떻게 됐나요?

반대로 우리가 얻어내야겠다고 한 것 중 이뤄진 것이 있나요?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 원산지 인정은 미국이 받아 들였나요? 농업의 세이프가드는 어떻게 되었나요? 미국은 주정부로 구성된 연방국가인데 이번 FTA에서 주 정부의 비합치 조치까지 바꿀 수 있다고 협상단이 보고했습니까?

반대로 주 정부 법률이 포괄적으로 유보된다면 실제로는 개별 주 정부를 상대로 무역과 투자를 하는 우리 기업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FTA의 이익을 볼 수 있을까요? 최혜국 대우를 미래의 FTA에만 적용하자는 미국의 요구(가령 한일 FTA에 미국보다 더 유리한 조항이 들어간다면 자동적으로 미국에도 적용하는 겁니다)는 단호히 물리치셨나요?

지적 재산권을 사실상 3년 이상 연장하고 우리 전문가 그룹의 능력을 의심하는 재심위원회를 도입하기로 한 의약품 분야 보고는 어떻게 받으셨는지요? 이익의 균형을 이뤘다고 하던가요? 도대체 우리의 숙원 중 관철한 것은 무엇이고 미국의 요구 중 수용하지 않은 것이 뭐가 있나요? 기어코 광우병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뼈있는 쇠고기도 수입할 작정이신가요?

한미 FTA를 하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고 대통령은 묻습니다만, 한미 FTA가 없었다면 위에서 나열한 불리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왜 이런 FTA를 해야 하는 걸까요?

선진경제가 되기 위해서 외부쇼크에 의한 내부개혁, 즉 산업구조조정을 답으로 준비하셨을 겁니다. 나프타를 맺은 지 12년 된, 멕시코나 캐나다에서 과연 대통령이 그리는 환상적인 그림, 서비스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났을까요?

이런 어마어마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예상 시나리오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지난 1년 동안 각 연구원에서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만들었을 텐데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게 이러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산업이 재편될 것이고 여러분은 이런 변화에 이렇게 대응하면 된다, 정부는 이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닐까요?

‘스스로 대통령인’ 국민은 미래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습니다. 분명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변화가 밀어 닥칠 텐데 우리는 그냥 “국민을 믿는다”는 대통령 말을 다시 믿어서 잘 될 거라며 베개를 높여 잠만 자면 되는 건가요?

사실상 완패한 협상단은 이렇게 보고할 겁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했고, 미국의 관세 인하 만으로도 얻을 것을 충분히 얻었다고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수많은 내용을 대통령이 세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제발 반대 쪽 전문가들의 평가에도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3) 모든 개방이 성공했다니요?

할 얘기는 쌓이고 쌓여 있지만 새해 첫날 날아온 대통령 편지에 관해 몇 마디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족경제론을 잘못된 ‘사상과 논리체계’로 꼽았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민족경제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고 박현채 선생의 제자입니다.

대통령께서 언급한 『민족경제론』은 78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무려 3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30년 전의 주장, 그것도 그 때 그 때의 현실을 ‘온 몸으로’ 분석한 평론을 현재에 비추어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70년대까지의 이론이 소련 쪽의 전반적 위기론에 고유한 파국론을 짙게 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파국론을 교조적으로 받아 들여 현재의 경제 분석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 진보진영이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까? 대통령 말씀대로 사실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따져 볼 문제입니다. 진보진영을 쇄국으로 몰아가는 낡은 수법에 이미 대통령도 깊이 물든 모양입니다. 제가 비서관으로 있을 때 모든 개방에 반대했었나요?

우리경제가 모든 개방을 성공으로 기록했다는 건 또 무슨 근거입니까? 성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모르겠지만 직전의 과거에 비추어 가장 전면적인 개방이었던 근세의 개방은 한일합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건 망하지 않은 건가요? 물론 일제시대 망국 36년의 경제성장률이 그 이전의 경제성장률보다 높을 겁니다. 그러면 성공한 건가요?

제 생각에 개방의 속도로 봐서 그 다음 획기적인 개방은 1994년 김영삼 정부의 자본시장 개방입니다. 그 결과는 잘 아시다시피 외환위기였는데 이건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닌가요? 그 이후에 결국 극복했으니 재경부 주장대로 ‘보약’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와중에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어가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나라를 망하게 했던, 이 두 개방의 공통점은 자의든, 타의든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전면적인 개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를 떠올리시겠지만 이 시대에 관해 가장 널리 인용되는 ‘동아시아의 기적’(세계은행)은 발전국가형 정책의 특징을 “선별적 개방과 산업정책의 조합”으로 설명합니다.

한미 FTA는 적절한 산업정책도 준비하지 않은 채 역진불가능한 전면적 개방을 하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개방이 아니라 이미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미국 초국적기업의 이해를 위해 우리의 법과 제도를 바꾸는 개방입니다.

예컨대 왜 절대적으로 우리 국민과 기업에 불리한 쪽으로 저작권법 개정을 하고 약품 특허 관련 제도를 바꿉니까? FTA 반대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실은 인정합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민족경제론은 세계화나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저는 세계화가 대세이지만 지역주의의 형태로 관철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글을 썼습니다. 말씀 그대로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하는 방향으로 가는 시대의 대세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거역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중국의 지도자들도 미국과의 FTA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명제와 아주 구체적인 정책 사이에 있는 만리장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테지만 그렇다고 진보진영의 어느 누구도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개방을 거부하자”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제가 한일 FTA를 거부하자고 했나요? 진보진영이 대대적인 한일 FTA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까? 산업구조의 유사성이나 서비스업 및 농업의 발전 격차에 비추어 볼 때 그 충격이 크지 않고, 고유의 역사 때문에 협상력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던 겁니다.

한일 FTA에 관한 지시를 했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산업발전방향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협상을 할 나라도 선택하고 협력 수준이나 내용도 결정해야 하는 겁니다.

‘외부쇼크에 의한 내부개혁’이란 지극히 무책임한 발상입니다. 그저 흔들어 놓으면 똑똑한 국민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이런 발상이 어떠한 혼란을 가져 왔는지 동구권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목도한 바 있습니다.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외환위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티글리츠 교수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겁니다. 왜 훨씬 우수한 성적을 거둬 왔고 스웨덴형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한 한국이, 미국과의 FTA를 통해 훨씬 효율성이 낮은 경제체제로 전환하려고 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설마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사람을 개방 반대론자, 심지어 청와대 참모들처럼 쇄국론자로 몰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런 우려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선자 시절 스티글리츠교수를 만난 대통령께서 해외경제자문단장을 제의했고 교수도 흔쾌히 승낙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아마타 센 교수나 하버드의 프랜스만 교수, 심지어 헤지펀드로 ‘악명 높은’ 소로스(스티글리츠교수는 이 사람의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하더군요)까지 포함된 10여명의 해외경제자문단 명단을 제시하고 스스로 교섭까지 하겠다, 적극적으로 나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시다시피 현실에서 우리는 이 세계적인 인사들을 해외경제자문단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지만 조윤제 당시 경제보좌관 등 참모들이 월 스트리트가 스티글리츠의 성향을 문제 삼을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렸습니다.

우리가 월스트리트에 무슨 큰 빚이라도 있나요? 설마 월 스트리트가 소로스를 기피할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부터 일은 어긋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뜬금없이 이 오래 된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그만큼 대통령 주위의 시각이 편협하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새해 벽두의 편지를 보면 대통령 역시 좁디좁은 골짜기에 이미 깊숙이 빠져 버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통령께 진정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교조적 좌파’가 아니라 ‘교조적 시장주의자’입니다.

(4) ‘유연한 진보’를 위하여

대통령 분류에 따르면 교조적 좌파에 속할 박현채 선생은 모름지기 경제학이란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민의 삶의 질이라고 표현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진보의 기준입니다.

위원회를 비롯해서 참여정부가 진보적인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무진 애쓴 사실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단기적인 성장정책의 유혹을 가능한 뿌리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으로 대표되듯이 처음의 아이디어는 청와대와 재경부 및 건교부,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거쳐 국회에 이르기까지 이리 찢기고 저리 터져서, 결국 시장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냈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통령께서 원가공개에 관해 말을 바꾼 것도 결국 이 과정에서 흔들렸기 때문이죠. 잘 아실 테지만 내외의 비토 세력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한 고비 넘으면 이들끼리 연락해서 다음 고비에 또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밖에서도 사상 공세를 하는 식입니다.

새롭게 시행하는 정책, 또 부동산문제처럼 급박하게 다가오지 않은 정책은 더욱 힘든 경로를 거쳐야 했습니다. 예컨대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와 같은 정책은 하위 계층의 소득실태 파악이라는 정책 인프라부터 갖춰야 했고 지역 내 투자 정책은 금융의 원리를 거스른다 하여 간단하게 무시됐습니다. 둘 다 미국에서 널리 시행되는 정책인데도 그렇습니다. 남북 철도 연결과 대륙간 철도 연결은 북한 철도의 실태를 모르고 따라서 예산을 세울 수 없다 하여 흐지부지 됐습니다.

결국 재경부 등 정부 부처가 내 놓는 성장정책이 조중동과 재벌들도 원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으니 질적, 양적으로 이른바 ‘진보적 정책’은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양극화 정책을 체계화했던 ‘동반성장의 길’이 처했던 운명은 말씀드렸습니다.

바깥의 보수 언론만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 더 ‘교조적인 시장론자’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청와대만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작년 초에 대통령께서는 한미 FTA와 양극화 해소가 앞으로 전념할 두 정책기조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 국정브리핑부터 되살펴 보십시오.

초기에는 양 쪽의 글이 균형 있게 올라왔지만(물론 한 쪽에서는 미국형 시스템을 찬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형 시스템을 비판하는 식으로 서로 모순적인 글이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5월이 지나면서 양극화 쪽 기사는 사라졌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지금 강조하고 계신 사회투자국가(공급사이드 복지국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부분 정책이 세워지고 또 시행된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최근 서울시에서 차상위 계층의 개인구좌를 지원하기로 한 정책도 여기에 속하는 정책입니다. 다만 정책인프라, 전달체계 등이 정비되어야 하니 앞으로 이 정책이 자리를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더 더욱 한미 FTA는 최소한 ‘일단 중지’되어야 합니다. 개방은 곧 산업구조조정인데 현재는 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회투자국가란 결국 세계화 및 고령화라는 변화에 맞서서 개인과 공동체가 이 충격에 부드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아동의 교육 기회 확대, 직업훈련 및 재교육 확대 등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들 정책만이라도 자리를 잡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하면 3년 정도 걸릴 겁니다. 이렇게 사회의 적응 능력이 향상된 뒤에 다시 시도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쟁 상대 어느 나라가 미국과 FTA를 맺었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치 맞불을 놓듯이 시작한 EU와의 FTA, 중국과의 산관학 공동 연구도 최대한 천천히 진행시켜야 합니다. 민간 연구기관 간 연구를 거친 중국과의 FTA는 조금 낫지만 EU와의 FTA 역시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동시 다발적 FTA는 동시다발적 산업구조조정을 의미합니다. 어느 나라와 경쟁해도 이길 수 있는 부문만 남게 되는데 극단적으로 말해서 도대체 반도체산업 하나 가지고 4천만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많은 FTA를 한꺼번에 맺어서 결국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멕시코도 이렇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에서 다소 과장된 비유를 했지만 한미 FTA를 하지 않으면 호미로 양극화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덜컥 체결을 해 버리면 이제 가래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미 FTA라는 국제협정은, 공공성을 파괴할 정책(예컨대 의료민영화와 건강보험 강제지정제의 폐지, 공교육의 약화, 철도 등 공기업 민영화)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정부 내 시장만능론자들의 입지를 대폭 확장시킬 겁니다.

이 부분도 점검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미 시작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됐지만 잠긴 비용이 아까워 계속 나가는 건 단지 비용을 증폭시킬 뿐이라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이 등 돌린 것에 상심하지 마시고 왜 등을 돌렸는지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탄핵에서 대통령을 극적으로 구출해 냈던 국민 거의 모두, 과거의 지지자 대부분이 반대하는 그런 정책(대선 때의 대통령 지지율과 현재 한미 FTA 반대 비율은 거의 비슷합니다)을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면서 이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하는 건 과욕이 아닐까요?

제가 전국을 다니면서 200회가 넘게 한 강연 대부분에서 받았던 질문이 있습니다. 또 한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FTA를 도대체 왜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경제학자인 제가 모르는데 어찌 일반 국민들이 그 심오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대한민국에 진보진영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 FTA로 이익을 볼 것으로 예측되는 상위 20% 가량만 사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면 그것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꼭 바람직한 정책이라면 내외부의 공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국민들의 힘으로 밀고 나갔어야 합니다.

예컨대 양극화 극복을 증세 정책이 그렇습니다. 보유세는 더 빨리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최근 또 계획을 늦췄더군요). 국민의 정부가 온갖 논란 속에서 타협을 하면서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의약분업의 기본 틀을 갖췄듯이 참여정부는 ‘사회투자국가’ 또는 ‘공급사이드 복지정책’의 틀이라도 제자리에 놓으면 그만입니다.

당장 FTA를 멈추고 양극화 극복 정책에 전념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국민의 합의를 끌어내서 공동체적 협력을 바탕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활로입니다.

대한민국이 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당신이 결단을 내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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