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변경,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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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17일 08: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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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문단의 양대 조직으로 작가회의와 한국문인협회(이하 문협)를 꼽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사장을 선출할 때는 상당히 시끄럽지만, 과연 문협의 문학적 실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문협을 일러 “양로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선거때만 시끄러운 문협, 문학적 실체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협은 작가회의의 반대편에 자리매김 된다. 그리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문협이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예컨대 문학 지원금을 어느 쪽에서 많이 가져가는가를 산술적으로만 따져 추궁하는 것이다. 내용이라든가 질의 문제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오직 공모하고 채택된 데 따른 비율만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이런 형식적인 구도가 깨져야 된다고 본다. 물론 지역의 경우 구체적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다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지회나 지부에서는 자신들의 상황에 입각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전체 판세를 보았을 때 문협은 더 이상 작가회의의 맞상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작가회의를 문협과 비교해서 이야기하면 “비교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구도를 어떻게 깰 것인가. 명칭을 바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본다. 형식적인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립을 해소한다고 해도 문제될 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협은 문학적 실체가 없는 까닭에 작가회의는 그냥 가던 길을 그대로 가면 될 테니 말이다.

    민족문학의 미학적 기준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명칭의 변경을 전술적으로 생각하는 편에 속하겠다. 부언하자면, 작가회의의 반대편에 문협을 설정하고 거기서 민족문학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고는 이미 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문제를 구성하는 틀을 바꿔야만 현실 대응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문제를 구성하는 틀은 현실 속에서 마련해 나가야 한다. 지금 민족문학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나는 먼저 문학의 미학적 기준이 사라져 버렸다는 데서 찾는다.

    문학계 내부로 이식된 자본의 논리가 산업의 면모를 갖출 정도로 팽창한 까닭에 문학적 자의식이 없는 ‘그저 재미만 있는’ 작품들이 호평을 받는 실정이다. 그런 작품들을 보며 예비문학도들은 습작을 거듭한다. 그리고 등단한다. 악순환이라고 하겠다.

    민족문학연구소는 열린 장을 통해 미학적 기준의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해 왔다. 민족문학연구소의 관점에 따라 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소설 흐름을 정리해나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성과는 조만간 <생각의나무>에서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진행할 때 완고한 민족문학의 기준을 적용하여 작품을 선정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90년대, 2000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해서는 곤란한 탓이다.

       
      ▲ ‘민족문학’이란 깃발을 내려놓을 것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찬반 토론이 벌어진 민족문학작가회의 정기총회
     

    ‘미래파’ 문학도 민족문학에 끌어안을 수 있어

    “너희의 길과 우리의 길은 다르다!”고 선언하는 것이 우직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우직함으로 문학계의 현실을 가리고자 하는 태도는 다소 무모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선명성을 움켜쥐고자 현실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행태를 무책임하다고 판단한다. 실제 전개되는 문학 현실이 눈 감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 어떻게든 대면하고 맞닥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작품을 느슨한 형태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나는 요새 논란이 되고 있는 ‘미래파’까지도 몇몇 작가들을 선별하여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90년대 김영하가 보여준 냉소 뒤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전망이 없는 현실에 맞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추(醜)의 미학, 잔혹의 미학을 선택한 것으로 판단되기에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충분히 점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추의 미학을 통해, 잔혹의 미학을 통해 새로운 길이 마련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무너진 희망과 규범 사이를 모험하면서 그들이 ‘텅 빈 중심’의 의미를 깨닫고 ‘심오(深奧)’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바는 있다.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대화하자는 것이지, 쌍수 들고 일단 환영하고 나서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으로 민족문학을 주창한다면 명칭 개정에 대해 “미래파를 데려오겠다는 말이냐?”고 먼저 발끈하고 나서면 곤란하다. 문학계에 쟁점으로 대두되었으면 개입하여 자신의 관점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운동 아닌가.

    민족문학 가치를 압도한 출판사의 영향력

    물론 굳이 명칭을 개정해야 그런 논의가 가능하냐는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물음이 쏟아진다면 나는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출판사의 영향력이 민족문학의 가치를 압도해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평론가들은 출판사의 구도에 묶여 현재의 지형 속에서 격의 없는 논의를 펼치기가 어렵다.

    이 틀 또한 깨서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아쉬운 쪽은 출판자본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글쎄,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한 방편이 아닐까.

    저번 글에 밝혔듯이, 나는 명칭 개정에 대하여 소극적 지지의 입장이다. 그래서 저렇게까지 상처를 내며 싸울 필요가 있는가, 요즘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김형수 사무총장을 위시한 몇몇 작가들에게 쏟아지는 악의에 찬 비방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오해는 풀어버리자. 집행부가 젊은 작가들을 언급하는 것은, 젊은 문학의 흐름을 어떻게든 민족문학의 틀 안에서 끌어안고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이다.

    지금의 틀로 가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자본의 논리에 문학이 잠식당한 것처럼, 문학의 주류 흐름에서 민족문학이 배제되어온 것처럼 문단 질서가 굳건히 이어지리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 간 작가회의가 축적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판 바꾸기를 모색해 보자고 시도하는 것이다. 설마 후배들의 눈치를 보느라 민족문학을 저버리자고 집행부가 주장하고 나서겠는가.

    집행부가 내세운 몇 가지 명칭 변경의 이유가 있지만, 평회원인 나는 그냥 내 생각만을 적는다. 이런 생각으로 해서 나는 명칭 개정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면 논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시도가 모험주의로 경사하는 것은 아닌지, 집행부의 고민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 등. 나는 이런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한다면 이번 논란은 악수(惡手)를 거듭하다가 반목과 상처만 남기고 끝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색안경을 벗고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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