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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걷이가 시작됐지만
    [낭만파농부] ‘풍년의 역설’ 아니다
        2022년 11월 01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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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걷이가 시작됐다. 중부지방은 진즉에 끝이 났고, 이 고장에서도 끄트머리 순번을 탔으니 많이 늦은 셈이다. 콤바인 작업을 강 건너 장 선생에게 맡기는데, 이 양반 내가 까다롭게 굴지 않으니 번번이 우리 차례를 하염없이 뒤로 미룬다. 아무래도 한마디 해야겠단 마음을 다지고 있다.

    벼두레 협동작업 그리고 가을걷이

    어쨌거나 첫날 거둬들인 나락을 어림셈으로 따져보니 소출은 꽤 괜찮은 편이다. 평년작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연 이태 대흉작을 맞았던 뒤끝이라 훨씬 커 보이는 것이겠지. 평년작을 웃돈다지만 나라 전체로는 필요한 식량에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다. 그런데 개방경제 체제에 따른 이런저런 국제협정으로 해마다 쌀 40만 톤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처지다 보니 쌀은 ‘상시 과잉생산’이란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얼마 동안은 ‘착시현상’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이제는 그냥 ‘현실’이 돼버렸다. 하여 ‘다수확 품종’을 짓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논배미에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거나 휴경을 권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기후위기에 따른 심각한 기상이변이 터져 세계적으로 곡물이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쩔 셈인가. ‘식량주권’은 안중에도 없는 셈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올해도 과잉생산이다. ‘시장격리’가 늦어진 여파로 쌀값은 사상 최고의 낙폭을 기록하며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풍년의 역설’이라고, 풍작으로 농산물이 똥값이 되니 되레 반갑지가 않은 것이다. 풍작이면 이렇듯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흉작이면 ‘밥상물가 안정’을 핑계로 비호처럼 해외농산물을 수입한다. 농작물이 생활물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은 데도 말이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가가 그나마 수입을 올리자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얘긴인즉슨 일단 우리 농사는 풍작이어야 한다. 아울러 다른 농가,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흉작이어야 한다는 거다. 농민을 사악한 이기주의로 내모는 씁쓸한 현실이다.

    그러나 풍년의 역설이 결코 아니다. 결국 농업정책의 문제다. 국회에서 쌀값 폭락과 관련해 양곡관리법 개정방향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모양이다. 정치권과 농정당국에 의지가 있다면 어쭙잖은 시장논리 들이댈 게 아니다. 적정한 쌀값을 정하고 그 수준의 소득을 보장(변동직불금 재도입)하면 될 일이다.

    사실 이런 얘기 골백번 해봤자 다 쓰잘머리 없는 일이고 그저 입만 아프다는 거 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내 코가 석 자다. 안 그래도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판국에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늘었으니 그거 어찌 치워야 하나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픈긴 해도 풍작을 반기지 않을 농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사실 되돌아보면 지난 반년이 아득해온다. 연 이태 흉작에 시달린 이 고장 농부들은 새로운 벼 품종을 원했다. 그 동안 많이 지어온 <신동진>이 밥맛은 좋지만 병충해에 약해 흉작의 원흉으로 지목돼온 터다. 육종 기관에서도 오랜 연구와 시험재배를 통해 신동진을 업그레이드 한 <참동진> 품종을 개발해 지난해부터 보급에 나섰다. 신동진의 특성을 대부분 함유하면서 병충에 강하고 밥맛은 더욱 향상됐다는 평이다.

    이미 다뤘던 대로 처음으로 참동진 품종을 지으면서 우리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볍씨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발아에 실패하는 바람에 못자리 작업을 두 번씩 되풀이해야 했다. 그 과정을 주도하고 벼농사두레의 협동작업을 이끌었던 나로서는 맥이 탁 풀리고 얼굴을 들기가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두레 ‘도반’들은 힘들거나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되레 나를 위로하고 더 많은 일손을 보탰다.

    국립식량과학원 자료

    그런 가운이 하늘에 닿았는지 날씨는 내내 순조롭게 농사를 도왔다. 적당히 비가 내렸고, 지난 이태 우리를 괴롭혔던 장마의 횡포도 없었고, 태풍도 얌전하게 지나갔다. 작황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대화방에는 가을걷이를 마친 회원들의 보고가 잇따라 올라온다. 예외 없이 지난해보다 수량이 늘었다는 얘기다.

    만감이 교차한다. 나로서는 얼마 전부터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로 쪼들리는 일이 생기고, 심리적인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그야말로 절절매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게다가 표정 관리에 능하지 못한 탓에 밝지 못한 얼굴빛을 여러 사람한테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벼두레가 있으니.

    가을걷이가 시작된 날 전국의 직거래 소비자들에게 통문을 돌렸다. “거둬들인 나락 말리고 방아 찧어 보내드릴 테니 필요한 쌀 주문하시라.” 아, 벼두레 사람들과 함께 상다리 휘어지게 ‘햅쌀밥 잔치’를 열어 기쁨의 술잔도 나눠야지.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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