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주보'에서 만난 역사 이야기
    [컬렉터의 서재] 금수현과 그의 시대, 그의 열정
        2022년 08월 22일 11: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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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의 즐거움 중 하나는 이를 통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전체적인 역사상은 대략 알고 있다. 그런데 수집한 자료 속에서 가끔 낯선 역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무척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 나에게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 낯선 설렘으로 내가 모르던 새로운 역사를 재구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내가 알던 역사를 보완하기도, 때로는 기존의 역사를 폐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 수집 자료 중에 ‘애간장 타는 한여름의 가뭄’이라는 제목의 한글 가사가 있다. 이 가사 제일 끝에는 ‘병자년 4월 5일’이라는 작성 시기가 쓰여 있었다. 나는 가뭄이 심하게 들었던 병자년이 언제인지 여러 자료를 통해 찾아봤다. 그 결과 병자수호조약 흔히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 병자년에 무척 가뭄이 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해 ‘기우제’에 대한 기사만 40여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1876년은 강화도조약 하나로 규정되어 있지만, 당대 민중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은 대가뭄이었을 것이다. 이 병자년 가뭄에서 파생된 속담들도 여럿 있을 정도니 그 정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단비를 기원하는 이 한글 가사를 수집하기 전까지 나는 1876년의 대가뭄을 알지 못했다. 역사는 단면이 아니라 입체며, 앞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측면과 뒷면이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나의 책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귀향명령 증명서’도 그렇다. 이 증명서는 1946년 8월 호열자(콜레라)로 인해 무안공립농잠학교가 장상기 학생에게 발급한 것이다. 나에게 1946년과 47년은 무척 익숙한 연도이다. 왜냐하면 내 학사 졸업 논문 주제가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이었는데, 이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된 시기가 1946년과 47년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나는 이 문서를 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1946년경 호열자가 창궐하여 당대 민중들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를. 이 귀향명령서를 통해 나는 정치사가 미처 담지 못한 역사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 자료들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그러므로 역사 자료는 나의 역사 선생님이다. 내 역사 지식의 절반은 그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만나기 전에는 역사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자료들은 역사를 만나는 새로운 길을 펼쳐주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늘 새로운 사실들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놀라고 즐거워한다. 내가 수집이라는 취미를 버리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마술 카펫을 타고 하늘을 나는 알라딘처럼, 나는 역사 자료 한 점에 올라타 자료가 안내하는 미지의 시대로 가서는 그 시대 사람들을 만나고, 독특한 그 시대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곤 하는 것이다. 이런 멋진 여행이 어디 있단 말인가?

    두 달 전 우연히 수집한 어떤 수집품도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일깨워주었다. 나는 이 수집품을 통해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다.

    [음악주보]어느 학교 응원가집

    2022년 6월 하순 온라인 경매에 1947년 부산에서 발행된 [음악주보]란 B5 크기의 프린트물이 나왔었다. 내가 이 자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른쪽에 실린 ‘어느 학교 응원가집’이란 악보 때문이었다. 나는 해방 직후 학교 운동회에서 홍군이 어떻게 청군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홍백전, 즉 홍군과 백군으로 편을 나누어 경쟁했는데, 해방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치면서 붉은 색이 빨갱이를 상징하는 색으로 불온시되면서 어느 순간 퇴출되고 청백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 [지상의 작은 숟가락 하나]에 실린 글을 다시 인용한다.

    가을 운동회 때의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뀐 것도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전교생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하고 외치던 응원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내 이마에 둘렀던 붉은 머리띠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그 홍띠가 금기가 되고 말았다. 홍백 두 겹의 머리띠였는데, 어머니가 거기에서 붉은 쪽을 뜯어내고 대신에 잉크물 들인 청색 천으로 갈아주었다. 홍백은 단순한 색상 대비의 의미를 떠나 엄혹한 이분법의 정책색을 뜻하게 되었으니, 홍은 불온한 색깔이었다.

    1941년생이었던 그가 제주도 북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8년이었다. 그렇다면 국민학교 3학년 때는 1950년이 된다. 현기영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또한 이런 일들이 보편적으로 벌어졌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경부터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4.3사건과 여순사건 등 좌익들의 거센 도전이 있었던 데다가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당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즈음부터 홍백전은 청백전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에 운동회를 경험한 이들은 그 유래를 모른 채 원래부터 청백전인 줄 알고 운동회를 즐겨왔던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부지불식간에 운동회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사진] 1947년 5월 30일자 [음악주보] 제47호. 왼쪽에는 음악 소식이, 오른쪽에는 ‘어느 학교 응원가집’이라는 곡이 실려있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이 [음악주보]에 실린 ‘어느 학교 응원가집’에서는 5개로 팀을 나누어 각 군별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싣고 있었다. 그 속에는 홍군가가 녹군가, 백군가, 황군가, 청군가와 함께 들어있다. 홍색은 여러 색깔 중의 하나로만 인식될 뿐, 아직 반공 이념으로 위험시하던 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 실린 5곡은 모두 같은 곡에 가사만 바꾼 것이 아니라 모두 곡이 다른데, 흥미롭게도 다른 곡에 비해 홍군가의 경우에만 1절과 함께 2절 가사가 적혀있다. 1947년 작곡된 이 노래는 아직 학교 현장에서 홍군이 퇴출되기 전의 응원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청군가 가사에 등장하는 ‘동무’도 아직 퇴출 전이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동무’라는 용어가 대표 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동무는 곧 ‘친구’로 바뀌게 될 운명이었다. [음악주보]에 실린 노래 ‘어느 학교 응원가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녹군가>
    오월달 미풍은 우리들을 부른다. 코발트 하늘 아래 힘차게 싸우자
    유니폼 씩씩하게 뛰어라. 녹군 당당한 승리는 라라라 녹군

    <백군가>
    푸른 대기 깨뜨리고 아우성치는 백군 힘 있는 흰 댕기는 깃발 높이 날리도다.
    깃발 높이 날리도다. 이기자 이기자 승리의 외침은 백군뿐이다.

    <홍군가>
    푸른 하늘 아래 휘날리는 깃발 붉다 붉다 붉다 우리 3반
    승리의 영환을 눌러 쓸 때까지 싸우라 싸우라 모든 힘 다 모와
    붉은 띠 머리에 매고 정열은 용솟음 친다 친다 친다 우리 홍군
    월계관 머리에 받을 때까지 싸우자 싸우자 이길 때까지.

    <황군가>
    첫여름의 햇빛은 이 마당을 쪼이고 우리들의 얼굴은 기쁨에 빛난다. 오! 오늘은
    즐거운 체육회 쫒아라 쫒아라 노랑빛 라라라 우리는 이긴다 뛰어라 뛰어라 노랑빛
    라라라 이겨라 이겨라

    <청군가>
    힘차게 약동하자 제4의 2반 동무들아 오늘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우리 크라스 날라라 날라라 날라라 승리의 깃발

    나는 운동회에서 홍군 퇴출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 싶어 이 주보를 수집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자료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시작가인 7만원에 쉽게 낙찰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음악주보]를 배송받은 후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음악주보]가 해방 이후 첫 음악 간행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응원가뿐만 아니라 이 [음악주보] 자체도 나름 역사적 가치를 가진 것이다. 이 [음악주보]를 가지고 이리저리 탐구하다가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음악주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한자로 ‘金守賢’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학교 응원가집’의 작곡가명은 한글로 ‘금수현’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사진] [음악주보]의 왼쪽 페이지에는 편집겸발행인으로 ‘金守賢’이라고 적었는데, 오른쪽 페이지 ‘어느학교 응원가집’의 작곡자 이름에는 ‘금수현’으로 적어 놓았다.

    처음에 나는 ‘김수현’을 ‘금수현’으로 잘못 썼거나 아니면 다른 인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보통 금씨는 한자로 ‘琴’이라고 쓰는데, 김수현은 자신의 성씨 ‘金’을 한글로 ‘금’이라고 스스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 작곡자 금수현은 ‘세모시 옥색치마….’로 시작하는 유명한 곡 ‘그네’를 작곡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때 건전가요를 대표하던 ‘어허야 둥기 둥기’라는 노래 역시 금수현 작품이었다.

    나는 이 금수현이라는 인물에 급호기심이 생겨 그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회고록이 있나 찾아보았다. 1989년에 출간된 『금수현, 나의 시대 70』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절판된 탓에 비싼 가격을 주고 어렵게 중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구했다. 청군 백군에서 시작된 [음악주보]라는 자료 수집이 금수현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금수현, 그는 누구인가? 그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그의 삶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물론 금수현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그를 입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 점을 전제하고 한번 걸러서 받아 들여주시길 바란다. 이야기는 부산 대저동에서 시작한다.

    금수현, 그의 시대 70

    1992년 2월 21일 부산 대저동에 ‘그네 노래비’(‘금수현 노래비’)가 세워졌다. 음악인 금수현(金守賢)을 기리고 향토애를 높이면서 문화명소로 꾸미기 위해 부산시 강서구청이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사덕 상리마을 앞 낙동강 제방에 세운 이 노래비는 높이 4m, 지름 2m 크기다. 반원형 검은색 대리석판에 가곡 ‘그네’ 악보가 작곡가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옆엔 금수현 동상도 있다. 곡선 원통은 ‘그네’의 율동과 낙동강 흐름을 나타냈다고 한다. 악보 아래쪽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버튼도 있다. 제작은 금수현의 셋째 아들인 조각가 금누리가 맡았다. 강둑 아래 길 건너엔 금수현의 생가 터가 있다. 대저1동 옛 구포다리 입구에서 대상초등학교 입구까지 도로(길이 570m, 너비 15m)엔 ‘금수현 음악거리’도 있다. 강서구청 뒷길 쪽으로 2014년 5월 지정됐다. 도로 양쪽엔 음표, 바이올린 등의 조형물들이 세워졌다. ‘그네’ 노랫말, 금수현 선생 관련 기록들도 새겨져 있다. 이 노래비가 세워진 후 금수현은 이 땅에서 음악이 부여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는지 6개월 뒤인 1992년 8월 31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수현 기념비가 세워진 이곳 부산 대저는 그가 태어난 곳이었다. 김수현(금수현의 초기 이름)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7월 김녕 김씨 충의공파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아이를 낳자마자 수현의 어머니는 산후가 좋지 않아 곧 죽고 말았다. 이후 수현은 새엄마 밑에서 자랐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낙동강변 모래밭을 하염없이 거닐곤 했다. 몽상에 젖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강변 걷기를 좋아했던 소년, 마을 사람들은 그 소년을 보고 참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이 이를 통해 음악적 감수성을 키우고 있었음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된 수현은 대저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처음 음악의 길에 접어든 것은 학예회 경험 때문이었다. 학예회에서 같은 반의 여학생과 이중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소년은 노래를 잘한다는 칭찬에 고무되어,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수현은 이후 부산제2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틈틈이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이 학교를 마칠 즈음 대다수의 학생들이 금융조합에 취직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수현은 경제적 안정보다는 풍운아의 길을 택하고자 했다. 이때의 그의 인생관은 대략 이랬다.

    인간은, 특히 압제 하의 인간은 큰 기계 속에 박힌 한 개의 못이나 너트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가 움직이는데는 자그마한 그 너트가 필요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그 너트는 마멸된다. 기계를 조작하는 주인은 그 마멸된 너트를 뽑아서 버리고 다른 너트를 바꾸어 끼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너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너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트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금융조합에 취직하기를 포기하고 꿈을 따라 무작정 동경으로 떠나기로 작정한다. 떠나기 전 소년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저는 오래전부터 꿈꾸어오던 음악의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학비는 필요 없습니다. 고학을 하겠습니다. 뼈가 부러지도록 뭔가 하겠습니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고 사는 방법도 한 번뿐입니다. 저가 가려고 마음먹은 길을 막지 마시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으로 떠난 수현은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했고, 다짐했던 대로 신문배달, 음악 가정교사를 하며 고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악(바리톤)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터졌고,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서 유치장에 잠시 갇히기도 한다. 그가 유치장에 갇혀 있던 어느 날 밤 잠결에 갑자기 작은 창문으로 라디오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쇼팽의 피아노곡 군대 폴로네이즈였다. 그는 감옥에서 이런 기도를 했다.

    아! 내가 다행히 풀려난다면 저런 곡을 써야지. 굳세게 영원히 음악에 몸 바쳐야지. 음악의 신이여. 내게 그런 기회를 다시 한번 주소서

    다행히 그는 불온단체와 무관하다는 것으로 판명되어 80일만에 풀려난다. 1940년 음악학교 졸업 후 수현은 동경의 쇼치쿠가극단(松竹歌劇團) 합창단원으로 1년 정도 활동했는데, 이때 심청전을 오페라로 만들기 위해 아리아 ‘심봉사의 슬픔’을 작곡하기도 했다. 1년 뒤 김수현은 조선으로 귀국하고 1942년에는 동래고등여학교의 음악교사가 된다. 이때 ‘목란종군(木蘭從軍)’이라는 음악극을 공연했는데, 독창, 합창, 발레도 들어있는 일종의 뮤지컬이었다. 이 음악극 공연은 당시 큰 호응을 받았다.

    [사진] 부산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로 일할 당시 학생들과 노래극을 연습할 때의 김수현 (회고록, [금수현, 나의 시대 70]에서)

    1943년에 김수현은 인천 부평의 대정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전혜금과 결혼했다. 이 전혜금의 어머니, 즉 김수현의 장모는 여류 소설가 김말봉이었다. 김말봉은 부산 태생으로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해 주목받았다. 전시체제하 일제가 조선어로 소설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자 절필을 선언하고 실제로 광복 전까지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자존적인 삶을 강조하던 작가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공창제’ 폐지 운동을 하며 결국 법제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수현은 결혼하고 얼마 후 첫 아기를 얻었다. 수현은 대문에 새끼줄을 치고 고추를 달았다. 이름은 음악하는 사람답게 ‘도시’로 하기로 했다. ‘도시라솔파미레도’의 제일 앞에 나오는 ‘도시’다. 한자로는 ‘도시(都是)’, 즉 ‘모두’라는 뜻이다. 이어서 태어날 아이는 순서대로 ‘라솔’, ‘파미’, ‘레도’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석 달이 조금 지나 폐렴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이 길어지면서 당시 시국은 점점 일본에게 불리해져 갔다. 적국의 언어인 영어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김수현은 어느 날 학부형회 간부로부터 “며칠 전 동래경찰서에 갔더니 한 형사가 동래여학교에 영어를 가르치는 교원이 있다. 이때가 어느 땐데 그런 자가 있는가? 그것이 음악 교원이라 하니 아마 선생님을 말한 것입니다. 앞으로 조심하십시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음악에는 안단테(Andante)나 알레그로(Allegro)니 로마자의 빠르기표가 많이 나온다. 그러니 영어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알파벳을 가르친 것에 불과했지만, 이현령비현령이었다. 이렇게 수현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수현은 일본이 하루빨리 패망하기를 바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행진을 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대중들이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었다. 김수현은 이럴 때 부를 노래가 필요함을 느껴 교무실에서 곁에 앉아 있던 이중희 선생에게 작시를 부탁하고, 여기에 곡을 붙여 8월 16일 ‘새노래’라는 곡을 완성했다. 해방 이후 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최초의 곡이다.

    가사는 이렇다.

    삼천리 강산에 새 빛이 트는 날
    우리의 앞길에 무궁화 피었네
    동포야 동포야 이날을 잊지를 말고
    영원의 자유를 눌러 세우세

    김수현은 이 노래 악보를 작게 프린트하여 동래중학을 위시하여 부산의 여러 학교로 보냈다. 그래서 이튿날부터는 학생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수현은 이 노래 말고도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를 한 곡 더 만들었는데, 도 학무국장과 부산사범학교 교장을 겸한 윤인구가 적어준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8월 15일’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로 시작하는 ‘독립행진곡’과 함께 해방 정국에서 가장 널리 불린 노래가 되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
    삼천만 가슴엔 눈물이 샘솟고 삼천리 강산엔 새봄이 오던 날
    아아 동포여 그날을 잊으랴
    우리의 생명을 약속한 그날을 8월 15일 8월 15일

    해방 직후 김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도위원으로 잠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부인하면서, 그는 다시 교육계로 돌아왔다. 1945년 10월 김수현은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약칭 ‘항고녀’, 이후 ‘경남여고’로 개칭)의 교감으로 부임했다. 부임 직후 김수현은 성을 ‘금’으로 바꾸었다. ‘김수현’이 ‘금수현’이 된 것이다. 당시 항고녀의 18명 교원 중에 9명이 김씨라 “김선생”하면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상황이었다. 김수현은 평생 구태의연한 것을 싫어했고, 변화무쌍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늘 도전하면서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김수현이 선택한 새로운 성씨는 ‘금’이었다. ‘金’은 ‘김’으로 읽기도 하지만, ‘쇠금’이기도 하다. 수현의 시조는 알지(閼智)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초기 왕 석탈해가 아이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왕궁 인근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사람을 보냈더니 백마가 있고 나무 사이에 금궤짝이 있었는데 열어보니 옥동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를 왕자로 삼으면서 성을 ‘金’이라 했는데, 그때는 ‘김’이 아니고 ‘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 금씨가 미운 어느 왕이 오행에 있는 금극목(金克木)을 빙자하여 금씨를 김씨로 했다는 말도 참고했다. 더구나 앞으로 한글 전용이 되면 이름도 우리말로 지어야 하겠고 김이라는 성이 너무 많으니 성도 분파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김’을 ‘금’으로 성을 바꾼 것은 간단해 보여도, 실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예부터 성을 바꾼다는 것은 큰 죄악으로 여겼다. 그러나 수현에게는 성을 되찾은 것이지 바꾼 것이 아니었다. 성을 바꾸면서 그는 앞으로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이 일만은 굳은 신념으로 지키겠다고 각오했다. 이렇게 금수현이 된 후 그는 당장 교직원 회의에서 자기의 성을 ‘금’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학생들 앞에서도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김씨에 익숙해진 선생들이나 학생들은 실수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그는 선생이건 학생이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항고녀에 부임하던 즈음 수현은 1945년 10월 죽은 도시를 이어 다시 아들을 낳았다. 이제 ‘도시라소’는 그만두기로 했다. 차라리 든든하게 ‘뿌리’로 이름을 짓고자 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서기가 한자에 ‘뿌’자가 없어 등록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가나 이름은 호적에 올릴 수 있었는데, 해방이 된 후 한글 이름이 등재가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 이름을 짓되, 등재는 우선 한자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해가 해방되어 나라를 찾았던 때라 이름을 ‘나라’로 하고 한자로 ‘那羅’로 정하고 호적에 올렸다. 한글 전용론자 금수현은 일정 정도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자로는 ‘金那羅’로 올리고, 실생활에서는 ‘금나라’로 부르고 적었다.

    [사진] 경남여고 교감 시절 금수현이 아내 전혜금과 아들 금나라와 함께 찍은 사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금나라는 톱연주로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결혼 직후 암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금수현, 나의 시대 70]에서)

    이렇듯 그는 평생 한글전용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인물이다. 뒷날 그가 쓴 신문 칼럼을 보면 그가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취지를 살필 수 있다.

    ‘記念’이든 ‘紀念’이든 한글로 ‘기념’이라고 쓰면 간단한 문제인데, 굳이 한자로 쓰려니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말이나 글이나 쉽게 표현하여 상대에게 의사만 전달하면 되는 것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데, “아버님 더운 날씨에 몸 편안하십니까?”라고 하면 될 것을 “부주전상서 염서지절에 옥체안강….”이라고 시작하면 힘들어 결국은 편지 안쓰는 불효가 되고 만다.

    – ‘남대문 글 잘 썼네’ 국제신보 1962년 칼럼 중

    경남여고의 교표를 새로 만들 때도 금수현 교감은 한글 전용론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가 근무하던 학교 이름이 항고녀에서 경남여고로 바뀌자 새로운 마크를 만들어야 했다. 금교감은 이때 ‘ㄱ ㅕ ㅇ ㄴ ㅏ ㅁ’이라고 한글 자모로 풀어쓴 마크를 창안하여 학생들이 달고 다니게 했다. 지금은 꽤 흔한 마크지만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경남여고에서는 지금도 이 교표와 이 교표를 담은 교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한글전용론자 금수현이 우리 음악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음악 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제대로 된 음악 교과서가 없던 시절, 금수현은 ‘음악글’이라는 제목의 음악책을 만들면서 용어를 대부분 한글로 바꿨다. ‘다섯줄’, ‘높은음자리표’, ‘이음줄’, ‘음표’, ‘쉼표’, ‘도돌이표’ ‘큰북’, ‘작은북’, ‘으뜸음’, ‘버금딸림음’ 등 어려운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는 이 교재를 프린트해서 여러 학교에 배포했고,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최현배 편수국장에게도 보냈다. 외솔 최현배는 한글학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최현배는 금수현이 보내준 책을 보고 “내 생각과 똑같다”며 그를 문교부 음악용어제정위원으로 불러들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서양식, 한자식 음악용어들이 금수현이 ‘음악글’에서 사용한 용어를 토대로 바뀌었다. 물론 채택되지 않은 용어도 있었다. ‘장단’이라는 용어가 대표적이다. 장단을 한자말 ‘長短’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사실은 순우리말이다. 음악용어 제정 당시 ‘리듬’과 ‘장단’을 두고 큰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투표까지 간 끝에 결과는 한 표 차이로 결국 ‘리듬’이 채택됐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금수현은 슬그머니 ‘리듬’과 ‘장단’을 함께 쓰도록 용어집에 넣었다. 우리말 ‘장단’은 이렇게 하여 살아남았다. 한글전용론자였던 그였기에 이후 1949년 1월에 그가 주도해 만든 노래모임은 ‘노래하자회’였으며, 그가 만든 출판사 이름도 ‘새로이사’였다.

    내가 수집했던 [음악주보]가 만들어진 것도 금수현이 경남여고 교감으로 근무할 때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때가 이 경남여교 교감이었을 때인 것 같다. 이즈음 경남음악협회 총회가 열려 음악콩쿠르를 열자는 결의가 되어 도내에 공고했고, 음악교육의 촉진을 위해 [음악주보]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간하기로 하고, 금수현이 그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8절지 한 장 4면을 프린트한 이 간행물은 음악계의 뉴스에 교재용인 곡도 한 곡씩 넣어 만들었다. 매주 이것이 나오면 학생을 통해서 각 학교에 배부하고 지방은 우송을 했다. 한 부 2원, 월 8원의 유가지(有價紙)인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2천부를 찍어야 했다. 1946년 간행되기 시작한 이 [음악주보]는 해방 후 음악 관련 정기간행물로서는 최초였다. 이를 통해 그는 부산을 중심으로 음악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금수현은 [음악주보]의 편집 때문에 더욱 바빠졌지만, 그럴 때마다 동경 유학시절을 떠올렸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듣고, 풀려나기만 하면 음악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그가 아니던가. 이 [음악주보] 간행의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이후 부산에서 새로이 출판사를 차려 일반 도서 및 악보를 출판했고, 이는 다시 1970년 음악 잡지 『월간 음악』을 창간하는 바탕이 되었다.

    내가 수집한 [음악주보]는 제47호인데 1947년 5월 30일자로 발행된 것이었다. 왼쪽 편집 겸 발행인으로 ‘金守賢’이라 써놓고, 오른쪽 ‘어느 학교 응원가집’의 작곡가 이름으로 왜 ‘금수현’이라고 썼는지 그 의문은 이렇게 해서 풀리게 되었다. 그가 ‘금수현’으로 자신을 선언한 것은 1945년 10월 경남여고에 부임한 직후부터였으니 1947년 5월 발행된 [음악주보]에 ‘금수현’이라고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경남여고 교감으로 일하던 1947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그네’도 만들어졌다. 장모 김말봉은 어느 날 수현에게 “사윗님은 그동안 곡을 자주 써서 만인이 부르는데 나도 그런 노래를 하나 남겼으면 해요” 라면서 시를 하나 주게된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아래라-
    마-음의 일만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수현은 소설가 장모가 적어 준 시에 15분 만에 곡을 붙여 ‘그네’라는 곡을 완성했다. 이렇게 이 노래는 장모 김말봉과 사위 금수현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노래에는 ‘그네’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그네 뛰는 광경을 선연히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곡이다. 이 노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1947년 8월 금수현은 경남여고를 떠나 경남도립극장장을 맡아 운영하게 된다. 당시 김철수 도지사는 금수현을 불러 이곳을 문화의 전당으로 만들어 보라고 부탁한다. 극장장 재임 시 [피리와 칼]이라는 경가극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당시 쟁쟁한 음악가들을 초청해 매달 1회의 ‘희망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희망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 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1949년에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 매달 쉬운 새 노래를 만들어 미국 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皆唱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무렵 금나라에 이어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때 이름을 한글로 호적에 등재하려고 본적지에 문의해보니 최근에 공문이 와서 가능하다고 하여, ‘나라’에 이어 ㄴ자 항렬로 ‘난새’라고 지어 등재가 되었다. 뜻은 신화에 나오는 ‘난(鸞)이라는 새’의 뜻도 되고, ‘나는 새’도 된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등재한 한글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보다 먼저 한글이름으로 등재한 이로 ‘최참도’라는 인물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금난새는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지휘자로 성장하게 된다. 금수현은 이후 태어나는 자녀의 이름은 ㄴ자 항렬에 따라 금내리, 금누리, 금노상이라 하였고, 그 다음 세대는 ㄷ자 항렬, ㄹ자 항렬로 이름을 짓도록 했다.

    이후의 그의 행적은 간단히만 정리하자. 그는 이후 부산사범학교 교감, 경남여중 교장, 통영고교 교장 등을 역임했고, 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몇 년간 근무하였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 과정을 정하고, 국정 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 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후 군정기간에 잠시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이사관으로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 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또한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고, 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으며, 1970년에는 『월간 음악』을 창간하였다. 이어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 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과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말년에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 노력 끝에 완성하였다.

    해방 직후 부산과 경남 일대에서 서양 음악의 씨앗을 뿌리고, 음악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금수현은 당뇨 합병증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별세하기 3년 전에 회고록 [금수현, 나의 시대 70]을 펴내 음악에 헌신한 자신의 삶과 그가 겪었던 70여년의 인생사를 정리하였다. 그의 73년 인생사 자체가 한편의 음악이었다.

    [사진] 금수현(1919∼1992)은 해방 이후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음악을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다.

    늘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좋아했던 덕에 그는 우리나라 최초 타이틀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다시 검증할 부분이 없진 않지만, 회고록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내용까지 포함하여 정리하면 대략 열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김’씨 성을 ‘금’씨로 최초로 창씨한 인물이다.

    둘째. 해방 후 첫 해방가인 ‘새노래’를 작곡한 인물이다.

    셋째. 음악용어를 우리말로 짓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넷째. 해방 후 한글 이름(금난새)을 처음 호적에 등재한 인물이다.

    다섯째. 해방 후 최초의 음악 간행물 [음악주보]를 만든 인물이다.

    여기까지는 이미 위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여섯째. 해방 후 최연소 교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34세의 나이로 경남여중 교장이 되었다.

    일곱째. 해방 후 학교 현장에서 이동식 수업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금수현이 경남여중 교장으로 있을 때, 그는 21학급 모두에 특별교실로 만들 수 없으니 특별교실을 몇 개 만들어놓고, 시간마다 학생들이 이동해서 수업을 듣는 이동식 수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어느 시간이나 실험실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동식 학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실시된 방법이었다.

    여덟째. ‘국기에 대한 배례’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꾸는 데 기여하였다. 그가 1948년 9월 부산사범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이후의 이야기다. 당시 월요일 아침마다 전체 아침모임을 큰 강당에서 했다. 그런데 이날만 되면 ‘국기에 대한 배례’에서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연발이었다 한다. 학생 10여명이 종교적 이유로 ‘국기에 대한 배례’를 거부한 것을 훈육주임이 발견하고 학생들을 구타한 것이다. 학생들은 성서의 출애급기에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정당성을 설명했다. 금 교감은 이 사실을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으냐고 문의서를 보냈다. 2주일이 지난 후 회신과 더불어 새 방법이 시달되었다. ‘국기에 대한 배례’를 ‘국기에 대한 경례’로 고치며 절을 하지 말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도록 하고, 애국가 ‘봉창’은 ‘제창’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홉째. 상대를 높여 부를 때 지금은 꽤 익숙하게 쓰고 있는 ‘…..님’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주장한 인물이다. ‘귀하’나 ‘선생’을 대신하여 쓰기에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의 제안자는 아니지만 ‘그녀’를 ‘그니’로 쓰자는 제안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의 회고록의 한 대목이다.

    남자를 ‘그’라 하고 여자를 ‘그녀’라고 쓰는데, 아무래도 일본 글 ‘彼女’에서 비롯된 것 같다. 더구나 ‘그녀’의 경우는 ‘그년은’으로 들린다. 어느 소설가가 ‘그니’로 쓰자고 제안했는데 나는 절대로 찬성이다. ‘어머니, 할머니, 언니, 아주머니’ 등 ‘니’는 여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니’로 써오는데 교정원이 무단으로 고쳐버려 원고에 고치지 말도록 적어 놓아야 할 판이다.

    열째. ‘터널’이란 단어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tunnel’을 처음 우리말로 바꿔 썼을 때는 보통 ‘톤넬’로 썼다. 금수현은 서울신문 칼럼에 영어 발음기호대로 하면 ‘톤넬’보다는 ‘터널’이라고 써야 한다고 썼는데, 이 칼럼 이후 모두 터널로 썼다고 한다. 또한 한글전용론자였던 그는 글을 쓰면서 한 자라도 더 줄이기 위해 겹모음인 ‘야여요유’를 적극적으로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줄리아드’를 ‘줄랴드’로, ‘윌리엄’을 ‘윌렴’으로, ‘함레트’가 ‘햄릿’으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랴’로, ‘이탈리아’는 ‘이탈랴’로 쓰자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 중 일부는 실현된 것도 있고, 다수는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든 말을 줄여 쓰기를 좋아하는 요즘 세태에 부합되어 나중에 실현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열하나째. 최초로 사교댄스 책을 출판했다. 1949년 1월 그는 음악인뿐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만들었다. 국민개창운동의 일환이었다. 방법은 쉬운 노래를 만들어 매월 미국 공보원에서 발표를 하며 함께 부르기로 하는 일이다. 이 무렵 사교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동경음악학교에서 발레를 1년이나 공부한 금수현은 일본판 춤책을 한 권 사서 그 책을 참고하여 춤책을 하나 출판했다. 이것이 해방 이후 처음 나온 사교댄스책이다.

    열두째. 한국전쟁 때 가장 많이 불린 노래 중 하나를 작곡했다. 당시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이 많이 부른 노래로 ‘양양가(진군가)’가 있었다. 이 노래는 박시춘 곡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함께 최고의 애창곡이었다. 노래 가사는 이러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겠노라

    그런데 이 노래는 원래 군가로 작곡된 것이 아니었다. 경남여고 교감으로 일할 때 음악극으로 고구려 역사를 소재로 ‘을불의 고생’을 대본화하고 음악을 붙였다. 이 음악극 중에 나오는 곡이 ‘양양가’의 원곡이었다. 원곡은 금수현의 노래극 ‘을불의 고생’에 나오는 곡으로 어느 군악대장이 이 노래극을 보고 채보를 하여 대구육군본부에서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곡 가사는 한국전쟁이 아니라 삼국시대 역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고구려의 산천은 영원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겠노라

    열셋째. 한국에서 최초로 음악 도시인 안골음악촌을 구상한 인물이다. 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진해시 안골동 일대 5,580㎡ 넓이의 땅을 매입하여 음악인의 도시를 만들었다. 금수현은 정기적으로 음악제를 열 바닷가 땅을 물색하다가 1979년 이 부지를 구매하여 10년간 건축해 ‘안골음악촌’이라 이름 붙이고 운영하였다. 그러나 1992년 그가 사망함으로써 운영이 중단되고 말았다.

    얌생이 몬다와 교장들을 구보시킨 대위 군수

    그의 회고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몇몇이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윤이상, 우장춘, 오현명, 백건우, 안익태, 김종필 등이 글 중간중간에 등장한다. 또 이 회고록 중에는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내용들도 자주 나온다. 그 중 두 개만 소개한다.

    먼저 한국전쟁 중 ‘얌생이 몬다’라는 은어에 대한 것이다. ‘얌생이’는 경상도 말로 ‘염소’를 뜻한다. ‘얌생이 몬다’는 말은 한국전쟁 중 ‘도둑질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은어였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전쟁 중 부산 부두는 엄청난 군수 물자가 산적되어 있었고, 미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부산 부둣가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그 밖은 널따란 풀밭이었다. 그 근방에 사는 농민들은 이 풀밭에 염소를 몰고 와 풀을 먹이고 있었다. 해방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부둣가에는 엄청난 양의 미군 물품이 야적되기 시작했다. 하루는 언제나처럼 어떤 농민이 염소를 몰고 야적장 곁 철조망 밖에 가서 염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는데 철조망이 허술해서 제법 큰 구멍이 나 있었고 마침 경비병이 저들끼리 장난을 하느라고 이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농민은 쿵덕거리는 가슴을 안고 철조망 구멍으로 들어가 야적해 놓은 곳에 숨어들었다. 덮어놓은 커버를 들치고 닥치는 대로 한아름 안고 들어간 구멍으로 도로 나왔다. 그 다음 그 물건을 풀밭에 숨겨놓고 염소를 집에 몰고 온 다음 해가 진 후 그 물건을 찾아갔다. 그 물건을 시장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얻었다. 그 다음날도 이렇게 해서 수입을 올렸다. 아침마다 일찌감치 염소를 몰고 나가 재미를 보던 사실을 가까운 사람이 알고 이른 아침에 이 농민을 만난 그 사람은, “이 사람, 오늘도 얌생이 모나?”라고 아침 인사를 했다. 이 말이 한입 두입 건너 남의 것을 슬쩍 훔치는 것을 ‘얌생이 몬다’는 말로 유행이 되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다.

    또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군인들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금수현은 5·16 직후 군정에 잠시 발을 들였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시사정보실장을 맡아 일을 한 것이다. 시사정보실은 전국의 지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통해서 이것저것 동태를 파악하여 의장에게 보고하여 행정을 보좌하는 것이 주무였다. 이 무렵 행정을 맡은 군인들 중 비민주적인 사건이 수없이 보고되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당시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군정기 군인들의 위세 같은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회고록 내용이다.

    모 도지사 비서관은 방문객이 불손하다고 뺨을 갈긴 일, 모 교육감 비서는 교육자들의 회의에서 질문한 데 대해 아까 한 말을 듣지 않고 졸았느냐고 힐책한 일, 더욱 우스운 것은 시골의 대위 군수가 군내의 교장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는데 뛰어오지 않고 슬금슬금 걸어온다고 공동책임으로 운동장을 서너 바퀴 구보를 시켰다는 보고들이다.

    군인 군수가 운동장에서 교장들을 뺑뺑이 돌리다니!!

    금난새, 금수현의 뜻을 잇다.

    회고록 속 금수현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했고 무척이나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생활 속에서 음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를 늘 고민했다. 음악이 생활이고, 생활이 음악이었다.

    그가 1963년경에 쓴 칼럼 중 한 대목이다.

    심리학적으로 본 생활 속의 음을 들추어보면 사장이 부르는 벨보다는 버저 소리가 좀 낫고, 학교의 사이렌보다는 종소리가 더 상쾌하다. 자동차 경적도 좀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달 수 없을까? 욕심에는 화음을 낼 수 있는 경적이 더 좋을 것 같다. 학교 종도 ‘도, 미, 솔’ 세 개쯤 달아 두고, 시작 종은 ‘도, 미, 솔’, 끝종은 ‘솔, 미, 도’, 점심 종은 ‘미,솔,도’ 등으로 미화할 사람은 없을까?

    그에게 음악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음악은 더 많이 더 널리 보급되고 대중화되어야 했다. 이런 금수현의 뜻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아들 금난새였다.

    [사진]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금난새 (한국국제교류재단 사진)

    금난새는 한국의 음악가 겸 지휘자로서 클래식 대중화의 길을 연 음악가로 평가 받는다. 아버지 금수현이 걸었던 음악 대중화의 길을 그의 아들도 걷고 있는 것이다. 금난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1963년 서울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지휘에 대한 꿈을 꾸었고, 2학년 때 서울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여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 영 앙상블’이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기도 했다. 1974년 국제 청소년모임 대표로 독일 베를린에 간 그는 지휘를 배우고자 무작정 베를린 음악대학 라벤슈타인 교수를 찾아갔다. 그의 의지에 감동한 라벤슈타인 교수는 그에게 수업료도 받지 않고 지휘를 가르쳐주었다. 1976년에는 프랑스의 니스와 파리에서 피에르 데르보에게 지휘법을 지도 받았다. 1977년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참가하여 3위로 입상하면서 국내 음악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 유러피안 마스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거쳐 모스크바 필하모닉, 프라하 방송 교향악단, 독일 캄머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0년 국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 격인 전임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981년 국립교향악단이 KBS로 이관되자 KBS 교향악단 전임지휘자로서, 정기 연주회와 특별 연주회를 맡으면서 착실히 실력을 쌓아나갔다.

    1992년 그는 12년간 지휘자로 활동했던 KBS 교향악단을 그만두고 수원 시립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 활동이 저조했던 수원 시립교향악단은 그가 지휘를 맡은 이후 연 60회 이상 연주를 하는 악단으로 발전했다. 1998년 수원 시립교향악단을 그만둔 그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로비 음악회〉·〈도서관 음악회〉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공연을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로서 무일푼으로 시작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8년 만에 연간 140여 회의 공연과 관객 12만 명을 동원하는 오케스트라로 발전했다. 금난새는 1999년부터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청주 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2006년 경기도립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10년 10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여 2011년 현재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성을 ‘금’으로 바꾼 것이 뒷날 상속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금난새는 1992년 아버지 금수현, 2017년 어머니 전혜금이 별세하자 2018년 상속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이 “상속신청서상과 가족관계증명서상 성이 달라 상속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때 금씨 성을 김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에 금난새는 “가족관계등록부상 성을 금으로 바꿔 달라”며 소송을 냈다. 1심, 2심은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은 바꿀 수 없다며 금씨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20년 1월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금씨 집안이 순우리말을 쓰려는 생각으로 광복 후 성을 ‘금’으로 썼고, 금씨도 출생 후 각종 사회적 활동에서 ‘금’으로 썼다”며 금난새의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금수현이 별세한 지 27년이 되는 2019년 아들 금난새는 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뜻깊은 책을 펴내 아버지를 기리고자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구성이 특이한데, 제1악장부터 4악장까지 네 개의 악장으로 목차를 꾸몄다. 제1악장부터 3악장까지는 아버지 금수현이 1963년 3월부터 6월까지 국제신보에 썼던 칼럼들 중에서 75편을 골라 묶었고, 마지막 제4악장은 아들 금난새가 쓴 글 25편을 묶어 총 100편의 글로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장모 김말봉과 사위 금수현이 공동으로 그네라는 곡을 완성했듯이, 아버지 금수현과 아들 금난새는 책을 통해 하나의 교향곡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금난새는 아버지 금수현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글을 쓰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제 나름대로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제가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자꾸 글도 쓰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고, 말도 많아지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늘어납니다. 어쩌겠습니까? 이것 역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천성인 것을요.

    음악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천성은 아들 금난새의 천성으로 이어졌다. 음악에 대한 열정도 그러할 것이다. 금수현의 뜻이 금난새에게로, 다시 금난새의 뜻이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 가족의 아름다운 뜻이 만고불변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 <컬렉터의 서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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