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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①
        2022년 06월 15일 0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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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흐름에 상당한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당연히 전쟁의 핵심 주역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다.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흐름에 대해 계간 <사회진보연대>에 실린 임필수 씨의 글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많은 분량이어서 몇 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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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자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를 두고 국제적으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큰 틀에서 보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두고 제기된 토론의 반복이다. 즉 크림반도 합병 당시에도 대체로 지금과 유사한 분석과 입장이 제기되었다. 첫째,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이 합병 사태를 낳았다는 입장. 둘째,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하려는 서방의 시도가 오히려 실책이라는 입장. (크림반도 합병 때도 지금처럼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가 미어샤이머가 자주 언급되었다.) 셋째, 우크라이나는 오렌지 혁명이라는 사례처럼 권위주의 질서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반해,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을 중심으로 권위주의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양국의 충돌이 빚어졌다는 입장. 넷째, 푸틴이 국내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대외정책을 활용했다, 즉 푸틴 정권이 경제적 성과에 기초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나타나면서 민족주의적 정서를 활용할 필요가 커졌다는 입장.

    이러한 분석과 입장 중에서 일부 국내언론은 유독 두 번째, 즉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고, 나토 가입에 대해서도 완전히 문을 닫지 않아서 러시아의 강경한 대응을 유도하는 실책을 저질렀다는 입장에 주목하는 듯하다. 그런데 두 번째 입장이야말로, 사실은 러시아가 가장 바라는 입장일 것이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이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편리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러시아 때문이 아니라, 서방 때문에 합병이나 전쟁이 발생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러시아가 나쁘다고 하더라도 서방도 나쁘다는 도피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합병과 전쟁을 개시한 러시아라는 일차적 행위자의 내적인 요인은 무시하게 된다.(1)

    그렇지만 우리는 질문할 필요가 있다. 푸틴 정권이 아니었어도 크림반도 합병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을까. 합병이나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나. 러시아 옐친 정부 때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보전, 즉 크림반도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양국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의회에서 비준도 했는데, 왜 푸틴 정부는 전쟁을 선택했는가.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크림반도 합병이 벌어질 당시의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푸틴 정권의 성격이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그 정권이 구축되어온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푸틴의 대통령 집권 이전까지의 간략한 전사를 포함해서, 푸틴의 대통령 권한대행(1999년) 취임부터 크림반도 합병(2014년)까지 푸틴의 행보와 러시아의 변화를 다루게 되었다.

    이 글의 결론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러시아의 내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푸틴 집권 초기는 경제개혁과 경제성장, 정치안정, 개방적 외교정책에 대한 기대를 높였지만, 기대와 어긋나게 푸틴 정권은 점차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실로비키’(군대, 비밀경찰 출신 인사)라는 푸틴의 측근 그룹이 수직적,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을 구축하고, 거대 국유기업을 사적 소유물로 전락시켰다. 또한, 푸틴과 연고를 지닌 ‘친구’들이 거대 국유기업과의 수상한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푸틴과 ‘경제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경제적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러시아 경제는 장기저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두 번의 대통령, 한 번의 총리를 한 후, 2012년 푸틴이 다시 대통령에 나서는 일은 국내에서 상당한 저항에 직면했고, 2011~2012년에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푸틴 집권 후 초유의 대규모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 푸틴은 한편으로는 저항세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면서도,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미 푸틴의 정치 담론을 지배하고 있던 ‘대러시아 애국주의’가 한층 더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푸틴은 본인 덕분에 러시아가 소련의 해체 후 극심한 혼란을 이겨내고, 서방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으로 부활했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 역사의 가용한 자원을 모두 동원했는데, 차르 시대 제국의 거대한 팽창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대조국전쟁 승리도 위대한 업적이라고 강조하며 민족적 추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푸틴 본인이 무명의 총리에서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었던 2차 체첸전쟁과 같은 길을 찾기 시작했다. 즉 대러시아 애국주의를 폭발시킬 현실의 이벤트가 필요했다. 즉 위험과 비용이 아주 크지 않은 ‘소규모의 승리하는 전쟁’이 필요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과 같은 러시아 이웃국가에서 벌어진 민주화 ‘색깔혁명’은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국내 저항을 촉발시킬 수 있는 현실적 위협이기도 했다. 크림 합병은 푸틴이 추구하는 바에서 볼 때, 모든 측면에서 최적의 케이스였다. 러시아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군비증강과 현대화를 추구했는데, 러시아의 군사력은 우크라이나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러시아는 서방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회색지대’ 전략을 구사했는데, 즉 서방은 개전 초기, 크림에 러시아군이 직접 투입되었는지 여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2014년 크림 합병은 러시아 내에서 ‘크림 컨센서스’를 창출해, 푸틴과 여당 통합러시아당은 그 후 두마 선거나 대통령선거, 개헌투표에서 승승장구했다. 개헌에 따라 푸틴의 초장기 집권의 길이 열렸고, 푸틴은 2024년에 다섯 번째 임기에 도전하게 된다. 그렇지만 크림 합병과 동시에 단행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작전은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화되었고, 그에 따라 전쟁의 경제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푸틴의 인기를 최고치로 끌어올렸던 ‘크림 컨센서스’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푸틴은 결단해야 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개입을 중단할 것인가, 아니면 확대할 것인가. 푸틴은 크림 합병 당시 서방의 무력한 대응을 분명히 확인했다. 푸틴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선택했다.

    요약하면, 이 글은 크림 합병,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으로 러시아의 국내적 원인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크림 합병이 발생한 원인으로 ①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 ②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러시아 이웃 국가에서 나타나는 탈권위주의적 흐름과의 충돌, ③ 공격적 대외정책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성을 꼽은 입장을 종합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푸틴 정권의 성격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푸틴 권력의 구축과정을 살펴보겠다.

    1. 푸틴은 누구인가?

    푸틴 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인사는 푸틴의 성장 과정, 초기 커리어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즉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KGB(국가보안위원회)라는 경력을 공유하는 인사들이 푸틴의 정보기관, 군대, 국유기업에서 중추를 맡고 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당시 관리들은 푸틴의 초기 경제부서에서 경제정책을 이끌었다. 세 번째 부류는 그 실상이 비교적 늦게 알려졌는데, 푸틴의 어릴 적 죽마고우이거나 부시장 시절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로, 국유기업과의 특혜 거래를 통해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또한, 푸틴의 KGB나 부시장 경험은 그의 국가관, 정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푸틴 정권의 성격,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기나 초기 커리어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성장기 (1952~1974)

    블라디미르 푸틴은 1952년 10월 7일,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2)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체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예전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과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푸티나는 모두 1911년생으로 어린 나이에 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내전을 겪었다. 아버지는 1941년, 서른 살의 나이에 재징집되어 작전 중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부부는 872일간 계속된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결국 살아남았다. 어머니 마리아는 질병과 기아로 두 아들을 잃은 후, 41세의 나이에 셋째 푸틴을 낳았다. 부부는 오랜 고통 끝에 찾아온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푸틴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도와 레슬링을 혼합한 삼보라는 호신술을 배우며 남보다 앞서겠다는 의지가 강해졌고, 학교 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16살이던 1968년, 《방패와 칼》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는데,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소련 비밀첩보요원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는 영화를 보고 첩보요원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레닌그라드 KGB 본부에 찾아가 어떻게 하면 KGB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경쟁률이 40대 1쯤 되는 국립 레닌그라드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법학 공부에 재미를 느꼈는데, 법은 곧 규율과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졸업하면 검찰청에서 변호사로 일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1974년, 오랫동안 희망했던 바대로 KGB에 채용되었다. 그는 KGB의 과거 범죄행위는 과거의 일이고, 오히려 국민이라면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마땅히 KGB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KGB 경력 (1974-1990)

    당시 KGB 의장이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경제현대화를 지지하며 KGB에서도 거시경제, 무역에 식견이 있는 요원을 뽑으려 했다. 푸틴은 대학 시절 국제무역과 최혜국대우를 주제로 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이런 추세를 이미 알고 있던 듯하다. 그런데 안드로포프는 경제현대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악명 높은 제5총국(반볼셰비키 반소비에트 인사, 종교인 감시)을 창설해 사하로프, 솔제니친과 같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주도했다.

    푸틴의 KGB 경력은 아직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불확실한 대목이 많다. (제5총국 활동에 관여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큰 줄기만 보면, 그는 1976년 훈련교육을 마치고 중위 계급장을 달고 국내안보, 방첩을 다루는 제2총국에 배치되었다가, 6개월 후 해외첩보를 다루는 제1총국으로 옮겼다. 제1총국은 KGB 내 요직으로, 30만 명이라는 방대한 직원 중 5천 명 미만이 제1총국에 소속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 주재하는 외교관과 외국인의 동태를 감시했다. 그는 1983년 류드밀라 슈크레브네바와 결혼했다. (제1총국에는 미혼 요원은 해외에 파견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1984년 9년 차에 소령으로 진급하여 드디어 모스크바의 정예 해외첩보원 연수학교인 적기연구소에 들어갔다. 꿈에 그리던 해외첩보원이 될 길이 열렸다. 그는 냉전 시대 첩보활동의 요지인 베를린을 원했지만, 1985년, 독일 드레스덴에 배치되었다. KGB 드레스덴 지부는 요원 6~8명을 유지했다. 그는 번역가라는 위장 신분으로 1990년까지 동독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드레스덴 첩보요원의 주된 업무란 아무 쓸모 없는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내는 일이었는데, 대부분 현지 언론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푸틴은 부임한 후 주로 과학기술 첩보업무를 맡았다.

    인구가 1,700만 명이던 동독에도 직원이 9만 명이 넘는 슈타지(국가안보부)가 존재했는데, KGB는 슈타지를 마치 하부조직인 것처럼 다뤘다. 그의 드레스덴 근무 중 벌어진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사건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일 것이다. 동독 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 호네커 서기장은 1989년 초 베를린 장벽이 50년, 100년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10월, 당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의장에서 해임되고, 12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푸틴은 슈타지에서 일하던 이웃, 친구가 겪게 된 운명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갑자기 일을 잃고 시민들의 노여운 배척을 받았다. 드레스덴 슈타지 총책 호르스트 뵘은 1990년 2월 자살했다. 동독 KGB는 자료를 파괴하고 정보원 조직을 정리하고 숨기느라 우왕좌왕했고, 푸틴과 간부요원도 러시아로 귀환했다.

    귀환 후, 푸틴은 드레스덴 활동에서 보인 충성심에 대해 의심을 받아 KGB 요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KGB의 ‘활성예비역’으로 전환되어, 위장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대학 국제관계 담당 부총장직을 받았는데, 이 자리는 학생과 방문객을 감시하기 위해 마련된 KGB 몫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앞길이 불확실한 KGB를 떠나 정치경력을 시작할 계기를 얻는다.

    3) 정치경력의 시작: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까지 (1990-1996)

    푸틴의 대학 시절, 그에게 상법을 가르쳤던 조교수 아나톨리 소브차크는 푸틴이 레닌그라드로 돌아올 무렵 개혁파의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1989년에 처음으로 실시된 인민대표대회(의회) 선거에 출마해 레닌그라드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사하로프, 옐친과 함께 지역 간 대의원 그룹을 형성하며 명성을 쌓았다. 1990년 5월에는 레닌그라드 시위원회(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유능한 보좌관들을 찾아 나섰는데, 그 자신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KGB에서도 연락책을 찾았다. 푸틴은 KGB 상관의 동의를 받고 소브차크의 대외관계 보좌관직도 맡게 되었다. KGB도 신예 스타정치인 진영에 요원을 심어두는 게 나쁠 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브차크는 1991년 5월 레닌그라드 시장으로 당선되고, 6월, 푸틴을 시 대외경제관계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소브차크 시장은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를 꺾는 데 선봉에 섰다. 당시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쿠데타의 핵심세력에 속했으나, KGB 핵심요원 다수는 의장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고, 또 일부는 옐친과 반쿠데타 세력을 돕기도 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푸틴은 소연방의 해체, 특히 쿠데타가 전개되는 과정에, 어떤 식의 사소한 역할도 하지 않았으나, 쿠데타 세력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광경을 확인하고서는 KGB에 사직서를 냈다. 실제로 쿠데타 실패 후, 크류츠코프는 체포되고, KGB는 여러 다른 조직들로 분할되고, 제5총국은 폐지되었다.

    *1992년 9월 28일 레닌그라드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개칭하는 행사에 참여한 소브차크 시장(오른쪽)과 푸틴.

    *소브차크가 1996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특별조사팀이 구성되어 시장실에서 벌어진 부패혐의를 1년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1997년 6월 그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심장통증을 호소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당시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이던 푸틴이 직접 개입하여 그를 프랑스로 출국시켜버렸다. 소브차크는 1999년 러시아로 귀국해 푸틴의 대변인이 되어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다가 2000년 2월 칼린그라드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중 호텔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푸틴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쫓기다 못해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정적에 대한 암살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독살설과 같은 흉흉한 소문이 이어졌다.

    레닌그라드시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군수산업이 무기계약 중단으로 극도의 침체상태에 빠졌고, 연방이 해체되어 다른 연방공화국에서 제공되던 식량과 연료도 끊겼다. 푸틴은 도박산업을 유치하고, 국유기업의 원자재를 팔아 식량과 맞바꾸는 계약을 추진했으나 어느 것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위원회는 석연치 않은 계약을 두고 부패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했으나, 불성실하고 무능했다며 푸틴을 해고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소브차크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푸틴은 반면, 외국자본을 들여오는 데는 꽤 성과를 거뒀다. 드레스드너 방크, 도이체 방크, BNP 은행, 크레다리오네 은행 등 외국은행과 캔디 제조업체 츄파춥스, 오티스 엘리베이터 등 제조업체를 유치했다. 또한, 생산공장 특별지구를 조성해 하이네켄, 펩시, 코카콜라, 포드, 리글리를 유치했다. 푸틴은 1994년 제1부시장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푸틴은 1995년 5월,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를 조직한다. 옐친 대통령 본인은 무소속이었으나, 그가 임명한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은 ‘우리 집–러시아’를 창당해 옐친을 보위하고자 했다. 따라서 ‘우리 집–러시아’는 자율적인 정치조직이라기보다는 행정부-대통령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정당을 일컫는 권력정당(party of power)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은 1995~1997년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리더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1995년 총선에서 ‘우리 집-러시아’는 비례대표에서 10.13%, 지역구에서 5.64%를 득표해 전체 450석 중 55석을 획득하는 저조한 성과를 냈다.

    소브차크는 예상 밖으로 1996년 시장 재선에 실패했다. 도시에 만연한 범죄와 혼란에 따른 유권자의 환멸이 반영된 결과였다. 푸틴은 갑자기 일자리와 목표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가 될까, 유도 트레이너로 일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 소브차크 시장과 함께했던 여러 부시장 중 한 명인 알렉세이 쿠드린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푸틴은 쿠드린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로 진출해 파벨 보로딘이 이끄는 대통령행정실 자산관리부에 소속된다. (쿠드린은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 승승장구하여, 2000년부터 11년간 재무부장관을 맡게 된다.)

    4) 모스크바 진출: 대통령실과 연방보안국 (1996~1999)

    모스크바에 막 도착한 푸틴은 아직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그는 옛 소련에 소속되었던 독립국과 위성국에 흩어져 있는 해외자산을 되찾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쿠드린이 재무차관으로 승진하면서 자신이 맡던 자산관리부 중앙통제국장을 푸틴에게 물려주었다. 대통령행정실 부실장을 겸임하는 막강한 자리였고, 특히 정부의 지출남용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지방정부 고위직이 기업과 짜고 국가재산을 빼돌리는 일이 아주 흔한 때였다. 푸틴은 기소권은 없었지만, 대통령실의 힘으로 조사를 진행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다. 이 자료는 지방정부 고위직의 약점을 잡는 셈이었고, 푸틴에게는 곧 권력으로 가는 길을 의미했다. 그는 1997년 5월까지 89개 지방정부 중 1/3을 조사한 결과, 부정을 저지른 260명의 관리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옐친파 내부에서 차기 권력을 향한 내분, 충돌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옐친 대통령 측은 자신을 호위해 줄 ‘얼굴 없는 젊은 관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옐친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해 옐친의 패밀리가 많은 것을 결정했다.) 푸틴은 옐친과 개인적 인연이 전혀 없었지만, 1998년 5월 대통령행정실 제1부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전국 89개 지방 정부들과의 관계를 담당하는데, 대통령 포고령이 지방정부 수준에서 제대로 실행되는지 살피는 자리였다. 그는 이미 지방정부에서 벌어진 부정을 조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올랐다.

    그러다가 1998년 5월 연방보안국(FSB)의 국장으로 전격 임명된다. FSB는 과거 KGB에서 국내 파트를 담당하던 제2총국의 후신이므로,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중령이란 계급으로 퇴직한 후, 최고 수장이라는 엄청나게 승진한 지위로 말이다. 이때 푸틴은 조용하고 효과적인 일 처리로 한 번 더 옐친의 강한 신뢰를 받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대통령 측근, 가족과 관련된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고들던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이 끝내 물러나도록 유도하는 데 푸틴의 공이 매우 컸다. 푸틴은 검찰총장의 혼외정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필두로 갖은 음모와 술수를 동원해 검찰총장이 스스로 물러나는 모양새가 나오게 했다.

    5) 총리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체첸 초토화 작전

    1998년 9월 옐친이 총리로 임명한 프리마코프의 문제는 옐친보다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프리마코프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주자로 부상했는데, 옐친은 그를 총리로는 임명했지만 차기 대통령감으로는 맘에 두지 않았다. 옐친은 1999년 5월 그를 전격 해임하고 무색무취한 스테파신을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그렇지만 해임된 프리마코프와 모스크바 시장 루즈코프는 선거연합을 결성했고, 특히 루즈코프 측은 대통령과 패밀리의 부정부패 의혹을 계속 쏟아냈다. 옐친은 그들 중 누군가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본인의 장래가 매우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옐친을 버리고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던 사람들과 달리, 푸틴의 FSB는 루즈코프의 아내가 운영하던 회사를 전격적으로 수사대상에 올리면서, 옐친을 향한 충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옐친 대통령 탄핵을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다. 공산당이 꼽은 옐친의 죄는 1991년 소연방의 해체, 1993년 의회를 향한 무력대결, 체첸전쟁의 개시, 군대의 약화, 1990년대 경제위기였다. 5개항의 죄목은 모호했지만, 공산당뿐만 아니라 의원 다수가 지지했고, 러시아 국민 다수도 크게 호응했다. 대통령 탄핵은 소연방 해체와 옐친의 개혁이 낳은 결과물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대통령 탄핵안이 두마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옐친은 놀라운 정치적 모험을 결심했다. 푸틴에게 총리를 제안하면서, 한때는 자기편이었지만 이제는 정적이 된 자들을 이길 수 있는 정당을 조직하고 이끌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푸틴은 “저는 선거운동 하는 거 정말 싫어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옐친은 선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국민이 갈망하지만 옐친 자신에게 부족해 보이는 면모, 곧 신뢰, 권위, ‘군인다운 태도’를 보이면 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옐친은 1999년 8월 TV 연설을 통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면서, 그가 “다양한 정치세력과 힘을 모아 러시아의 개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도 대통령 선거에 나설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푸틴이 옐친의 공식 후계자로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것은 아직 아니었고, 언론은 대중에게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푸틴이 그 전임 총리보다 오래 버티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푸틴이 총리로 임명될 무렵, 러시아의 경제, 정치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98년 8월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채무지불 유예)을 선언했다. 러시아 경제가 생산성 저하, 만성적 재정적자로 고통을 겪고 있던 데다가, 1997년 개시된 아시아 금융위기, 그에 따른 원유·비철금속의 수요 감소라는 외부적 충격이 가해졌다. 특히 유가는 석유시추 비용 밑으로 떨어졌다. 애당초 만성적 탈세와 자본도피 때문에 가뜩이나 세수가 부족한 마당에 유가하락은 정부재정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1994~96년 체첸전쟁에 따른 막대한 전쟁비용이 누적되었다.

    한편 (1차) 체첸전쟁은 1996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즉 체첸의 국가적 지위에 관한 논의는 5년간 동결되었다. 그렇지만 1999년 3월 러시아의 체첸특사 슈피군 장군이 납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8월에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 반군세력이 체첸 바로 옆의 다게스탄을 침공해 이슬람국가를 수립하겠다고 선포했다. 바사예프의 군사행동은 상호 경쟁하는 체첸 독립세력 중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로 보였다.

    푸틴은 FSB 국장 때부터 체첸의 독립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전쟁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총리에 오르자 옐친이 말한 ‘군인다운 태도’를 선보이려 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에게 전 안보부처를 동원해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푸틴은 두 주간 체첸 반군이 장악한 다게스탄 마을을 공습했고, 기자들을 대동하여 다시 장악한 마을을 깜짝 방문해 공을 세운 러시아군에 훈장을 달아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늙고 병약한 옐친 대통령과 대비되는 젊고 강한 총리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했다.

    [그림] 1999년 9월 9월 모스크바 남부, 구리야노바에 위치한 아파트가 폭파되어 94명이 사망하고 164명이 부상했다.

    https://www.hudson.org/research/12750-vladimir-putin-1999-russian-apartment-house-bombings-was-putin-responsible

    1999년 8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모스크바, 부이낙스크, 볼고돈스크에서 다섯 건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 모두 295명이 사망했다. 푸틴 총리는 체첸 무장세력의 테러로 단정했다. 그런데 9월 22일 라쟌의 아파트단지에서 아파트 폭발사건에 사용된 것과 비슷한 모양의 장치가 발견되어 제거되는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폭탄을 설치한 세 명이 체첸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FSB 소속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러자 FSB 국장 파투르세트는 폭탄이 가짜이고 훈련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폭탄은 가짜가 아니라 아파트 네 곳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물질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온갖 의혹이 쏟아져 나왔다. 폭탄테러가 체첸에서의 군사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FSB의 음모라는 주장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모스크바에서는 누가 저지른 일인지 불분명한 아파트 폭탄테러가 연이어 터져, 수백 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푸틴은 1999년 9월, 러시아군과 내무부 소속 병력에 체첸으로 밀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2차 체첸전쟁을 개시했다. 그는 1차 체첸전쟁과 달리 체첸 전체를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총리로서 정치적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 체첸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2차 전쟁의 경우, 1차 전쟁과 달리, 모스크바 테러를 겪은 후, 국민의 지지가 매우 높아졌다. 8월에 총리로 지명될 때 푸틴의 대통령 후보 지지율은 2%에 불과했으나, 10월에는 27%로 올라왔고, 11월에 이르러 40%를 넘어섰다.

    옐친의 정치집단은 총선에 대비하여 1999년 10월 통일-러시아당을 창당했다. 통일-러시아당은 루즈코프, 프리마코프 연합인 조국-전러시아당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정당이었다. (그렇지만 양당은 2001년 합당하여 통합-러시아당[약칭 통합당]을 건설한다.) 새 정당은 특별한 정강이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애국전선을 표방했다. 통일-러시아의 지지율은 바닥을 맴돌았으나, 푸틴이 통일-러시아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통일-러시아당은 지역 기반이 미미했으나, 푸틴 총리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에서 많은 표를 얻어 제2당으로 약진했다.

    * 임기 4년의 국가두마는 4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절반은 1인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지역구 선거로, 나머지 절반은 전국단위의 정당명부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1999년 총선 결과, 공산당은 1당을 지켰으나, 의석은 44석이나 줄었다.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공산당과 조국-전러시아당이 지역구에서 선전한 반면, 통일-러시아당은 지역구에서 매우 부진했으나, 비례대표에서 많은 의석을 차지에 2당으로 약진했다. 러시아 국민의 65%가 체첸전쟁을 찬성하는데, 푸틴 총리에 대한 지지가 통일-러시아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위 표에서는 과거 공산당과 인적 연계성이나 친화성이 있을 경우에 ‘좌파’로, 공산당에 반대하던 개혁파와 연계성, 친화성이 있는 경우 ‘우파’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2000년 1월, 통일-러시아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고 두마 상임위원장을 두 당이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조국-전러시아당, 우파연합, 야블로코를 모두 배제했다.

    한편, 옐친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모험을 결단했다. 총선 전 옐친은 푸틴에게 임기를 마치기 전, 즉 1999년 말에 대통령직을 사임할 의사를 전달했다. (원래는 2000년 6월에 대선이 치러져야 했다.) 그럴 경우, 총리인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90일 이내에 후임 대통령직을 선출해야 했다. 이럴 경우, 현직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된다. 옐친은 12월 31일, 사임 연설을 전국에 방송하며 “새로운 밀레니엄을 새로운 정치인과 함께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1999년 12월 31일, 푸틴의 첫 번째 포고령의 명칭은 ‘러시아연방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보장’이었는데, 그들에게 기소면책권을 보장하고 옐친의 재산과 서류에 대한 수색, 압수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6)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로 (2000)

    대선은 3월 26일로 당겨졌다. 푸틴의 국정 의제를 담은 공약집은 게르만 그레프가 설립한 전략발전센터가 작성했다. 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브차크 시장 밑에서 푸틴과 함께 일한 경력이 있고, 1998년 8월 연방 국유자산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 2000~7년, 새롭게 설립된 경제개발·무역부 장관을 맡았다. 앞에서 언급한 쿠드린과 그레프는 2000년대 초중반, 푸틴 행정부의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2000년에 들어와서 푸틴 권한대행에 대한 지지율이 50%를 넘어서자 푸틴 등장 전, 유력 대선후보였던 조국-러시아당의 루즈코프와 프리마코프는 출마를 포기했다. (나아가 2001년 12월 통일-러시아당과 조국-전러시아당이 합당하여 통합-러시아당을 결성했다. 범옐친파가 푸틴을 지지하며 재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은 별다른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고(TV토론 출연도 거부했다), 권한대행으로서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전국에 내보냈다. 밀린 임금을 봄까지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연금을 인상했다. 특히 체첸전쟁이 길어지면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해, 강력한 보도통제를 하면서 무자비한 공세를 단행했다. 러시아군은 기화폭탄으로 도시 전체를 불태운 후, 2월 초, 그리즈니를 장악했다. 선거 직전, 푸틴은 파일럿 복장으로 2인승 전투기를 타고 그로즈니를 방문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푸틴은 텔레비전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 후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종종 연출했다. 혹자는 푸틴의 ‘스턴트’ 연출을 비디오크라시라고 불렀다.

    그 결과, 2000년 3월 대선에서 푸틴은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어 52.94%를 득표했고, 투표율도 68.6%를 기록했다. 2위는 공산당의 주가노프로 29.5%를 얻었다. 4년 전 대선에서는 옐친이 35%, 공산당 주가노프가 32%을 얻어 누구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해서 결선을 치러야 했다. 푸틴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은 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단 한 번의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 <계속>

    <각주>

    1. 크림반도 합병 직전까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이 추진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토의 경우를 보면, 2008년 미국 부시 행정부가 나토 가입 전단계로 우크라이나에 ‘행동계획 멤버’ 자격을 부여하자는 제안이 유럽의 다른 나토회원국들의 반대로 무산된 후,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나토 가입에 얼마큼 열의를 보이든 간에, 기존 나토회원국의 반대로 그 실현은 요원한 상태였다. (어떤 국가가 새로운 나토회원국이 되려면 기존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한다.) 즉 실제로는 유럽연합 가입이 추진된 것이지, 나토 가입이 추진된 것은 아닌데, 크림반도 합병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주 원인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근거로 드는 주장은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2. 푸틴의 생애에 대해서는 뉴욕타임스 기자 스티브 리 마이어스가 쓴 『뉴 차르: 블라드미르 푸틴 평전』(프리뷰, 2016)을 주로 참조했다. 또한 푸틴의 집권 후, 2007년 시점까지의 러시아 경제와 푸틴의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안데쉬 오슬룬드, 『러시아의 자본주의 혁명: 성공한 시장경제, 실패한 민주주의』, 전략과 문화, 2010을 참조했다. 앞의 책은 2015년에, 뒤의 책은 2007년에 나온 것이므로, 그 이후의 시기는 별도의 자료를 참조했다.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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