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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바스 지역,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
    [국방칼럼] 러시아 침공 100일 넘어, 전쟁의 분수령
        2022년 06월 10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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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써 100일을 넘어섰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루한시크주의 임시행정 수도 역할을 하는 세베로도네츠크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펼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6월 9일 텔레그램을 통해 세베로도네츠크 전투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군과의 전쟁 결과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후방 보급로가 러시아군 화력통제 범위 안에 들어가 있어서, 승부의 추는 기울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세베로도네츠크를 빼앗긴다는 것은 러시아가 시베르스키 도네츠강의 동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베르스키 도네츠강은 돈바스를 흐른다. 돈바스 해방은 러시아군의 2단계 작전목표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2014년부터 분쟁의 진원지였고, 많은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돈바스 전투가 이번 전쟁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 드넓은 벌판 아래 도네츠강이 흐르고, 그 가운데 범람원과 숲이 펼쳐져 있다. 이 아름다운 곳은 지금 치열한 격전장으로 변했다. (브라이언 밀라코프스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주와 루한시크주를 합쳐서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원래 인구밀도가 희박했고, 역사의 중심지도 아니었다. 초창기에 이 용어는 지리적인 개념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 말기에 등장한 돈바스는 짧은 기간 안에, 체제의 강렬한 상징으로 부상했다. 지금부터 돈바스에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하자.

    초원

    동슬라브인들은 드니프로강에서부터 볼가강 유역까지 펼쳐진 초원을 ‘야생의 들판’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그리고 러시아 남부지역이다. 정주민인 폴란드인들은 유목문명의 초원을 낯설고 황량하게 여겼다. 그들은 지도에 이 곳을 라틴어로 ‘사막(Loca deserta)’이라고 기록했다. 특히 드니프로강 하류 일대의 거센 물살 때문에 폴란드는 동쪽으로 진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강 건너 우크라이나 남부는 ‘급류(포로이) 너머(자) 땅’이라는 뜻의 ‘자포리지아’라고 불리었다.

    한편 남부 러시아 초원 일대에는 돈강이 흘렀다. 강을 뜻하는 스키타이어 ‘다누’에서 돈, 다뉴브, 드니프로, 도네츠가 갈라져 나왔다. 돈바스에는 돈 강의 지류인 도네츠강(시베르스키 도네츠)이 흘렀다. 지금의 돈바스를 기준으로 하면, 돈바스 서부는 자포리지아 코자크의 영역이었고, 동부는 돈 코자크의 영역이었다. 이들이 크림 타타르 공국과의 경계에서 살아갔다.

    * 16~17세기 상황을 나타낸 지도이다. 도네츠강을 중심으로 자포리지아와 돈 코자크 사이에 걸쳐 있는 사각형이 지금의 돈바스 지역이다. (구로미야 히로아키, Freedom and Terror in the Donbas).

    석탄

    1721년 도네츠강 유역에서 석탄 지층이 발견되었다. 1827년에는 한 지질학자가 석탄이 발견된 지대를 ‘도네츠 석탄 분지(도네츠키 부힐니 바이세인)’로 명명했고, 줄여서 ‘도네츠 바이세인’ 또는 ‘돈바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석탄은 이후 서쪽의 드니프로와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에서도 발견되었다. 석탄이 묻혀 있는 지역이 늘어남에 따라 ‘돈바스’는 ‘구 돈바스’로, 주변의 모든 석탄 매장 지역을 통틀어 ‘대 돈바스(벨리키 돈바스)’로 부르게 되었다.

    * 도네츠크 북쪽과 루한스크의 남쪽 사이가 ‘구 돈바스’ 석탄 분지이다. 1924년 스탈린이 서쪽의 샤흐티 일대를 돈바스에서 떼어내서, 러시아에 재편입시켰다. (Donbas in Flames)

    산업혁명의 중심

    예브게니아 노린에 따르면 돈바스는 제정러시아의 거대한 광산이자 대장간이었다. 이 지역의 환골탈태는 1856년 크림전쟁에서 패한 후 제정러시아를 산업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알렉산드르2세의 개혁정치에 힘입은 것이다. 1861년 농노해방이 단행되자 노동력 확보가 용이해졌고, 석탄∙철강산업에 대한 국가 지원과 보호관세로 인해 외국자본이 몰려들었다. 석탄산업은 철도 확장에 힘입어 발전했으며, 1904년 예카테리나철도(드니프로철도)가 최종 완공됨으로써 이 지역에 돈바스의 석탄과 크리비-리흐의 철을 아우르는 대규모 중공업이 나타났다. 돈바스는 행정 구역의 경계를 넘어선 ‘산업 클러스터’에 가까웠다.

    노동자는 볼셰비키로, 농민은 마흐노운동으로!.

    1917년 제정러시아가 무너지자 우크라이나에는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이외에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어(소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권역의 국가 건설을 주장했지만, 혁명 초기 새로운 국가에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섞여 사는 돈바스와 같은 지역을 포함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1918년 5월 독일군을 등에 업은 인민공화국이 돈바스에 들어오면서 행정기관의 우크라이나어 사용이 의무화되었으나, 이 조치는 곧바로 폐기될 만큼 키이우와의 지역 정체성의 차이는 뚜렷했다. 1921년 초 카메네프가 트로츠키에게 보낸 붉은 군대 문서에 따르면, 민족주의자들의 무장조직에 대한 지지 기반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만 포착될 뿐이었다.

    볼셰비키도 입장이 나뉘었다. ‘라다(의회)’를 장악한 민족주의자들과 경쟁하던 키이우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중심성을 받아들였고, 다른 지역의 볼셰비키에게도 이 노선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이래, 볼셰비키는 돈바스 노동자들을 이끌었고, 돈바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큰 부분이었다.

    1922년 러시아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돈바스 볼셰비키의 16.6%만이 우크라이나인이었고, 4.3%만이 우크라이나어 구사가 가능했다. 이들이 우크라이나 중심성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아르툠(표도르 세르게예프)’을 중심으로 한 동부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중심성을 혁명의 후퇴로 간주하고, 동남부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특히 돈바스 지역 일부는 돈 코자크가 장악한 ‘돈 호스트 오브라스트 행정구역(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돈바스 볼셰비키는 백위파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동부 볼셰비키들은 1918년 2월 한때 하르키우를 수도로 하는 ‘도네츠크·크리비-리흐 소비에트공화국’을 독자적으로 수립하기도 했다.

    [‘도네츠크·크리비-리흐 소비에트공화국’을 두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측 간에 의견이 다르다. 한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이들의 발자취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연방화에 찬성하는 정치세력 또는 분리주의자들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다수는 이 공화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그런데 소비에트 역사과학에서도 이 공화국에 대한 연구만은 금기시했다. 그것은 동부 볼셰비키가 당시 주류와 견해가 달랐고, 대립관계였던 키이우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주도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무자비한 혼란은 계속됐다. 트로츠키의 ‘방독면 없이 돈바스에 갈 수 없다’는 발언은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말한다. 동남부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돈바스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인 ‘네스트로 마흐노’에 대한 일정한 지지가 있었다.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동맹이자, 사회혁명의 강력한 지지자였지만, 소비에트는 당파성을 가져서는 안되며, 체카(비밀경찰)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이에 ‘마흐노’를 쿨락(부농)이라고 비판했다. 1921년 8월 볼셰비키에게 루마니아 부근까지 밀린 ‘네스트로 마흐노’가 국경을 넘음으로써,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 1921년 소비에트 포스터이다. 두 탄광노동자 사이에 돈바스는 ‘러시아의 심장’(로마자 serce Rosji)이라고 적혀 있다. 소비에트는 사라졌지만 돈바스의 자부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사회주의 건설의 심장

    내전 초기 동남부 우크라이나를 남러시아로 부르기도 했던 레닌은 1922년 돈바스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귀속시키는 역사적인 결정을 단행했다.(이때 자치권을 보장받았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농업국가인 우크라이나의 노동자 중심성을 강화함으로써 혁명 기반을 튼튼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하르키우와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지방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된다면 소부르주아지 농민 공화국이 탄생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럽혁명의 관문인 우크라이나에서 동부 볼셰비키의 노선은 소련 밖으로의 혁명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레닌은 돈바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석탄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 레닌은 돈바스가 없다면 사회주의 건설 전체가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했다.

    1924년 레닌이 죽고, ‘아르툠’의 친구인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돈바스의 장래는 분명해졌다.(1921년 아르툠이 사고로 죽자, 그 아들을 스탈린이 키울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다). 이 지역의 소비에트화는 그 어느 곳보다도 빨랐다. 돈바스 경제는 소련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신경제정책(NEP) 시행으로 1927년까지 돈바스 경제는 내전 이전 수준에 근접했다. 1928년부터는 산업화와 집단화에 기반한 5개년 계획경제가 도입되어 돈바스와 드니프로 일대의 공업지대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구로미야 히로아키(인디애나대학교)는 이를 ‘스탈린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1935년 돈바스의 탄광 노동자 ‘알렉세이 스타하노프’가 석탄 102톤 생산을 달성함으로써 작업책임량 7톤을 14배 이상 초과 달성했다. ‘스타하노프운동은’ 돈바스가 경제의 심장을 넘어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1930년대 농업 집단화, 대기근(홀로도모르), 정치적 박해는 생존을 위해 고되고 위험한 노동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냈다. 이런 결과로 돈바스의 석탄 생산량은 내전기 500만톤에서 1941년 나치 침공 당시 8,500만 톤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 1943년 8월 붉은 군대의 돈바스 공세작전 당시 사진이다. 표지판의 스탈리노는 도네츠크의 옛이름이다. 1923년 잠시 동안 트로츠크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흐루시초프 시대인 1961년 도네츠크가 되었다.

    돈바스 경제는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대규모 투자에 힙입어 1950년대 초반에는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율리아 아비복은 1960~1970년대가 돈바스의 ‘황금시대’였다고 썼다. 이 기간 소련 경제도 조금씩 변화했다. 첫째 화석연료 수급지가 새롭게 확보되었다. 1960년대 시베리아에서 석탄, 유전, 가스 매장지가 대대적으로 발견되었다. 둘째 전기생산이 다각화되었다. 석탄화력 발전에 이어 원자력 발전이 신규 공급원으로 등장했다. 셋째 동부 우크라이나 위주의 산업투자에 변화가 생겼다.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우랄 동쪽지역에 대한 산업투자가 우선해서 진행되기 시작했다.

    상실감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저하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돈바스에 직접적인 위기가 찾아왔는데, ① 소련 경제가 침체했고, ② 석탄경제에서 석유∙가스 위주의 탄화수소경제로 전환하고 있었으며, ③ 페레스트로이카는 산업구조조정과 탈중앙집권으로 나아갔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개혁∙개방은 악화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지 못했다. 1989년 시베리아에서 시작된 광부파업이 도네츠크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광부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다.

    루이스 시겔바움(미시간주립대)은 돈바스 노동자들이 연방 해체에 찬성한 것은 우크라이나 서부와 같은 민족주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발트 뵐케(독일 GEPA그룹)에 따르면 돈바스 석탄산업은 이미 1980년대부터 경쟁력을 잃고, 보조금에 의존해 온 암울한 상황이었다. 노동자계급은 독립을 통해 돈바스의 경제적 위상을 강화하고, 지역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더 이상 체제의 수호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광산노동자들은 1990년대를 거의 파업으로 보냈다. 우리가 경제의 엔진이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역 정서는 중앙정부와 서부 우크라이나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며, 분리주의가 태동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 우크라이나의 석탄생산은 1975년에 이미 정점을 찍었다. 돈바스는 독일, 영국, 폴란드, 러시아 탄광지역의 어려움을 뒤늦게 겪게 되었다. (Vox 우크라이나).

    ‘클란’의 시대

    소비에트체제는 공산당원을 기업에 파견하여 감독했다. 이들을 ‘적색 관리자’라고 불렀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국영기업 관리자들은 소규모 자회사를 만들어 공급 가격을 과다계상하거나 리베이트를 받는 이른바 ‘스키밍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극심한 경제 혼란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 간에 맺어진 공급망과 같은 연결 관계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유지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적색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별 네트워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네트워크에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허용된 협동조합이나 민간기업 또는 밀수와 범죄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이 가세했다. 이른바 ‘클란(клан, clan)’의 탄생이다.

    클란은 민영화될 기업이 더 많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더 큰 위력을 떨쳤다. 가장 세력이 큰 ‘클란’은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였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1989년까지 17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던 볼로디미르 슈체르비츠키 등 소련 중앙권력에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출신의 네트워크가 존재해 왔던 데다가, 쿠치마 대통령도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클란은 주요 국영기업들의 중심지인 돈바스로 영역 확장에 들어갔다. 도네츠크 클란과의 싸움은 조폭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할만큼 살벌한 것이었다.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6년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며, 도네츠크 클란의 수장인 예벤 슈체르반 부부가 도네츠크공항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도네츠크 클란의 패배가 확정되었다.

    돈바스는 미국의 러스트벨트처럼 석탄∙철강 산업의 쇠퇴로 인해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이 상대적으로 강한 지역이었다.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돈바스는 지역 클란과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지역 기업은 거주민을 지켜주고, 지역 권력은 기업을 보호해 주는 대신 지역민과 기업은 정치적 지지와 정치자금을 후원하는 마피아식 보호 방식인 ‘크리샤’(крыша)의 태동을 의미했다.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클란과 도네츠크 클란은 결속력에 차이가 있었다. 중산층 기반의 기술집약적 산업이 많았던 드니프로페트로프르카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돈바스에도 루한시크 북쪽 농촌지대와 도네츠크 남쪽 마리우폴 중심의 해안지역에는 지역적인 정체성의 차이가 존재했고, 도네츠크와 루한시크 간의 경쟁도 있었지만, 철강∙석탄∙기계 등 노동집약적 산업기반이 강했던 돈바스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강한 곳이었다. 도네츠크 클란의 응집력은 우크라이나가 포스트 소비에트 국가 중에서 가장 조직범죄가 번성했고, 특히 도네츠크가 마피아 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었던 데서도 기인한다.

    도네츠키예의 탄생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클란은 강력한 후원자였던 파블로 라자렌코 총리가 쿠치마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친쿠치마와 반쿠치마로 분열하는 등 계속해서 분화해 나갔다. 도네츠크 클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쿠치마 대통령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변신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과정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맞선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는 드니프로페트로프스카 클란 출신으로 반쿠치마 블록에서 정치활동을 했고, 2014년 마이단 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초콜릿 왕’ 페트로 포로셴코는 2001년까지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친쿠치마 진영에서 같이 정치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이들 간의 갈등은 친러 대 반러, 민주 대 반민주로 포장되었지만, 실은 권력을 향한 올리가르히 간의 정쟁이었다.

    돈바스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지역에서 소비에트를 대신하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돈바스가 되었다. 1998년 총선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지지하던 돈바스는 이후 ‘지역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도네츠크 클란이 돈바스 경제를 장악하고, 도네츠크 클란과 연결된 지역당이 돈바스 지역정치를 장악하는 구조가 완성되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이끈 지역당의 ‘돈바스가 우크라이나를 먹여 살린다’라는 선거구호는 사실 여부를 떠나 돈바스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다.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대통령 취임으로 도네츠크 클란의 시대가 열렸다. 제1부총리, 세금세입장관, 내무장관, 에너지 장관 등의 자리에 클란 출신이 등용됐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야누코비치 집권 기간에 도네츠크에서는 “도네츠크 사람들이 붙잡혀서 다른 몇몇 지역의 보스로 보내질까봐 밤에 외출을 두려워한다”는 농담이 생겼다고 꼬집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는 중앙정치를 장악한 도네츠크 클란을 ‘도네츠키예’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네츠키예’는 원래 ‘도네츠크 사람’을 가리키는 평범한 말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돈바스의 지배계급을 산적, 범죄, 마피아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부르는 말이 되었다. 언론인 데니스 카잔스키에 따르면 도네츠크 클란이 권력을 잃고, 돈바스에서 내전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도네츠키예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단어는 곧 ‘세파르(분리주의자)’로 대체가 되었다.

    파국

    엘리스 줄리아노(콜럼비아대)는 2014년 당시 돈바스 지역민의 불만이 러시아에 대한 향수에 기반한다고 보지 않았다.

    돈바스인들의 불만은 첫째 경제적 이해관계였다. 우선 유라시아 관세동맹을 EU 자유무역협정보다 더 선호했다. 그 이유는 ① 자유무역의 조건으로 EU가 부과할 긴축조치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② 돈바스의 주력산업인 석탄∙철강∙기계 산업은 유럽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없었으며, ③ 관세동맹에 가입하면 러시아를 비롯한 포스트소비에트 국가들과의 무역관계가 유지됨에 됨에 따라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재분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1989년 첫 파업 이후 돈바스가 국가예산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세입에 대한 기여도를 하회하는 차별을 당한다는 인식이 컸다. 그러나 돈바스 경제가 중앙정부로부터 상당한 보조금을 받아왔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은 실제 현실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지역을 자극하는 정치구호가 내면을 지배한 까닭이다.

    * 키예프 국제사회학연구소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의 인구 10만명 이상 대도시 주민들을 대상(지역당 400명 이상)으로 2014년 4월 8~16일에 걸쳐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위 표에서와 같이 유라시아 관세동맹에 대한 돈바스의 높은 선호도(도네츠크 지역 72.5%, 루한시크 지역 64.3%)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마이단혁명 이후에 시행된 국가 정책에 대한 반발이다. ① 해체된 특수경찰부대 ‘베르쿠트’에 대한 동정여론이 있었다. 1992년에 치안과 조직범죄 퇴치를 위해 출범한 ‘베르쿠트’는 마이단 시위의 폭력적인 진압에 관여함으로써 해체되었다. 이 부대에 돈바스 출신이 많았고, 돈바스에서는 이 부대가 법 집행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옹호하는 정서가 있었다. ② 극단적 민족주의 출현에 반대하는 지역 분위기가 있었다. 과도정부가 네오파시스트를 국가안보 및 국방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사람들을 자극했다. ③ 러시아어에 관한 법률을 무효화하려는 우크라이나 의회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위 표가 가리키는 것처럼 돈바스 사람들이 폭력적인 방식의 문제 해결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는 또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생각하느냐’는 설문에 대해 도네츠크 지역에서는 찬성 32.4% 대 반대 58.2%, 루한시크 지역에서는 찬성 27.6% 대 반대 57.6%의 응답율이 나왔다. ‘우크라이나에서 탈퇴하고 러시아에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느냐’라는 설문에는 도네츠크 지역에서 찬성 27.5% 대 반대 52.2%, 루한시크 지역에서 찬성 24.4% 대 반대 51.9%의 응답율을 보였다.

    이것은 분리주의와 내전이 돈바스 다수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원을 받은 소수의 조직된 힘은 끝내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 불씨가 건네진 드니프로와 오데사, 하르키우에서는 분리주의자들이 의도한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다. 오로지 돈바스에서만 활활 타올랐다.

    회복

    돈바스는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러시아 산업혁명의 유산이다. 이제 그 역사는 수명을 다했다. 다들 검은 황금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재건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돈바스가 파괴될수록 화석연료업체가 수혜를 입는다는 점에서 역사의 모순을 생각하게 한다.

    *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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