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에서 빠져나와야
    윤석열 정부 비판도 가능
    [기고] 문 5년, 윤 5년과 사회운동
        2022년 03월 16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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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두 달 사회단체들은 “윤석열 정부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할 것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단어와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촛불 성과를 뒤집는 보수의 전면화”로 시작해 “반민주 반노동 반통일 정권에 맞서 투쟁하자”라는 결의로 끝날 것이다. SNS에서는 벌써 이명박 정부 초반에 있었던 광우병 촛불 집회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180석 거대 야당이 있고, 윤 정부가 낮은 지지율로 임기를 시작하니 2008년보다 조건이 낫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과연 우리는 2008~16년의 그 “보수에 맞선 진보의 촛불”을 또 반복해야 하는 걸까?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촛불로 상징되는 ‘진보’의 결함이 보수 이상으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가 한국 사회를 도리어 타락시킬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확인된 진보의 결함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관(觀)이다. 진보는 민주화 세력으로도 불리는데, 역설적으로 이 ‘민주’에서 치명적 문제가 발견되었다.

    결함은 탄핵 촛불 집회부터 드러났다. 대통령 파면의 핵심 이유는 권력 남용이었다. 제왕적이라 평가받는 한국형 대통령제가 배경이었다. 그러나 집회를 주도한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제 개혁에 힘을 싣지 않았다. ‘적폐 청산’이라 불린 인적 청산에 주목했다. 표적은 당연히 보수 진영 인사들이었다. 진보 지식인들은 인적 청산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탄화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제도 개혁이 아니라 진보의 권력 쟁취가 목표란 것이다. 진보가 힘을 가지면 민주주의는 자연스레 발전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부를 자처하며 집권 후 3년 넘게 적폐를 찾느라 분주했다. 청산 지휘소인 청와대의 권력은 당연히 이전보다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은 면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2018년에 불쑥 내밀었다가 야당을 탓하며 거둬들였다.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제 개혁에 미진한 정부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와대가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개혁에서는 대통령이 더 많은 권한을 가져가는 공수처를 지지했고, 시도 때도 없이 대통령 주도의 적폐 청산을 ‘촛불 정신’의 명분으로 요구했다. 민주당 이해찬 씨는 진보가 장기 집권하는 게 개혁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는 진보 진영 전반이 공유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도 파괴했다.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파괴하는 21세기의 사례를 분석해 그 공통점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다.

    민주주의를 소리소문없이 파괴하는 정치세력은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방 동의 없이 게임 규칙을 변경하며, 경기 외부자까지 이용하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딱 이러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사법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사법기관을 집권 세력에 유리하게 만들었고(심판 매수), 야당 합의 없이 선거법을 개정했으며(일방적 규칙 변경),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총선 승리를 위해 정파적으로 활용했다(외부자 이용). 두 정치학자 관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는 전형적인 21세기형 민주주의 파괴자였다.

    문재인 정부의 규범 파괴는 제왕적 권력을 개혁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방법으로 정당화됐다. 보수는 절대악이며, 진보가 권력 쟁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생각 말이다. 진보 진영의 대다수 사회단체도 이런 생각을 공유했다. 정부 정책이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 단체는 많아도,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비판한 단체는 극소수였다. 심지어 정의당은 선거법 개정 패스트트랙의 공범이었다.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백낙청 씨는 조국 사태가 촛불 혁명에 반발하는 보수의 반격이라고 규정했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부 중 한 명인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의 내적 결함이 ‘다수의 전제정’이라고 주장했다. 평등한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민주주의는 입법이나 정책 선택에 여론이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그 여론이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거나 지대 추구에 혈안이 되어 공익을 배반하면, 민주주의가 사실상 전제정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문재인 정부에서 드러난 진보의 민주주의관이 바로 이러한 다수의 전제정과 친화적이었다. 서민을 대표하는 게 진보고, 이 진보의 이익을 침해하는 보수(‘토착왜구’라고도 부른다)를 제압하는 게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5년 내내 정치를 지배했다.

    다수의 전제정은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론에 좌우되는 결정은 얼마든지 비과학적일 수 있다. 공익에 반하는 사익은 명분이 어떻든 국민경제에 타격을 준다. 문재인 정부가 ‘빼박’ 증거라 하겠다. 소득주도성장부터 부동산 정책에 이르기까지 여론에 좌우된 경제정책은 결과가 좋지 못했다. 정치적 사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반일 외교와 맹목적 대북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정부를 악마화한 후에 보수에 맞서 진보가 결집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대선이 끝나자마자 우후죽순 나타난다. 정부를 비판하는 건 사회운동의 당연한 임무다. 하지만 보수를 악마화하는 방법으로 진보의 결함은 은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를 5년간 충분히 확인했다. 새 정부에서 이명박근혜 시절의 촛불을 되풀이하는 건 역사적 퇴보다. “윤석열 정부 전망과 과제”는 촛불의 결함을 평가하는 성찰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문재인 5년이 가르쳐주는 윤석열 5년간의 사회운동 과제> 연재 순서

    1. 촛불 정신에서 빠져나와야 제대로 된 정부 비판도 가능하다.
    2. 사회운동은 왜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요구해야 하는가?
    3. “신자유주의 반대” 뒤에 숨어서는 윤석열 식 노동개혁에 맞서기 어렵다.
    4. 저성장, 불평등, 평화위기 속 민주주의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
    필자소개
    연구 활동가,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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