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도 지금도 노점상 변한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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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03일 04: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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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양반은 어떻게 살란가 모르겠는데, 밑바닥이 달라질 게 뭐 있겠어요? 또 이상하게 보도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언론이 노점상을 같은 사람으로나 보나?"

    동대문 풍물시장 노점상 사무실. 한 노점 상인은 경기를 묻는 기자들의 똑같은 질문과 ‘노점상 = 불쌍한 사람’으로 박제화 시킨 언론의 보도에 적잖이 시달린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또’ 경기를 물을 수밖에 없는 ‘악역’을 맡아야 했고, 그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지난 해 12월 29일 동대문에서 만난 22년 경력의 노점상 박찬종(서울노점상연합 회장, 63)씨의 근래 매출은 평소보다 딱 ‘절반’으로 줄어 최악의 불경기를 맞고 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손님이 뜸한 평일엔 식사비도 아깝다.

    남대문에서 액세서리 노점을 시작한 박씨는 18년 전 동대문 운동장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동대문은 날개를 단 듯 한국 최고의 패션 특구로 성장했다. 동대문의 화려한 ‘외형’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표면’엔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람 죽이는 민주주의가 도대체 뭐 길래?"  

       
      ▲ 동대문 밀레오레 맞은편의 노점에서 기자를 맞이한 박찬종씨
     

    20년 전 87년 6월 항쟁 당시. 그 당시에도 노점을 했던 그는 없는 돈을 쪼개 빵을 사서 시위대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대학생 아무개 씨(고 이한열 열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뭐 길래 사람이 죽나 싶었다. 민주주의가 뭔지 알고 싶어 그는 시위 현장 속에 뛰어들었다.

    전경들의 방패를 뺏고, 장사 도중 학생들에게 물을 건네고, 때로는 직접 참여했다가 정신없이 쫓겨 다니기도 했다. 박씨는 "그때는 나뿐 아니라 같은 노점상 동료 및 시민들도 누구나 시위대를 거들었다."라고 회고했다.

    "만약, 오래 갈 시위였다면 (참여를) 못했지. 근데, 그땐 분위기가 금방 잘 해결이 될 것 같았고 난 성격이 다혈질이어서 정의를 위해서라면 양보를 못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남들이 자꾸만 민주주의가 그렇게 좋다하는데, 나도 그런 사회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어."

    특히, 그는 당시 ‘넥타이 부대’의 응원을 유독 잊지 못했다. 그는 "샐러리맨들이 원래는 시위에 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명동에서 넥타이를 풀고 응원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면서 "그 당시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점상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일이라곤 민주주의를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 다른 사람과 함께 그저 작은 ‘점’하나를 찍은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연쩍어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는 그와 무명의 수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함께 만들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일궈낸 민주주의에 일말의 정신적 안정감을 얻었노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정작, 박씨 삶의 질은 항쟁 20돌과는 무관했다.

    민주주의와 삶의 질은 반비례?

    세금과 물가는 매년 꾸준히 올랐다. 꿈만 같았던 2002 월드컵 특수는 불과 보름 만에 막을 내렸다. 그 후 수익은 꾸준히 감소했고, "세계 으뜸의 풍물시장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명박 전 시장의 공언은 소리 소문 없이 증발했다. 또 최근엔 오세훈 서울 시장마저 대책 없이 동대문 운동장을 헐고 디자인 산업 단지를 만들겠다고 나서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

    밑도 끝도 없는 최악의 불경기, 동대문 운동장 노점상 철거 위기, 추운 날씨 등이 맞물리면서 박 씨의 삶은 ‘그 놈의 민주주의’는 전혀 상관없이 점점 각박해져 갔다. 실제 인터뷰를 했던 29일 ‘금요일’은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노점을 연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3,000원 짜리 넥타이 하나를 산 손님 단 한 명만 다녀갔다.

    길거리에서 그냥 얼어버린 생수는 난로를 쪼여도 좀체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동대문의 야간 시장이 개장하자 하나 둘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값을 부르는 그의 말이 채 떨어지기 무섭게 흥정을 걸어온다. 그는 처음부터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흥정을 거는 손님에게 쉬이 넘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아저씨 다른 데에선 더 싸게 팔던데, 좀 깍아주세요, 저 차비 없어요."(손님)
    "그러면 더 싼데 가서 사세요. 차비 없으면 걸어가는 것도 좋아요."(박씨)

    "아저씨 넥타이 예쁜 것 좀 골라주세요."(손님)
    "안돼요. 본인이 직접 고르지 않으면 나중에 골라준 사람 원망해요. 본인이 알아서하세요"(박씨)

    온갖 상술을 다 부려도 모자랄 판에 손님을 보고 그냥 가버리란다. 허나 신기하게도 그런 손님들이 결국엔 꼭 다시 박 씨를 찾아온다. 노점상은 서민 경제의 바로미터다. 근래 들어 원가 이하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깎는 손님들이 부쩍 늘어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할 바에는 그냥 보내 버리는 게 그에겐 더 남는 장사다.

    그 고지식함이 그를 다시 거리로 내세웠다. 사실 87년 항쟁은 그의 삶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명예 훈장을 받은 것도, 재산이 늘지도 않았다. 20년간의 지난 세월 동안 좋아진 게 있다면 자녀들이 알아서 스스로 자라나고 겨울이 과거에 비해 짧아졌다는 것뿐이었다.

    "민주주의가 이상해"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 이를 짓밟는 것은 그에게 민주주의도 정의도 아니었다. 87년엔 민주주의가 궁금해 시위장에 나섰지만, 지금은 살기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넥타이를 흔들어 주는 샐러리맨도 그가 전해준 빵과 물로 배를 채우던 학생들도 이젠 더 이상 그와 동지가 아니다.

    분신 노점상 박봉규 씨, 청계천 복원 공사, 동대문 운동장 노점상 철거 등 각종 노점상 권리에 관한 현안 문제를 수행하느라 그의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 2~3시간 안팎이다. 87년 항쟁 당시에도 무명이었듯, 그는 지금도 남이 알아주든 말든 하루 48시간을 사느라 눈에 시뻘겋게 충혈돼 있다. 

    정신없이 사느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데, 박씨는 자신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며 씁쓰레 웃었다. "주책도 없다"며. 그 와중에도 박씨는 외눈박이가 될까 싶어 여러 매체의 신문 보기를 거르지 않았다. 그는 "노점상이 생기지 않게 사회가 제도적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이젠 대졸 학력의 노점상이 많아질 거라는 기사가 곧 나올 것”이라며 "위에선 노점상을 철거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탄식했다.

    이젠 그도 더 이상 민주주의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이놈, 저놈, 그놈 모두가 똑같았다. 그는 "단순히 대통령 한 명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민주노동당도 막상 대통령에 당선되면 똑같이 행동 할 것”이라며 "가방 끈이 짧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국민성을 비롯해 여러 복합적 구조의 문제들이 함께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참말로 이상했다. 그가 상상했던 그것은 ‘진실’과 ‘정의’였는데, 요즘 신세대나 대통령, 정치인들을 보면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유분방하게 막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87 시위가 민주주의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줘서 그것으로 만족한다. 만약 그 당시 상황이 재현된다 해도 난 똑같이 행동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누가 뭐래도 난 동대문 노점상 박찬종"

    샐러리맨도 학생들도 거리에서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다른 노점상과 함께 여전히 거리에 남았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만약 동대문 운동장 노점상이 철거된다면, 우리를 먼저 죽여야 가능 할 것"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가 싸우든 말든 동대문 패션 타운은 국제적인 패션 명소로 변신했다. 기자는 그에게 동대문의 화려한 성장에 비해 달라진 것 없는 자신의 현 노점 상황이 억울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삶은 겉 표면만 봐선 안 되지. 동대문의 패션 산업이 겉으론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나보다 더 불행할 수도 있는 거야. 또 돈이 많다보니 그에 따른 더 많은 고민이 쌓이기도 할 거야. 만약, 나도 흐름에 휩쓸려 저 안에서 패션 사업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망했을지 어찌 아나? 누가 뭐래도 내 자리는 영원히 동대문 노점상 박찬종이야.”

    그는 자신을 행복하고 당당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식 농사도 풍년이고 동상이 걸리도록 일 해도 불평 한 번 안하는 아내의 배려도 고맙다. 단, 사는 게 바빠 그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18번곡으로까지 부르는 고향에 자주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한편, 몇몇 언론에선 확정되지도 않은 동대문 운동장의 철거를 사실화하며 추억을 위한 ‘기념 촬영’을 호들갑스럽게 권유했다. 어떤 이에게 동대문 운동장은 ‘추억의 기념 촬영지’였고, 또 어떤 이에겐 ‘패션을 선도하는 신세계’였다.

    그러나 노점상 박찬종씨에겐 동대문 운동장은 ‘현재 진행 중’인 ‘생존의 투쟁 공간’이다. 민주화가 그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진 않았다. 그도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현장에의 ‘짧은 동참’은 그에게 일종의 지혜를 갖다 준 듯했다. "민주주의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가 기대를 가져도 될 만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날’을 상상하는 사이 어느덧 동대문의 새벽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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