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국 노동자의 기구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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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30일 04: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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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손가락’을 머나먼 이국땅 호주 시드니에 묻은 노동자가 있다. 김진욱(46세).

그는 시드니에 있는 공단, 립스비(Revesby)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지난 5월 왼쪽 손가락 5개가 모두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다. 한국에서 이민 간 사장 정아무개씨는 산재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아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일한 적도 없다고 ‘오리발’만 내밀었다.

그가 4년째 불법체류 노동자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말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서 그를 만났다.

IMF가 뒤바꿔 놓은 인생 행로

그는 지금은 현대 오일뱅크로 유명한 옛 경인에너지에서 오일탱크를 운전하던 ‘대기업 고임금 노동자’였다. 한화계열사이던 회사는 IMF 직후 한화에너지로 이름을 바꾸며 영국계 거대 정유회사인 BP사의 자본도 끌어들이고 한 차례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그는 운좋게 잘 넘겼다.

   
 ▲ 지난 11월1일 건설노조, 교사노조, 녹색당 공동주최로 열린 노동권 수호 결의대회에서 증언중인 김진욱씨 (사진 가운데)
 

그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은 2002년 당시 김대중 정부가 대기업 빅딜을 발표하면서다. 회사는 현대 계열사가 됐으며 정리해고는 안 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현대쪽은 약속대로 ‘정리해고는 안하는 대신’ 대기발령을 내렸고 김씨도 여기에 포함됐다.

한달 월급 40만원짜리 신세로 전락하자 노동자들은 결국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그는 끝까지 버텨 아웃소싱된 회사 하나를 맡아서 대표로 일하게 됐으나 몇 개월 지나자 그마저도 회사는 현대쪽 사람으로 바꾸려고 했다. 앞 길이 막막했다.

때마침 영국 BP사에서 유럽을 횡단하는 오일탱크 운전자를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를 비롯해 사직했던 몇 명의 노동자들은 영국으로 날아가 5년간 자그마치 미화 7만2천달러에 연봉을 계약했고 3만달러 가량을 미리 받았다.

김씨를 비롯한 한국 출신 노동자들은 오일탱크를 하나만 단 채 운전했다. 영국 BP사는 유럽횡단 트럭의 경우 오일탱크를 다섯개나 연결해 달려야 하기 때문에 오일탱크를 두개 달고 달리는 호주 지사에 가서 6개월간 연수를 받고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한국 사람 고충 외면하는 한국 영사관

영국 비자는 호주에서 자동적으로 인정됐고 어느 나라나 국제운전면허증은 1년간 유효했다. 호주지사에서 일한지 석달이 되던 2003년 3월 그는 좁은 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는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사고 자체는 큰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경찰로부터 ‘무면허 운전으로 비자(영국457비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며칠간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하는 국제면허증이 유독 뉴사우스웨일즈주를 비롯한 호주 몇 개주에서는 3개월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사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연방법과도 충돌하는 것이다. 김씨는 이 과정에서 한국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개인이 당한 문제에 개입하면 외교적인 마찰이 발생한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영국 본사는 비자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승소 판결을 받아오면 기존 고용계약은 유효하다고 했으며 김씨가 일하지 못하는 동안 다른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는 만큼 미리 지급했던 돈의 3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주법원은 김씨의 청구에 대해 기각했고 연방법원 역시 ‘주법이 그렇게 돼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며 기각했다. 국제법 분쟁까지 가면 승소할 수 있다고 하나 연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하려면 아직 2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유럽 14개국을 횡단하려던 그의 꿈은 전혀 생각도 안했던 땅 호주에서 꺽였다. 다른 동료들은 재판 한 번 하는데만 1만 호주달러가 소요되자 모두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족의 생계도 걱정이었던 그는 ‘불법체류’하기로 결심한다.

자격증은 7개나 됐지만 영어가 짧은 탓에 그는 대부분 한국출신 노동자들이나 워킹홀리데이로 온 학생들이 그렇듯이 한국에서 이민온 사장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회사에서 일했다. 물론 연금이나 휴가수당, 병가수당은 고사하고 최저임금도 못받았다.

손가락 다 날라갔는데 구급차도 안 부른 사장

몇 개의 일자리를 전전하다 2004년부터 일하게 된 이 플라스틱 리사이클 공장도 그런 곳이었다. 김씨를 비롯해 워킹 홀리데이 학생 등 모두 5명 정도 일하는 조그만 공장이었고 플라스틱을 프레스에 밀어넣어 폴리에틸렌 수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비록 하루 18시간 노동에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혼자서 일하는 열악한 작업장이었지만 사장은 형제처럼 잘 지내보자고 했다.

그러다가 작년 3월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끝마디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고 직후 사장은 치료비를 직접 병원에 내더니 치료를 받는 3개월 동안 보상은 커녕 단 한 푼의 임금도 주지 않았다. 임금에서 깐 것이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다. 완쾌되자마자 그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갔다.

사장은 올해 기존의 기계보다 4배나 더 빨리 돌아가는 새 기계를 들여놨다. 김씨는 위험하니 일할 사람을 더 늘리던가 기계 속도를 낮출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러다 올해 5월 19일 그는 다시 한번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차 하는 사이에 기계에 왼 손가락이 말려들어간 것이다.

사장은 산재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급차조차 부르지 않았고 다행히 옆 공장에 있는 노동자가 전화를 걸어줬다. 다음날 마취에서 깨어나자 그의 왼손가락은 철심으로 연결해 다시 붙어 있었다. 사장은 개인사고로 처리해주면 보상은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일단 한국에 가서라도 치료를 받아야 하니 치료비와 항공권 구입비 10만 달러를 요구했고 사장은 그러겠다고 했다.

보험에만 가입하면 ‘말그대로’ 무상의료를 해주는 나라가 호주지만 입원한지 일주일이 지나자 병원비는 10만 달러를 훌쩍 넘어버렸다. 병원이 공장에 치료비를 팩스로 보냈더니 사장은 묵묵부답이었고 병원에서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중단했다.

그는 사장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사장은 한국에 일단 돌아가라고 했고 그러면 3만달러를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몇 개월에 걸쳐 주겠다고 했다. 이쯤되고 보니 도저히 사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치료라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사장은 "그렇다면 임시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 줄테니 통원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새 거처로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약을 사러 나간 사이에 이민성에서 들이닥쳤다. 사장은 지금도 자신은 절대로 신고한 적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그는 "그럼 내 거처를 아는 사람이 당신말고 또 누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호주 건설노조

   
 ▲ 지난 11월1일 건설노조, 교사노조, 녹색당 공동주최로 열린 노동권 수호 결의대회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낭떠러지라고 느껴지는 순간 그는 천우신조로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노동단체와 호주건설노조 관계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호주건설노조에 가입했고 비자문제가 풀렸다. 호주 이민성은 비록 불법 체류 노동자 신분이라도 ‘사정’이 충분하면 임시 비자를 내주기 때문이다.

노조가 일단 비용을 대서 치료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사고 직후 치료를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으로 그는 몇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

12월 28일까지 약속한 기간 안에 사장쪽은 끝내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법정소송을 피하기 위한 노력은 이로써 모두 끝난 것이다. 신년휴가가 끝난 1월8일 이후 호주건설노조는 김씨가 받아야 할 체불임금 등을 대신 지급하고 소송에 들어간다.

얼음조각이 찌르는 것처럼 손과 팔이 아픈 가운데서도 그는 노조 주최의 집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피해사례를 알리고 있다. 호주 이민성에 따르면 2004년만 해도 체류기간을 넘긴 한국인이 3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같은 사람이 또 생기지 말란 법이 없죠. 처음에는 너무나 원망스럽던 사장이 이제는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이 싸움에서 꼭 이기고 싶은 이유는 비록 불법체류하다 산재를 당했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선례를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아픈 손을 들고 자리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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