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적 소임 다하고 이제 문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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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23일 0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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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여기저기서 연구소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한국사회 현재와 미래의 담론 전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정책생산 능력을 갖춘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새사연, 희망제작소, 세교연구소 등이 최근에 출범한 대표적 연구소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소들이 문을 닫아, 아쉬움과 함께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창립 11년만에 최근 해산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 이어,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중심 과제로 삼으며, 현장과 결합된 실천적 성과물을 내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도 12월에 문을 닫았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서 내는 월간지 『연대와 실천』2006년 12월호(통권 150호)는 그 마지막을 기록하는 세편의 글을 싣고 있다. 김석준 연구소 이사장, 임영일 소장, 강신준 연구위원의 글이 그것이다. 

    그들의 글을 소개하면서, 영남운동연구소 해산의 아쉬움을 함께 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12월 15일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이사회는 『연대와 실천』2006년 12월호(통권 150호)를 발간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활동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참여한 이사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무거워 보였다.

    되돌아보면 1994년 2월 창립되어 12년 10개월 동안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를 해 왔다고 자부한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그것도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한 영남지역에서,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만든 연구소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1994년 창립과 함께 울산, 부산, 창원, 거제의 주요 노동조합들과 머리를 맞대고 자본의 신경영 전략에 맞서기 위한 다양한 실천 방안들을 마련하는 한편,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기본적 한계로 자리 잡은 기업별 노조체제를 뛰어넘어 산업별 노동조합 체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경로와 방안들을 모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산별노조 경험들을 연구 소개하는 한편, 현장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산별노조 건설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아직 총연맹으로서 민주노총이 채 자리 잡기도 전부터 산별노조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 대해 현장에서는 ‘산별 만능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1997년 노동법 총파업을 거치면서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민주노조운동의 당면 과제로 대두하였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서는 내부 토론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에서는 두 가지 과제가 선후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과제임을 확인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실천에도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연구소의 많은 연구자와 현장 활동가들이 ‘국민승리 21’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활동 영역은 확대되고 있었지만, 현장 활동가들의 결합은 오히려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의 신경영 전략 공세 때문에 현장의 조직력이 훼손 당하기 시작하여 활동가들이 현장을 빠져 나올 여유가 없어진 반면, 연구소도 현장의 다양한 요구들에 책임 있게 대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현장 활동가들의 결합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위기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리라.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당면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연구자들의 재생산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서울과는 달리 가뜩이나 인적 자원이 부족한 지방에서 그나마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연구자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연구 인력의 확충이 어려워지고, 그러다보니 기존 연구자들에게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아무리 출중한 연구자라 하더라도 몇몇 사람이 제기되는 모든 과제들을 전부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장과 운동의 요구는 갈수록 커지는데 반해서 연구소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은 제한되어 있다 보니 현장과의 괴리가 더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연구의 면에서나 실천의 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아무튼 이런 속에서도 보건의료노조를 필두로 산별노조로의 조직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2006년 들어와서는 금속노조를 포함한 주요 노조들이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마무리 지어 가고 있다. 이제는 적어도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민주노총 내에서 산별노조로 조직 전환한 노동조합들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을 통해 원내 진입하여 나름대로 활약을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실제로 영남노동운동연구소와 이런 저런 인연을 맺어 활동했던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김석준 영남노동연구소 이사장 (사진=매일노동뉴스)
     

    이런 점에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애초에 설정하였던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과제가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만들어진 산별노조를 산별노조답게 제대로 내용을 채워나가고, 민주노동당을 더욱 진보정당답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또 다른 과제인 셈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던가? 이 새로운 과제들은 보다 적합한 새로운 단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과제들을 실현하는데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일익을 담당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럴만한 주체적 및 객관적 조건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기에 대단히 아쉽지만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보고, 이제 활동을 접기로 했다.

    13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경험들이 새로운 단위들의 활동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많은 연구자들, 현장 활동가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함께 전하고 싶다.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비록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이제 활동을 중단하지만, 그 동안 연구소 활동을 통해 맺어진 사람들과 실천의 성과들은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도도한 흐름 속에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의 건승을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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