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 힘 또는 노숙자의 가르침"
        2006년 12월 19일 07: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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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개벽을 한 느낌이야. 오늘이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은 제 아무리 그 잘난 이건희도 정주영도 하나도 안 부럽네(웃음)"

    연극 배우로 무대에 오른 노숙자 이홍렬(53)씨는 기자에게 먼저 인터뷰를 요청하며 "2007년엔 반드시 삶이 변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2006 년 세밑. 노숙자들이 연극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삶을 얘기했다. 18일 저녁 국내 첫 노숙인 극단 ‘징검다리’는 대학로 아리랑 소극장에서 연극 <사랑 한번 해보고 싶어요>를 무대에 올렸다.

    극단 징검다리는 다양한 연령층(30~50대)의 남녀 노숙인 11인으로 구성됐다. 지난해 12월 `성공회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마련한 연극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 노숙인의 "연극 무대에 실제로 서보고 싶다"는 소망이 씨앗이 돼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 18일 오후 대학로 아리랑 극장에서 첫 노숙인 극단 ‘징검다리’가 연극 ‘사랑 한번 해보고 싶어요’를 무대에 올렸다. 

     

    생활이 불규칙한 노숙자들에게 지난 일 년 간의 연극 연습은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생활이 불안정하다보니 연습을 위해 함께 모이는 것부터가 힘들었고,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포기한 사람도 많았다. 또 거리 생활로 인해 지쳐버린 마음은 서로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아 간혹 작은 다툼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에 유영길 연출가는 "처음엔 나도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1년 이라는 시간을 지켜보니 오히려 그 이면엔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한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라며 "화려한 조명이나 유명 배우가 아닌, 사람의 진정성과 삶의 진솔함만으로도 무대를 채울 수 있다는 걸 온 몸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소중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노숙인 자신의 얘기를 무대에 올려

    노숙인 스스스로의 경험담을 담은 이번 연극은 사랑, 가족, 꿈에 관한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처음엔 연극 치료의 일환으로 행해진 노숙자들의 즉흥극이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살과 말을 붙여 오늘에 이르게 됐다.

    연극은 여공 현순이가 공장 반장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장과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 에서 시작해,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부모의 돈으로 사업을 하지만 실패하고 노숙인 생활을 하다 결국 가족에게 돌아가는 ‘가족’에 이어,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 무대위의 장면들 (사진=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아들아, 이 개업식 떡 좀 먹어봐." – " (순간 대사가 기억이 나질 않아 멈칫거리며) 많이 먹으면 대사에 지장 있어요.(폭소)"

    누가 이 공연을 우려했던가. 대본에도 없는 애드립마저 익살스럽게 즉흥적으로 소화해내는 열연에 관객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극중에서는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아 울어야 하는데, 상대 배우의 능청에 노숙인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대사가 기억이 나질 않아 순간 멈짓하면, 이를 눈치 챈 다른 배우가 적당히 알아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인생 뭐 별거 있나? 살다보니 술이 최고 좋네. 술 이상만한 것이 없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어. 세상은 언제나 나 혼자야."

    " 우리 앞의 돈다발을 위해 바다이야기로 가자"던 배우 두칠이가 결국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노숙자가 된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과정은 차라리 전문적인 배우가 아니어서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이에 관객들도 연기가 아닌 노숙자들의 투박한 자기 고백에 일희일비하며 숨죽여 관람했다.

    " 이 세상의 부모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 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 노랭이라 비웃으며 욕 하지마라"

    사기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감옥에 구속되고, 결국 노숙자가 되었지만, 돌아갈 곳은 ‘가족’밖에 없었다. 답답하리만큼 정직하게 일 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같은 아버지가 싫어 "나 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두칠이었건만 결국 실패한 그를 유일하게 안아준 곳은 가족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대에 오른 노숙인들은 잠시 잃어버린 가정으로의 귀환을 꿈꿨다. 

    "세상엔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도 많아”

    우리 시대의 보통 아버지 역할로 관객들에게 많은 갈채를 받은 안영환(43)씨는 "처음엔 꼭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지만, 내 인생을 무대에 올려놓고 타인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결코 희망을 쉽게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를 잡고 끌까지 한다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관객들에게 당부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을 무대에서 이룬 김해복(47)씨는 "내가 얼마나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인데, 무대에서 아무렇지 않게 남 앞에서 하나도 안 떨고 날 전부 내보이는 모습에 내가 더 놀랐다"라며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제발 과감하게 뛰어들었으면 좋겠다. 시작이 반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하면 나 같은 사람도 무대에 섰는데,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것들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0석인 소극장은 160여명이 넘는 관객들이 찾아와 발디딜 틈 조차도 없었으며, 일부는 자리가 없어 공연장 밖에서 기다리다 결국 돌아가기도 했다. 이렇듯 이번 무대의 성공 뒤엔 열연한 노숙자들만큼이나 이들의 투박한 연기에 힘을 넣어준 관객들의 응원이 있었다. 

    뜻밖의 울림을 얻었다는 관객 김석환(52)씨는 "노숙인들이 철학 강의를 듣는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연극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느끼는 인간적 자존감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면서 "연극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감있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노숙자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으로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어 기대 이상의 감동을 얻었다"라고 관람 소감을 전했다.

    연극치료사 조은영씨도 "처음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눈조차 마주치지도 않던 사람들이 눈빛과 얼굴빛이 달라지는 걸 직접 체험하면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걸 얻고 배울 수 있었다" 라며 "세상엔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 중 일부를 타인과 함께 소통하는 연극을 통해 외롭고 소외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스스로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잠깐 다녀가기도 했다. 이번 연극은 무료로 공연됐으며 공연장에서 모아진 후원금은 간질환과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서울역 노숙인진료센터 건립에 사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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