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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위기, 남은 기간은 정말 6년인가?
    [에정칼럼] 시간에 대한 어떤 오해와 주체성의 필요
        2021년 10월 14일 08: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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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전환 담론과 같이, 환경, 사회 및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일수록 우리 사회는 충분한 대화와 합의를 이끌어가기보다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지방의 희생을 요구했다. 또한, 다수의 충분한 논의 없이 소수의 의견으로 졸속 추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정당화해왔던 명분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결과적으로 피해는 지역주민이, 편익은 수도권, 다소비 기업이 가져가는 중앙집권형 에너지 정책 구조를 만들어냈다. 전례 없던 기후위기로 인해 우리는 과도기에 들어서있다. 신재생 에너지와 에너지 분권을 외치지만 기존의 전체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해보고, 기후위기 에너지 분권 정책에 필요한 풀뿌리 자치를 얘기해보려 한다.

    기후위기, 우리에게 남은 기간은 정말 6년인가?
    : 시간에 대한 오해와 주체성의 필요

    “기존 탄소에너지 사회를 유지한다면, 2℃가 되기까지 6년의 시간이 남았다.” 기후위기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문장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급류 앞에 놓인 수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좀 더 깊게 고민해보아야한다. ‘6년’이란 ‘시간’은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마치 비상식량처럼 우리에게 남은 한정된 자원으로 보아야하는 것일까? 6년 뒤 훌쩍 다가오는 세계 종말로 바라보아야할까?(2℃의 기준은 산업혁명 이전. 그 시기와 비교해서 지구 평균온도가 1.5℃, 2℃ 더 상승하는 것을 파국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한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이 생각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 시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인식하는 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그레고리우스 달력과 시계를 보고 살기에 이렇게 사고하기 쉽다. 하지만 달력 속 365일, 시계 속 12개의 숫자는 모두 인간이 자연의 반복성을 담아내고자 연구한 산물일 뿐이다. 지구의 자전축을 근거삼아 1년을 365일로 쪼개놓은 그레고리우스 달력 또한 수천만년이 지나면, 계절이 어긋나버린다고 한다. 윤년, 윤달이란 개념으로 보완을 해도 말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실재가 아닌 존재 형식, 즉 자연의 반복을 표현해놓은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시장자본주의, 가부장제 등등 여러 관념이 뒤섞인 사회 과제가 세대별로 던져지는 현실 앞에서, 시간의 감옥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두 번째, 시간에 대한 선형 감각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시간이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인지한다. 이러한 사유는 지속적으로 스케줄러를 보는 등 관성적인 행동들과 외부환경으로 인해 생겨나는 당연한 인식체계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시간은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시류(時流)의 방향은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긴 실재, 자연의 변화가 그렇기 때문이다. 다소 말장난 같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두 인식에 따른 행동들은 크게 차이가 난다. “나”에 대한 주체적인 감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이다. 이 사실을 새삼스레 다시 한번 돌아볼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지, 하지만 크고 고유한지 깨닫게 된다.

    이 두 가지 왜곡된 시간 인식들로 인해, 변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오류에 쉽게 빠지게 된다.

    첫 번째, 변화를 아예 새로운 무엇인가로 생각하기 쉽다.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자신의 내재된 욕망과 불안 등 감정들을 투사하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과거에 대한 재사유와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존에 없던 변화를 외칠수록 과거와 현재의 사회 이면을 외면하는 중이지 않나 의심부터 해봐야 한다. 기후위기의 이유를 기존 사회의 면면들로부터 섬세하게 따져보지 않고, 미래에 다가올 탄소포집기술(CCUS)과 신재생에너지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여기는 기술만능주의자들 또한 이 오류에 빠져있다.

    두 번째,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으로 인해 스스로를 변화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미래가 내 움직임과 사회 간 상호작용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다가옴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인다’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동적 태도를 반복 학습하게 되면, 개인은 사회 내 이념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곧 깊숙이 내면으로 받아들인다. 관념이 내면을 지배할 때, 별다른 권력이 개입되지 않아도 사회는 알아서 그 이념대로 돌아간다. 자신이 노동자의 위치에 좀 더 가까운 걸 알고 있음에도 자본가가 유리한 정책에 의심 없이 찬성하는 사람과, 원자력 발전의 위험에 노출된 지방에 살지만 원전에 대한 우호적인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그 예일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 또한 예외가 아니다. ‘기후위기가 다가온다’는 공포심으로 대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존 관성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린뉴딜, 탄소중립을 외치며 기존 토건개발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처럼. 기후위기에 대한 충분한 경각심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대책이 불안과 두려운 감정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주체적인 의지가 없다면, 두려움 앞에서 우리의 행동은 ‘외면(진실왜곡)’과 ‘순응(굴복, 자기합리화)’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세 번째, ‘변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변화’란 무엇일까? 단어의 속성 중 하나는 ‘움직임’이다. ‘생태’와 같은 성질을 주고받는다. 생태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얘기한다. 변화 또한 상대적인 개념이기에 견줄만한 관계가 우선 필요하다. 변화는 생태와 닮아, 생명을 가진다. 따라서 변화를 이루겠다는 말은 그것을 ‘종국에 해내다’가 아니라, ‘잘 일구겠다’로 인식해야 맞을 것이다. 변화가 하나의 상(像)이 되어 고정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변화라고 얘기할 수 없다. 자신의 목적을 투사한 고정상이다. 자아실현의 도구로, 상을 고정시키고 이를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언제나 변화의 본질을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목적 밖 일상 또한, 내 뜻에 위배되는 고정상이 되어버린다. 마음이 조급해지며 점차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리면 아무리 좋은 의지를 갖고 있어도, 그 열정에 타올라 재가 될 것이다.

    생태계는 같은 환경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하는 생명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룰 때 비로소 성립한다. 생태와 자연을 보며 우리는 지속가능한 운동의 조건을 추론할 수 있다.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생명과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선 뜻이 맞는 사람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대를 외친다.

    “기존 탄소에너지 사회를 유지한다면, 2℃가 되기까지 6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문장을 다시 살펴본다. ‘현재 기후위기가 닥치기까지 이는 6년이 남았고, 그 뒤 우리는 화려하고 극적인 재앙이나 변화를 겪게될 것이다.’ 일까?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탄소에너지 사회가 전환되어야 하며,

    2.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빠른 해결책보단 제대로 된 방향의 바른 해결책이 필요하므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상상하기보다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세세히 귀기울이고 외면하지 말 것이며,

    3. 관계를 기반으로 한 연대만이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기후학자 윌 홉스Will Hobbs는 기후위기가 세계 종말로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처에서, 은밀하게, 긴가민가하면서, 세상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기후변화이며, 우리는 ‘최후의 심판일’을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보통날’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기후변화가 은밀하게 모든 것에 스며들 듯이, 우리는 극적인 답을 과학적으로 찾기보다 일상 속 우리들의 크고 작은 해결능력들을 자신의 공간에서 모아야 할 것이다.

    <참고> 신영복.2000. “강물과 시간”, 진보평론 제 3호 / 탄소사회의 종말.2020. 조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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