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재생 일터의 사례
    [외신번역] 노동계급의 자주관리
        2021년 09월 20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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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번역 글 ‘이탈리아 학생운동의 현재’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재생 일터(las Empresas Recuperadas por sus Trabajadores, ERT)

    역주: 아르헨티나는 2001년, 한국의 IMF 위기와 비슷한 양상의 경제 위기를 맞이했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기점으로 공단의 수많은 공장과 작업실이 폐쇄되었고, 불탔고, 허물어졌다. 이런 심각한 산업 공동화 현상은 수많은 생산직 노동자들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놓았고, 산업예비군의 증가는 신자유주의적 개악의 받침대가 되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는 한국과는 다르게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더불어 아나코생디칼리즘 전통, 또 보다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이 존재해왔다. 그렇기에 경제 위기 중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노동자 재생 일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거대 호텔 “Hotel Bauen”을 포함한 폐쇄된 여러 작업장을 점거의 형태로 탈취, 생산을 재개하며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평등한 노동자들이 생산시설을 민주주의를 통해 운영해나가는 생산 형태를 다시금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를 오늘 소개해보고자 Andres Ruggeri의 저서 “Qué son las fábricas recuperadas?”의 1장을 번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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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재생 일터에 대한 대략적 개요

    전반적으로 노동자 재생 일터(노재터)는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당시 터져나온 수많은 신사회운동 중 하나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을 고려하면 이 노재터는 그 운동의 일부이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노재터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성역의 중심 그 자체, 즉 생산수단의 사유 그 자체를 흔들어놓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노재터 운동의 행보는 자본가 없이 노동자가 운영하는 경제, 사회의 가능성을 지금껏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노재터는 제한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자주관리(autogestión)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노재터는 더 나아가 비슷한 차원의 문제를 다시 옮겨다가 심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더 폭넓은 수준의 자주관리를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상과의 연관성은 전 세계의 지식인들과 활동가들로 하여금 이 현상을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맞선 하나의 대안으로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런 관점에서 노재터와 거기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시작할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회변혁의 희망의 담지자로 비치게 되었다.

    어쨌거나 노재터 건설을 위해 공장들을 점거하던, 세상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리던, 운동의 시작으로부터 이미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투쟁의 열기는 경제 위기의 최저점을 지나고부터 사그라들었고, 미디어에 노출된 사례들은 예외적인 경우가 되었으며, 그 후 몇 년간 찔끔찔끔 기사가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디어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2001년 위기 당시 설립된 노재터들이 계속해서 영업하지 않았다는 것도, 지속적으로 조금이나마 새로이 설립된 노재터들이 없었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발발은 새로운 노재터 설립의 물결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게 했으나, 그 예상은 맞지 않았다.

    새로운 노재터 설립의 물결은 지난 2년간(2012-13)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의 공개 연구 프로그램의 현장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2010-13년 사이에 전국에서 각종 63개 사업체의 노재터가 설립되었다. 이 총계에서 41개 사업체는 2012-13년에 설립된 것이었다. 이는 2004-2009년간의 퇴조에 비하면 매우 급격한 증가였다. 이 새로운 기류는 2013년 말 아르헨티나 전국에 310개의 노재터가 있게 만들었다.

    첫 물결과 이번 물결이 다른 점은 바로 주목도이다. 대대적 경제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나자, 분쟁과 투쟁은 대부분 고립 속에서 이루어졌고, 또 아마도 더욱 규제된 조직적-관료적 메커니즘과 더 폭넓은 통제망 및 조직망, 더 작은 규모의 사회적 연대로 인해 사회적 열기도 높지 않았다.

    한편, 10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자주관리를 통해 운영해온 나머지 노재터의 상황을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운영과 노력의 중심이 예전의 치열한 투쟁에서,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이 기다리는 일상적 투쟁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시련들은 덜 스펙타클하지만 더욱 심도 있는 것이고, 노동계급에게는 더 의미있고 확 다가오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침묵의, 일상적인 투쟁은 이 자주관리의 프로세스에 일종의 중심성을 부여해준다. 이 중심성이란 자본주의의 중심 국가들에까지도 미친 지구적 경제 위기의 물결 속에서 이 노재터라는 경제체를 운영하는 새로운 방법이 가지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노재터는 자본가들과 경제관료가 쓸모없다고 판단한 설비들을 다시금 작동시키는 노동자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이를 통해 노재터는 노동자에 의해 경영되는 경제에 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남미 각지에서 전개된 이 복잡한 투쟁 과정은 자본과는 다른 대안적 경제 논리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기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지속가능성과 성과를 돌아보는 것의 중요성, 또 그 한계와 문제점을 면면히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노재터 운동의 이론적 가능성은 무한해 보일지는 몰라도 실제 마주치는 문제점은 일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들이고, 따라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상당한 규모의 노재터가 수 년간 운영되어온 상황을 마주함에 따라, 그들의 집단적 경험에 대한 성찰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 지금 아르헨티나뿐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며 이런 운동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되었던 곳들에서조차도 노재터 운동이 재생산되고 확장되어 나가는 상황 속에서 그 성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노재터의 정의를 내려보며

    “재생된 일터”라는 용어는, 2001년 이전까지는 아르헨티나는 물론이고 전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용어는 투쟁의 열기 속에서 솟아오른 것이자, 노동자들 그 자신들이 사용한 것으로 이 용어를 통해 노동자들은 한 번 잃어버린 일자리의 복구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자신들의 투쟁은 타협하지 않을 것임을 표명하고자 했다. 또한 이 재생은 노동자 자신들의 일자리 복구뿐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의 손상된 경제를 재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반자본주의 노동운동의 전통보다는 20세기 중반, 즉 페론주의 근저에서부터 기원하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노조 운동의 전통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사적, 계급적 전통의 흐름과 노재터의 관계 속에는 수많은 단절이 존재한다. 이 단절은 자본주의 논리의 극복 가능성을 보여주고, 또 이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노재터는 단순한 노동자들의 쟁의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재생된 일터”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2001년 12월에 처음으로 노재터가 생겨났다고는 할 수 없다. 90년대 초반, 혹은 더 이전에 기원을 두는 노재터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번영하지는 못했지만, 성공하고 살아남은 노재터와 같은 명분을 가지고 비슷한 방법으로 시도했던 무수한 도전들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적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명칭만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명명함으로 인해서 자본주의적 운영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 운영으로 이행하는 경제적 객체라고 임시적으로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 노재터에게 구체적이고 적확한 정체성을 부여했으나, 아르헨티나적 특징은 이 현상의 상대적으로 큰 규모를 의미하기도 한다. 단순히 특정 개인의 수순이 아니라 자신의 자주적 목적과 조직을 지닌 운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노재터가 존재하는 많은 다른 나라에서 이들은 하나의 구체적 운동이 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기존의 협동조합주의에 쓸려가는 모습을 보이는 동안,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운동에 붙인 노재터라는 이름은 이들의 예시를 다른 예시들-조합 결성 자체가 처음부터 목적이고, 자본가의 축출이라는 것이 없는-(물론 아르헨티나에서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본가 그 자신이 생산 수단을 버리고 갔다)과 구분하게 한다.

    정의를 내려보자면, 노재터는 기존에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체의 틀 안에서 작동하던(가끔은 합법적 협동조합의 틀 안에서) 생산수단이 화재, 폐쇄, 저이윤율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주관리적 형태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이어나가는 투쟁을 하도록 만든, 하나의 사회적-경제적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재생이라는 단어를(자치로 돌아가게 되었든 자치 속에서 재생되었든, 가장 적확하다고 할 수 있다)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투쟁의 주체인 노동자들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이고, 기존의 기업체를 점거했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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