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도 외면한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
By
    2006년 12월 11일 01:27 오후

Print Friendly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영화 <마지막 황제>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황제>는 이탈리아인인 그가 활동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기고 영어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였다. 그리고 그는 엘리아 카잔 이후 30여년 만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마르크스주의자 영화감독이었다.

1941년에 태어난 베르톨루치는 유명한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5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대를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작가로 이름을 알려졌다. 또한 아버지를 통해 파올로 파졸리니를 알게 됐고 1961년에는 파졸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에는 자신이 감독한 첫 작품 <냉혹한 사신>을 발표하면서 영화작가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 시킨 작품은 두 번째로 제작한 <혁명전야>였다. 1964년에 공개된 이 작품을 통해 베르톨루치는 자신이 낭만적인 마르크스주의자임을 공표했다.

동시에 소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라는 신분과 사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감을 노출했다. 이는 이후 오랫동안 그의 영화에서 반복된 주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영화작가의 계보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했던 1968년에 이탈리아공산당PCI에 입당했다. 앞서 이야기한 파졸리니 뿐만 아니라 루키오 비스콘티처럼 ‘네오리알리스모’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영화계는 좌익의 영향이 강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의 선배들만큼이나 이웃 프랑스의 좌익 영화작가 장 뤽 고다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다르처럼 당시 급진적인 청년들을 사로잡던 마오주의를 수용했다.

공산당에 입당한 베르톨루치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와 정치를 직접 결합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1971년 베르톨루치는 공산당계 노총인 이탈리아노동자총연합CGIL에 소속된 보건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16밀리 흑백 카메라를 숨긴 채 로마의 공공병원에 잠입했다.

기독교민주당 시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의료시설의 열악한 환경과 의료실태를 몰래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30분 만에 들통이나 병원에서 쫓겨났지만 이 30분짜리 필름으로 베르톨루치는 <가난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는 미니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그해 로마 시의회 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선거운동 중 공산당원들은 거리에서 즉석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는 그의 공식 작품목록에 기재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 <거미의 전략>과 <순응주의자>는 파시즘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각각 1970년과 1971년에 제작된 이 두 영화는 편집을 비롯해 영화 전반에 걸쳐 68년 혁명의 들뜬 분위기가 물씬 배어있는 작품이다.

   
  ▲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포스터
 

이어서 공개된 영화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면서 동시에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말론 브란도라는 대배우의 출연과 함께 적나라한 성적묘사는 이탈리아 국내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상영허가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크린에 걸린 나라들에서도 대부분 검열당국의 가위질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본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은 고사하고 검열당국이 존재하는 모든 필름사본을 폐기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법원은 베르톨루치의 공민권을 5년간 정지시키고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상영금지조치는 1986년까지 지속됐다. 이탈리아는 1970년에 이르러서야 이혼이 합법화될 만큼 가톨릭의 사회적 영향이 강한 나라다.

이때의 경험을 놓고 베르톨루치는 “나는 어떠한 형태의 검열에도 반대한다. 이는 내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할리우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출과 작품을 지지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이름의 검열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번에는 자본과 정치라는 다른 이름의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열에 맞선 오래된 투쟁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어 1976년 공개된 <1900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작이었다. 일단 영화의 시공간은 1900년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북부가 파시스트들에게서 해방되는 1945년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를 생략한 채 영화의 두 주인공이 노인이 되어 죽는 현재(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하드라마인 만큼 등장인물의 수도 엄청났다. 배역도 로버트 드니로, 제라르 드빠르디유, 버트 랭카스터, 도널드 서덜랜드 등 미국과 유럽의 쟁쟁한 스타들로 채워졌다.

이 장대한 이야기의 촬영을 마치고 베르톨루치가 편집한 필름은 상영시간이 5시간 18분이었다. 도저히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작자는 임의로 3시간짜리 편집본을 제작했다. 제작자에 의해 영화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르톨루치는 4시간 50분짜리 편집본을 만들어 대항했다.

결국 법원의 중재로 4시간 15분짜리 편집본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배급을 맡은 파라마운트가 4시간 15분도 너무 길다며 배급포기를 선언했다.

   
 ▲ 영화 <1900년> 포스터
 

영화가 깐느에서 공개되고 호평을 받자 미국 내에서도 개봉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우여곡절 끝에 파라마운트는 영화를 배급했지만 홍보를 거의 하지 않는 등 의도적으로 흥행실패를 유도했다. 평론가들은 “파라마운트가 <1900년>의 미국 개봉을 막기 위해 개봉했다”고 분석했다. 베르톨루치는 90년대 들어 5시간짜리 감독 편집판을 복원했다.

<1900년>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같은 날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알프레도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올모, 두 친구를 통해 이탈리아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시도였다.

올모는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스트 빨치산이 되고, 알프레도는 신분과 상황에 밀려 파시즘을 돕게 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농장 관리인 출신이며 자발적인 파시스트인 아틸라가 있다. 마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구조다.

베르톨루치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바쳤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1945년까지 파시스트에 의해 점령돼 있던 이탈리아 북부가 해방되던 날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파시스트의 앞잡이들을 체포해 인민재판을 여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그것도 다름 아닌 공산당에 의해서 말이다.

공산당은 1945년 당시 당은 인민재판을 지시한 적이 없으며 또한 실재로 재판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당은 반파시즘 투쟁을 통해 지배계급을 전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며 영화를 부정했다. 공산당 계열의 출판물들은 무시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에 대해 침묵했다.

70년대 후반 이탈리아공산당은 독자적인 집권노력을 포기하고 기민당과의 대연정을 성사시킨다는 이른바 ‘역사적 타협’을 추진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선거에서 공산당이 다수파가 되지 못하는 현실과 설사 성공한다하더라도 칠레처럼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에서 나온 노선전환이었다. 그런 사정 속에서 부르주아의 심기를 건드리는 영화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공산당 우파의 지도자였던 조르지오 아멘돌라는 공개적으로 <1900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데 대해 베르톨루치는 “당신들은 1945년에 지배계급을 심판할 힘도 없었고,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영화 속에서 처단 장면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됐는지 그는 1978년 무렵 탈당했다. 베르톨루치는 후에 공산당뿐만 아니라 부패와 냉소주의가 만연한 이탈리아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과거를 부정하는 공산당에 실망

<1900년>으로부터 10년 뒤 베르톨루치는 중국으로 날아갔다. 중국 당국이 할리우드 자본에 자금성 촬영을 허용한 것은 그의 마오주의 배경과 인맥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나도는 가운데 <마지막 황제>는 <1900년>보다 더 큰 규모로 제작됐다. 당시에는 영화 속에서 묘사된 중국혁명, 문화혁명 등을 통해 여전히 베르톨루치가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동양적 신비주의에 경도되고 있었다.

<

   
 

마지막 황제>이후 그의 영화 경력은 종종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티벳불교를 다룬 <리틀 부다>에 이르러서는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확실히 그의 시선이 60~70년대의 영화들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영화 외의 부분에서도 드러났다. 지난 200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영화에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지 않는다. 그건 우체국의 역할이다”고 밝혔다.

90년대 후반,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베르톨루치는 두가지 계획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1945년으로 이야기가 끝난 <1900년>의 후속편을 찍고 싶다는 것과 그에 앞서 68년을 다룬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68년의 아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부모 세대임에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 모른다. 요즘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통해 이상과 반항의 68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자주 내비쳤다.

아마도 지난 2003년 개봉한 <몽상가들>이 바로 ‘68년으로 돌아가기’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몽상가들>을 완성하고 나서 그는 60년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젊은 우리들은 그 시절 미래에 대한 확신했고 희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세상을 꿈꾸고 또 바꿀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빠진 것이 이런 상상력이다.”

이 영화를 통해 베르톨루치는 오랜 우회 끝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다룬 주제와 장소(파리)로 돌아왔다. 이제 그에게 남은 다른 반쪽의 계획은 1945년 이후 이탈리아의 현대사, 특히 60년대 격동하는 이탈리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는 무엇보다도,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