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오마이스 지나간 후
    [낭만파 농부] 팬데믹의 어떤 낮술
        2021년 08월 25일 1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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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 오마이스는 다행히도 수굿하게 지나갔다. 태풍이 지날 때면 지붕과 뒷산 수목들, 그리고 땅바닥에 퍼부어대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이 깨서는 밤새 뒤척이게 마련인데 이번엔 이른 아침에 고이 눈을 떴다. 온라인에 접속해 ‘태풍경로’를 뒤져보니 동해 바다에서 온대 저기압으로 변질돼 소멸됐다는 뉴스가 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고 바람까지 불어 유리창에 줄줄이 흘러내린다. 이내 마음이 심란해진다. 지금은 벼이삭이 한창 고개를 올리고 가루받이를 하는 철, 출수기다. 벼는 ‘자가수정’을 하는 식물이고 날씨가 좋지 않아도 낱알 껍질 안에서 수분이 이루어진다지만 비바람이 거세면 아무래도 이로울 게 없다. 자연스레 두 달 남짓 장마가 이어지고 출수기에 태풍이 잦았던 지난해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지금껏 태풍 하나 없이 지나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지난해의 재난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날씨는 내내 순조로웠지. 물이 아쉬울 때마다 비도 적당히 내려주고, 무척 덥긴 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던 편이고.

    그리 넋 놓고 있다가 느닷없이 태풍을 맞았으니 마음이 어수선할 밖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내리 나흘째 비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수정불량으로 소출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병충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이렇듯 수심 가득한 아침나절이 흐르던 때 온라인 채팅방에 ‘벙개’가 뜬다. ‘태풍도 지나갔으니 낮술이라도 한 잔?’

    여부가 있나. 앞뒤 안 재고 오케이 사인을 보내놓고 나니 일이 간단치가 않다. 빗줄기는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비를 뚫고 나갈 일이 걱정이다. 또 하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뒤꼭지가 당기는 거라. 이제 만성이 될 만도 하건만 상황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해온 당국의 방역 가이드라인이 헷갈려온다. 4명 이하였던가? 아니 8명이던가? 어쨌거나 채팅방에 초대된 숫자는 그 밑이니 상관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팬데믹 상황이 2년 가까워 오면서 우리의 삶이라는 게 많이 헝클어졌음을 절감한다. 그러려니, 어쩔 수 없겠거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세월로 쌓이고 어느 순간 되짚어 보면 ‘이게 사람 사는 꼴인가’ 싶어지는 거다. 낮술 자리 하나도 이리저리 따져봐야 하는 노릇이라니.

    그러는 사이 갑자기 비가 멎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빛까지 비친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지난 사나흘 빗줄기에 갇혀 두문불출했던지라 벼 포기의 안부부터 챙기게 된다. 열 군데 가까이 흩어져 있는 그 많은 논배미를 다 둘러볼 시간은 없고 읍내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두 배미만 스치듯 훑어본다. 벼이삭은 거의 다 올라왔고 비바람의 피해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술맛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다행히 오마이스 피해가 별로 없는 논배미 모습

    낮술은 누가 뭐래도 청요리에 센 술이다. 중국음식점 방안에 자리를 잡고 생각해보니 낮술도 참 오랜만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 놈의 코로나 탓인 게지. 그 얘기부터 시작해 그새 나누지 못했던 이런저런 사연들이 꼬리를 문다. 누구네가 새로 집을 사서 이사를 했는데 수리비가 장난이 아니라는 둥, 논배미 수로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깨지는 바람에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그걸 보수하느라 사나흘 고생을 했다는 둥, ‘노후대책’으로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따느라 팔자에 없는 시험공부에 실습학원을 다녔다는 둥 모두가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화제의 주인공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뭐해? 날씨도 궂은데 한 잔 어때?” 바쁜 놈은 손사래 치고, 한가한 놈은 이게 웬 떡이냐고 한걸음에 달려온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아낙은 오늘 아침 코로나 백신을 접종했다고 금세 자리를 뜰 기세다. “먼 소리? 고량주 몇 잔은 백신접종 후유증에 특효약인디…” 술잔을 들이밀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훤한 한낮, 취기가 돌수록 자리도 흥청거린다. 그러나 세상을 들었다 놓고, 때로는 싹 쓸어 엎었다가 다시 세우는 따위의 ‘쓰잘데기 없는’ 얘기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 또한 팬데믹에 억눌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어 시간이 흐르니 얼큰하게 술이 오르고 주인장 눈치도 보이니 늦은 점심을 들고 자리를 파한다. 아쉬움이 남으면 남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입가심을 한 뒤 흐물흐물 손을 흔들며 저마다 집으로 향한다. 그 때까지도 하늘을 말짱했던가, 아니면 빗낱이 조금 떨어졌던가.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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