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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회의 ‘아픔’,
    인류학의 시선으로 보다
    [책소개] 『아프면 보이는 것들』(제소희, 김지원 외/ 후마니타스)
        2021년 08월 07일 08: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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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면 보이는 것들』(부제: 한국 사회의 아픔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은 의학이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아픔’을 인류학의 시선으로 톺아보는 책이다. 의료인류학연구회에서 활동하는 열세 명의 필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만난 ‘아픔’을 가진 삶들을 경유해 다양한 주제들을 사례 중심으로 살핀다. 이들이 만난 의료 대상에서 배제되거나 존엄하게 살 기회를 박탈당한 삶들은 불평등과 차별,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1부 “아픔의 경험이 연결하는 관계들”은 산후풍, 가습기 살균제 참사, HIV/AIDS, 난임, 희귀난치성 질환(지중해빈혈)을 통해 아픔의 관계성을 다룬다. 2부 “아픔의 구조가 드러내는 문제들”은 중증 환자의 병원 사망 경로, 조선족 간병사의 돌봄 노동, 의료와 근대성의 역학, 사회적 고통으로서 세월호 참사를 들여다보며 아픔을 만들어 낸 구조를 분석한다. 3부 “아픔의 경계가 던지는 질문들”은 장애, 성매개감염(HPV), 국가유공자, 흡연을 소재로 아픔이 경계 지은 것들을 살핀다. 당사자들이 들려주는 서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의학의 기술적 진보나 법·등록제·가이드라인 같은 정치적·제도적 장치에 포섭되지 않는 아픔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아픔은 개인과 가족이 알아서 감당할 문제로 미뤄지거나, 부당한 낙인으로 공격받거나, 정치의 무능 또는 무책임으로 고통이 가중되거나,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을 초래하게 된 것들이다.

    “난 아니에요? 난 왜 아파요?”
    의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아픔

    ‘산후조리를 못해 걸리는 병’ 산후풍은 오랫동안 심리적 문제나 노화, 근육통, 기능 저하 등의 다른 병/문제로 여겨지면서 인정받지 못했던, 또 난치병·불치병이라는 속설 때문에 환자 자신도 치료를 기대하지 않았던 ‘아픔’이다. 출산하자마자 고된 노동으로 내몰리며 미역국 한 그릇 떠먹지 못한 노년 여성과1980년대 가족과 격리된 채 수술실에서 간호사의 꾸중을 들으며 제왕절개 출산을 한 여성과 IMF 시기 출산휴가를 엄두 못 낸 여성의 산후풍은 다 다르지만, 이들의 질병 서사에는 모두 임신·출산을 둘러싼 한국 여성의 위치와 사회적 맥락이 반영돼 있다. 산후풍은 한국의 출산 장려 정책이 한의학으로 확대되면서 한의학의 질병으로 포함됐고, 증상과 치료법이 표준화된 치료 가능한 증후군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 현상과 맞물려 의료화된 산후풍 치료가 산욕기 여성 위주로 구성된다면, 중년·노년 여성의 산후풍은 또다시 잊히고 만다(1장 「산후풍의 바람風, 그리고 바람望」).

    “온 세상이 내게 죄 지었다고 외치는 느낌”
    감염자는 반드시 그럴 법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

    병원에는 의료 종사자의 안전을 위한 “표준주의 지침”이 있어 환자가 누구든 이 원칙을 지켜야만 한다. HIV는 이런 표준주의 지침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질병이지만, 지금도 진료받는 감염인의 의자 전체를 비닐로 싸 놓거나 감염인이 사용하는 식기나 침상에 따로 표시하거나, 심각하게는 감염인의 수술이나 입원을 거부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2016년 “한국 HIV/AIDS 낙인 지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102명의 감염인 응답자 가운데 64.4%가 죄책감을 느끼며, 50%가 수치심과 낮은 자존감을 느낀다. 동일한 조사에 응한 다른 5개국(태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우간다, 독일)에서 독일 감염인 31.2퍼센트가 수치심을, 남아프리카공화국 감염인 14.5퍼센트가 죄책감을 느낀다. 필자(서보경)는 유병률이 낮고 치료가 보편화된 한국에서 왜 유독 광범위한 자기 부정성이 나타나는지 질문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운동의 “AIDS가 동성애자에 대한 형벌, 죽음의 천형”이라는 구호들, 메르스 사태와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경험한 패닉과 부조리한 반응들을 비춰 본다. “어서 감염자를 찾아내서 격리부터 하라는 요구, 감염자는 반드시 그럴 법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거라는 편견, ‘비정상적’ 사람들을 솎아 내면 사회가 다시 안전해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그리고 질병과 고통의 경험을 스캔들화하는 언론의 태도”는 HIV/AIDS를 통해 너무나 익숙해진 한국 사회가 “전염병을 다루는 방식”이다(3장 「당신이 내게 남긴 것」).

    “여자로서 임신은 가장 큰 축복이잖아요.”
    ‘아이 없음’의 ‘비정상’에서 벗어나기

    난임은 “1년이나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피임을 하지 않는 정상적인 성관계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임신이 이뤄지지 않는 생식 계통의 질병”이다. 보조생식기술의 발전으로 ‘불임’은 ‘난임’이 되었다. 현재 난임 치료의 목표는 생식 기능의 회복이 아니라 ‘아이 없음’을 해결하는 것이며, 당사자는 검사 결과 문제가 없더라도 임신·출산에 성공할 때까지 난임 환자로 규정된다. 난임 여성들은 임신·출산에 성공하면 사회적 정상성을 얻는 듯하지만, 자신의 임신 기능이 회복되지 않고 다만 기술로 대체됐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출산이 사회 유지의 과제로 여겨지는 지금, 기술이 주도하는 ‘재생산’ 영역에서 난임 부부들은 난자·정자를 제공하는 몸으로, 배아를 양육하는 인큐베이터로 수단화된다. 의료화된 난임 속에서 ‘아이 없음’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겪는 아픔은 한국 사회에서 강화된 ‘아이 없음’의 ‘비정상’성과 무관하지 않다(4장 「아이 없음의 고통」).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 자체가 도전”
    더 나아질 것 없는 상태로 삶을 이어 가다

    지중해빈혈은 헤모글로빈 단백질을 만드는 DNA 염기서열 변화로 적혈구가 파괴되는 희귀 유전병이다. 지중해빈혈 환자 J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실로 가득하다. 그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오랜 입원 후 집에 돌아와 보면, 집이 작아졌고, 부모가 운영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1990년대 한국은 희귀난치성 질환자와 그 가족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부실했고, ‘전 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도 많은 가정이 의료비로 인해 파산했다. 199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는 사회복지 체제의 미비로 연계됐고, 이런 상황은 J의 신체적 취약성, 가정의 경제적 취약성과 맞물려 J의 질병 경험을 더욱 악화시켰다. 질병으로 인해 그와 가족은 가난해졌고, 직장을 구해 돈을 버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 나아질 것 없는 상태가 그와 가족의 현재가 되었다. 해외에는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을 위한 네트워크가 다양해, 그를 통해 교류하거나 의학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등의 시도가 많지만, 한국에는 이런 네트워크가 전무하다. 그러나 치료에 관한 의학적 연구 못지않게 긴급한 것은 질환자들의 삶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공유의 채널이다(5장 「한 희귀난치 질환자의 삶과 연대」).

    “좋은 죽음”
    죽음은 법이 정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생사다. 1995년 전체 사망자 중 66%가 집에서 죽고 22.8%이 병원에서 죽은 것에 비해, 2018년 전체 사망자 중 76.2%가 병원에서 임종했다. 필자(강지연)는 중증 환자 A를 통해 그가 지역 거점 병원에서 서울의 종합병원 응급실로, 말기 병동으로, 호스피스로 옮겨 가는 죽음의 경로를 쫓는다. 중증 환자들은 소수의 서울 상급 병원에 쏠리고 병동이 부족해 응급실에서 장기간 대기하지만 지역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겨우 들어간 병동에서 쉽게 퇴원하기 어렵다. 비용뿐 아니라 간병을 가족이 분담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들은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고 말기 고지를 해야 하는 부담도 갖는다.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어 대신 연명의료에 관한 결정을 하러 가족 ‘전원’이 모이는 동안 연명의료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또 호스피스로의 전원 과정 또한 간단치 않다. 필자는 “의학이 CPR, 인공호흡기, 집중치료 시설, 장기이식술 등을 발전시키는 동안 특정한 죽음이 생겨났다”면서 의료화된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대항적 시도들, 법적 장치들이 반드시 이상적인 죽음을 답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병원 조직과 의료 시스템 내에 짜인 견고한 죽음의 경로 너머, 다양한 출구와 우회로가 생겨나야 한다(6장 「법이 결정해 주지 못하는 것들」).

    “어떻게 보면 내가 죽였다고도 볼 수 있잖아요.”
    부모이자 피해자로 살아가기

    “안방의 세월호 참사”라고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다른 대규모 참사와 달리 각 가정의 안방에서 발생한, 목격자 없는 재난이다. 가습기 살균제가 최초 출시된 1994년부터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이 알려진 2011년까지 17년이 흐른 뒤에야, 피해자들은 사후적으로 추적해 가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스스로 증명해 내야 했다. 판정 과정에서 구제 대상이 된 피해자와 달리, 그러지 못한 피해자는 의학과 법에서 규정한 인과관계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존재로 의심받는다. 부모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피해 신고” “아이를 담보로 한 보상 요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갓난아기를 부검하는 것이 부모로서 좋은 애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부모 피해자나 제 손으로 넣은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자식을 아프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 피해자들은 피해 인정을 위해 계속 투쟁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간다. 부모-자녀라는 친밀한 관계가 재난 발생 장소가 되었다는 이 비극은 부모 피해자들에게 좋은 부모이자 정당한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부가한다(2장 「부모이자 피해자로 살아가기」).

    “이용할 사람이 없어서 이런 아픈 사람들을 이용한 거구나.”
    국가와 제도 권력이 가중해 온 고통

    전 국민, 아니 전 세계가 목도한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책임 당사자들의 무능력과 책임 회피를 반복적으로 겪으며, 우연적이고 어쩔 수 없는 경험으로서의 ‘사고’가 아니라 사실 확인이 요구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이는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관음증적 폭력을 행사한 언론, 정치적 프레임을 이용해 공동체가 분열하게 만든 정치인, 무능하고 무책임한 학교, 정치적 회피 속에 피해자들이 부가적 폭력을 경험하게 한 의료 전문가 모두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고통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이현정)는 세월호 참사의 고통이 “제도적이고 정치공학적 요인에 의해 배가되고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고통”이라면서, “만일 없어도 될 고통이 경험되거나 굳이 더 잔인하게 경험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까닭이 우리 사회의 국가와 제도 권력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폭력적인 특성 때문이라면 되돌아보고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9장 「무엇이 사고를 사회적 참사로 만드는가」).

    “네가 장애인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되잖아?”
    장애의 증명과 조정을 요구하는 사회

    2016년 서울 강서구의 한 특수학교 건립 과정에서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 앞에 무릎 꿇었던 학부모들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특수교육을 받는 장애인에 대한 시선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장애로 인해 대안 교육이 필요한 학생이나 부모들은 장애인이라는 낙인을 공식화한다는 점, 특수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틀에 갖힌다는 점 때문에 특수교육 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특수학교에 가서도 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완화되지 않는다고 느끼기에 부모들은 자녀에게 적합한 교육기관을 계속 찾아다닌다. 한국 장애인 복지 제도의 특징적 요소인 장애 등록제와 장애 등급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특히 병역), 필요한 순간엔 장애를 증명하면서 일상에서는 장애가 없는 것처럼 조정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기도 하는 모순으로 작동한다. 한국 사회는 장애에 관한 사회적 역할을 고찰하지 않으면서, 장애인 당사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강요하고, 스스로 ‘정상적’인 개인에 대한 허상의 기대에 집중하게 만든다(10장 「나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이름표」).

    “앞으로 내가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건강의 위기뿐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다

    흔히 ‘성병’이라고 불리는 성매개감염 중 사람유두종 바이러스(HPV) 감염은 무척 흔하고, 특정 증상이나 통증 없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것이지만, 자궁경부암의 주요 원인인 것과 사회적 낙인 때문에 과도한 불안을 초래한다. 실제로 한국의 성매개감염 가이드라인은 성매개감염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위험 인자’의 예로 “마약 중독자, 성 접대부, 길거리 청소년, 익명의 성 파트너”와 같은 용어를 사용해 보건 의료 영역이 가진 사회적 낙인을 드러냈다. 필자(김보영)는 성관계를 중단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성애 관계에서 일어나는 권력관계나 폭력의 문제를 간과한 채, ‘섹스하지 않아야 한다’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조언만 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면서, 여성의 성적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기 어려운 조건과 요인을 파악하고 성매개감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해, 감염에 대처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11장 「성개매감염 경험이 말해 주는 것」).

    “일반 장애인들은 자기들이 잘못해 다쳐 가지고 말이지.”
    ‘손상된 몸’을 둘러싼 상징 투쟁의 현장

    복지 제도도 민주화된 제도도 없던 전후 한국에 의료화보다 먼저 상륙한 것은 반공과 국가주의 질서였다. 전쟁에 참전했던 상이군인들이 낙인을 해소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공 국가주의에 순응하는 ‘성스러운 몸’ ‘국가화된 몸’을 체화해 원호와 보훈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장애인 집단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의 이념이 ‘손상된 몸’을 둘러싼 상징 투쟁의 장에 새롭게 등장하면서 상이군인들은 체화했던 국가주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같은 절단 장애인데 누군가는 ‘5·18 1급’, 누군가는 ‘한국전쟁 2급’으로 국가에 호명되고 맥락화되면서 이 손상된 몸들은 서로 반목하게 된다. 국가주의와 냉전이데올로기의 체화, 민주화를 둘러싼 상반된 이해, 소수자 권리 보장에 대한 의견 대립이 뒤엉킨 한국 사회에서 이 ‘손상된 몸’들의 연대를, 아픔과 아픔의 대립을 넘어선 화해를 이루기 위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12장 「‘성스러운 몸’과 ‘무의미한 몸’」).

    “뭐가 좀 잘못 되면 다 우리 잘못이 되거든요.”
    생명정치의 필수적 주체이자 생명정치 권력의 도구

    2000년대부터 한국 사회는 장기 요양 병원의 수요와 공급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에 발맞추어 보건복지부는 포괄수가제 도입을 전면화하고 2008년 1월 1일부터 의료 체계를 급성기의 행위별 수가제와 요양(만성기)의 포괄수가제로 이원화하기에 이른다. 건강보험 제도의 변화는 의사로 하여금 비급여(보험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 진료를 늘려 운영의 활력을 찾게 하므로, ‘요양(만성기) 보험 및 포괄수가제’는 장기 입원 환자들에게 공여되는 의료비를 절감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의료 시장 내 경영 논리와 포괄수가제의 저가형 체제 보존을 위한 저임금 노동력 선호의 맥락, 업무 특성상 한국어 소통이 중요하다는 맥락, 그리고 2008년 조선족들에게 열린 방문취업제 시행까지 맞물리면서 조선족 간병사들이 급부상했다. 노동시장 상황에 맞게 저임화된 이들의 간병 노동 없이 장기 요양 병원 시스템의 존속이 불가능함에도 이들의 노동 현실은 열악하다(7장 「돌봄 노동과 생명정치」).

    “신세계예요. 자유로워지고 대인관계도 좋아졌어요.”
    낙인의 시선을 가르는 ‘오염’의 기준

    콜센터 밖에서 7% 정도인 여성 흡연율은 콜센터 안에서는 40%에 육박한다. 여성 흡연의 의학적 해로움은 여성의 위치와 상관없이 동일하지만, 여성 흡연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콜센터라는 특정 공간에서 해체되는 경향을 보인다. 고용주 측은 과다한 감정 노동에 탈진된 상담사들의 감정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 그들의 흡연 습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담배 없는 거리’ 정책으로 입지를 잃은 흡연자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덜 준다’는 명분으로 신종 담배(궐련형 전자담배)로 바꿔 자기 위안을 삼는다. 담배의 유해성은 여전하지만, 신종 담배 사용자에게는 가정에서 불편을 끼치지 않거나(주로 남성)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만 피할 수 있다면(주로 여성)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의학적 근거들이 정책을 거쳐 일상의 영역으로 확대될수록, 낙인적 시선은 더 낮은 계층으로, 더 열악한 국가로 집중된다. 흡연의 의학적 해로움을 강조하는 의료화 관점을 넘어, 담배에서 흡연자로, 흡연자에서 흡연하는 사람 자체로 옮겨 가는 낙인적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3장 「오염의 경계선 찾기」).

    우리는 누구나 감염될 수밖에, 아플 수밖에 없다
    아픔으로 시작될 수 있는 치유와 연대에 관하여

    “코로나19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대 의학이 초월적 힘이라도 발휘하기를 바란다. 백신과 치료제를 하루빨리 개발해 인류를 구원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 개개인이 겪는 아픔을 치료하고 고통을 완화시키더라도, 아픔의 경험이 남긴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한다. 의학적 치료는 유한하고 때가 되면 종결되지만, 아픔은 많은 경우 당사자나 그 가족의 몫으로 남는다. … 이 책은 현대 의학 너머 이해되지 못한 아픔들에 다가가기 위해 기획됐다. … 특히 의학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아픔과 함께 고립된 채 살거나, 적확한 의학적 개입을 받을 기회가 없는 이들과 연대하는 데 이 책이 하나의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서문」)

    폐렴인 줄 알고 입원했다가 하루아침에 HIV 확진자가 되어 창고로 내몰린 박수인(가명) 씨는 죽음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루는 창고를 드나들던 간호사에게 “에이즈에 걸린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긍정적으로” 답해 주었다. 박수인 씨는 그 순간이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30대 초반 갑작스런 경력 단절을 겪은 그는 두 번 다시 정규직이 되지 못했지만, 20년이 넘는 지금껏 치료받으며 제 조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거동이 어려운 HIV 감염인이나 간병이 필요한 이들을 방문해 지원하는 활동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다(3장 「당신이 내게 남긴 것」).

    그 누구도 대기업에서 개발해 버젓이 광고한 가습기 살균제가, 슈퍼에서 누구나 살 수 있었던 일상적 화학용품이 가족의 건강과 생명을 앗아갈 줄 몰랐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일상에서 계속적으로 피해를 확인하며 스스로 피해 사실을 증명해 내라는 요구를 받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부모 피해자들은 2019년 숨표합창단을 만들어 함께 노래 부른다. 누군가의 벅찬 숨소리나 산소 발생기가 내는 기계음까지 모여 합창을 이룬다(2장 「부모이자 피해자로 살아가기」).

    의학의 발전밖에는 무엇도 기대할 수 없었던 지중해빈혈 환자 J는 그에게 주어진 생의 마감 시간을 훌쩍 넘겨 살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는 3개월에 한 번 입원해 수혈과 내시경 조영술을 받아야 하는 몸이지만, 어렵게 얻은 삶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쓰고 싶었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NGO 활동을 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경험했던 그의 아픈 몸(의료적 소외)은 아프리카의 아픈 몸(사회경제적 소외)과 만나게” 되었다(5장 「한 희귀난치 질환자의 삶과 연대」).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감염될 수밖에, 아플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아픔’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치유와 연대를 모색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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