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로멕의 집과 우리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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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04일 11: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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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로멕을 만난 것은 1997년 폴란드의 크렘프나에서 영어 교사로 일할 때였다. 크렘프나는 폴란드의 남쪽 끝자락의 산악지역에 위치한 가장 고립된 지역이다. 그곳에서 로멕은 물리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털복숭이의 사나이로 긴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얼굴의 반을 뒤덮고 있었다. 거기에다 안경까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언제나 예리한 광채가 빛났다. 그가 크렘프나에 들어온 것은 히피운동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할 시절인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폴란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거대한 히피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당시 폴란드 젊은이들을 지배했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 전야의 지식인들이 ‘인민 속으로’의 기치를 내걸고 시골로 들어갔던 운동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는 30년 전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서 크렘프나로 왔다. 교사 자리는 얻었지만 처음에는 살 곳이 마땅찮아 이리저리 배회하는 신세였다. 물론 그의 심경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결혼이었다.

    사무원으로 일하던 부인을 만난 뒤 집단농장이 있던 작은 마을 ‘오젠나’의 낡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아기가 생기면서 집단농장의 아파트는 자식을 키우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장소로 변해갔다.

    우선 집단농장이 문을 닫으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 모두가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이 때문에 주위는 허구한 날 삶에 지친 아낙네들의 원망과 술에 찌든 남자들의 고성소리가 오고 갔다. 몇 가족은 벌써 ‘운 좋게’ 모두가 바라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동네는 점점 삭막하게 변해갔다.

    그 곳은 더 이상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로멕은 집을 짓기 위해 그 동안 저축했던 돈을 모아 땅을 샀다. 세상의 끝이니 집 지을 땅이야 적은 돈을 지불하고도 장만할 수 있었다. 땅은 장만했다 치더라도 우선 집의 기둥을 세우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 자재를 사는 것도 큰 문제였다. 1990년, 그는 인생에 있어서 큰마음을 먹었다.

    그곳에서 집을 지어 올릴 자재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일 년간 휴직한 뒤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그에게는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집이 그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했기에 텔아비브의 한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년 동안 일하여 집 지을 재목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뒤 중동에 전쟁이 터졌다. 바로 1차 걸프전이다. 1991년 1월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개시했고 이스라엘은 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라크에서 날아온 미사일들이 이스라엘 땅에 떨어지면서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들은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스라엘에 돈벌이를 하기 위해 왔다가 갑자기 전쟁을 맞은 로멕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그는 폴란드로 돌아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비행기 자체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며칠을 기다려 비행기 대신 긴급히 마련된 배로 터키까지 갔고,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폴란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몇 달 동안 이스라엘에서 벌었던 돈은 모두 뱃삯과 비행기 삯 등 여행 경비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이런 모험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한 노력은 포기하지 않았다. 폴란드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리스로 내려갔다. 이곳에서도 식당의 주방에서 일했다. 그리스의 무더운 여름과 싸우면서 석 달 동안 일해 모은 보수를 들고 와서는 땅을 파고 기반을 놓고 기둥을 놓기 시작했다. 그의 집은 이렇게 시작됐다.

    가장 기본적인 자재는 구입했고 그 다음부터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서서히 집을 지어나갔다. 매년 여름방학이 올 때마다 그는 계속 그리스나 이스라엘로 일하러 나갔다. 이렇게 한 해 두 해가 가면서 집의 겉모양도 아름답게 완성돼갔다. 학교의 일을 마치고 시간만 나면 집에 가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설계를 하고 못을 쳐 집을 지어 올렸다.

    그가 내게 보여줬던 집은 언덕 위에 아담하게 서있었는데 내부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3개의 방과 거실을 들인 거의 40평 정도 되는 집이었는데, "4년 안에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해머를 쥔 손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그곳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2003년, 크렘프나를 다시 방문했다. 이미 완공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그는 자랑스럽게 나를 새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완공된 그의 집을 방문하던 순간은 너무도 소중한 추억거리로 내게 남아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자신의 집을 손수 지어 올렸고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그가 너무나 위대하게 보였다.

    로멕의 집에 얽힌 얘기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폴란드란 나라에서도 가난한 교사가 집을 한 채 장만하기 위해서는 일생을 건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로멕의 집은 로멕의 삶이 얽힌 역사적 유산으로서 그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기억될 것이다.

    로멕과 그의 집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투기 문제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투기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집들을 천박하게 만들었고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겨왔다.

    투기꾼들 중에는 정부관료, 공무원, 자본가, 회사원, 법조인, 교수, 의사, 언론인, 교사 등 사회의 모든 계층과 직업을 총망라하고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들 중에는 과거에 민주화투쟁을 했던 이들도 적잖게 포함돼있다.

    이들이 집 투기나 땅 투기에 기를 쓰고 달려드는 이유는 집만 사놓으면 가만히 앉아서 수억을 거저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땅 투기나 집 투기를 통해 노동자들이 평생을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을 불과 수 년 안에, 아니면 몇 달 안에 벌어들이고 있다.

    더욱이 과거에는 투기꾼들까지도 투기를 부끄러워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재테크’란 말로 버젓이 포장되면서 경제활동의 한 부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로멕이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들어보였던 해머를 쥔 손을 생각할 때마다 투기공화국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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