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독립투사 김맥동과
    오동진 장군의 대한광복군총영
    [기고] 보훈처의 적극적 보훈행정을 촉구하며
        2021년 06월 28일 03: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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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주 : 아래 글은 항일독립투사 「김맥동」을 2018년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린 후손과 며칠 전 대담을 나눈 뒤 국가보훈처『공훈전자사료관』내 「독립유공자 공적 조서」와 「독립유공자 공훈록」, 그리고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뒤 작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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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독립투사 김맥동(金麥童)은 「대한광복군총영」 결사대원이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1920년 6월 남만주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조직된 항일무장투쟁단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총영장은 송암 오동진 장군이다. 오동진 장군은 민족주의계열 공화주의자로 만주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 오동진, 김동삼, 김좌진 가운데 한 분이다. 그러나 송암 오동진 장군에 대해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종 『한국사』검정교과서 어디에도 오동진 장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논문 한 편 없는 게 우리 역사학계 참담한 실정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길거리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8종 『한국사』검정교과서에 모두 실려 있고 논문도 많은 편이다. 일송 김동삼은 『한국사』일부 교과서에 기술돼 있다 논문도 몇 편 존재한다. 그에 비하면 송암 오동진은 완전히 잊힌 인물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고 18년 옥살이 끝에 1944년 충남 공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기에 대한민국엔 후손도 없다.

    ▲ 사진 설명 : [왼쪽]오동진 선생의 부인 회견기(<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 선생의 부인 “이양숙(李陽淑) 여사는 지금까지 자기 남편이 남의 손에 잡힌 줄도 모르고 있던 중, 최근에 신문지상으로 그 소식을 듣고 (중략)신의주로 와서 철창에 있는 오동진과 눈물겨운 면회를 하였다”고 한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오른쪽]’불굴의 투사’ 오동진 선생의 추모회 보도기사(<자유신문>, 1945년 12월 4일자)(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다른 항일독립투사들과 달리 송암 오동진 장군은 남과 북 모두에서 항일독립지사로 서훈을 받았다. 대한민국 현충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애국열사릉에 동시에 모셔져 있다. 물론 유해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상태이다. 오동진 장군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민족주의계열 항일독립지사이다. 그럼에도 북쪽에서 항일투사로 서훈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인 탓이다. 김형직이 일찍 사망하자 정의부 사령관 오동진 장군은 어린 김일성을 학교에 보내고 돌보아주었다. 바로 정의부에서 설립한 항일민족학교 「화성의숙」에 입학시킨 것이다.

    바로 그 오동진 장군이 남만주를 무대로 활약하던 대한청년단연합회와 대한독립단 항일조직 군사부를 통합해 세운 단체가 「대한광복군총영」이다. 1920년 6월 6일 조직된「대한광복군총영」은 압록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쉼없이 펼쳤다. 1920년 한 해 동안만 일제 군경과 치른 교전 기록이 78회에 달했다. 1920년 한 해 동안 56개 주재소를 공격했고 20개가 넘는 면사무소 등 식민통치 행정기관을 파괴했으며 제국경찰과 군인 95명을 사살했다. 그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오동진 장군이 사재를 털어 중국 단둥시 이륭양행을 통해 확보한 장총 240여 정과 탄약으로 무장했기에 가능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수시로 국내에 침투해 일제식민통치의 첨병 노릇을 하던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했다. 압록강 국경 일대 치안과 행정을 마비시킴으로써 일제 식민통치가 제대로 작동하질 못하는 무정부 상태를 연출했다. 나아가 「대한광복군총영은 일제 경찰과 밀정 등 친일분자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진 설명 : ▲ 오동진 선생이 총영장으로 활동한 <대한광복군총영>의 약장(1920년 7월 1일). <대한광복군총영> 약장은 제12장 33조항으로 구성돼 있고 1920년 7월 1일 제정되었다. 마지막에 대한민국 2년 7월 1일로 명기돼 있다.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김맥동은 바로 오동진 장군 휘하 「대한광복군총영」결사대원이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창설 직후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1920년 8월 14일 미의회 상하 의원과 가족 70여 명 등 100명이 넘는 의회 의원단 일행과 가족이 중국을 거쳐 조선을 방문한다는 첩보였다. 이에 「대한광복군총영」은 7월에 서울, 평양, 선천(신의주) 3개 지역으로 나누어 결사대를 급파했다. 1년 전 3‧1 만세운동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무너졌지만 2천만 조선 민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치열하게 독립을 향해 투쟁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미의회 의원단 일행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리하여「대한광복군총영」결사대원들 13명은 국경을 넘어 국내에 잠입하는 과정에서 친일파와 일본인 경찰을 사살하고 국내에 잠입했다. 총독부와 종로경찰서 등 일제기관을 폭파하려던 서울지역 결사대원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은 포목행상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숨긴 채 무사히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요리집 아서원에서 결의를 다지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러나 평양 시내에 잠입한 평양지역 결사대원들은 천신만고 끝에 투탄에 성공했다. 빗물로 인해 도화선 심지에 불이 붙지 않자 목표를 평양경찰서에서 평남도청으로 바꿔 투탄 끝에 일경 두 명을 처단했다. 평양지역 결사대원 중에는 임신한 몸으로 거사에 참여한 안경신 의사도 있었다.

    사진설명 : ▲ 안경신은 오동진 장군이 세운 「대한광복군총영」소속 평양지역 결사대원이었다. 참여 당시 안경신은 임신부의 몸이었지만 일제를 무력으로 응징하고자 했다.(출처 : 국가보훈처)

    신의주, 선천 지역을 맡은 결사대원 가운데 이진무와 정인복은 신의주역 철도호텔에 폭탄을 던져 시설 일부를 파괴했다. 선천지역을 맡은 임용일, 이학필, 김응식(김맥동으로 추정)은 신성중학교 학생 박치의의 도움을 받아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 제국주의를 무력으로 응징했다. 폭탄은 위력이 커 선천경찰서 내부를 폭파했다. 투탄 후 임용일과 김응식(김맥동의 추정)은 무사히 돌아왔으나 이학필과 박치의는 체포됐다. 박치의는 1년 뒤 17세의 나이로 평양감옥에서 처형됐다. 이 내용은 해방 후 반민특위가 친일경찰 이성근(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장)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을 당시 1949년 4월 2일 재판과정에서 이성근이 진술한 내용(「反民者罪狀記」)에서도 확인된다.

    친일경찰 이성근은 오동진 장군을 체포한 악질 고등계형사 김덕기의 상관이었다. 이성근은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6년을 재직할 당시 1년에 100건 안팎의 사건을 취급하며 300명에 이르는 항일독립지사들을 취조했던 인물이다. 그는 1920년 압록강변에서 활약하던 항일 독립투사들 12명을 체포해 처단하기도 했다. 6년 고등과장 재직 시에 오동진 장군이 지휘한 국내진공작전 가운데 7할 가량을 진압한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 대가로 충남 도지사로 승진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성근의 부하 김덕기는 오동진 장군을 체포한 인물로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부 주임 당시 자신이 체포한 항일독립투사들이 1,000명에 달했다. 그 중 10%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고 10%는 오동진 장군처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0년 이상 중형을 받은 항일투사도 10%에 달했다. 김덕기는 항일독립투사들을 극악한 고문으로 살해한 친일경찰 노덕술이나 주사기로 피를 뽑은 뒤 다시 항일투사의 몸에 뿌려대던 고문귀 하판락과 함께 일제 고등계 형사로서 악명이 하늘을 찔렀던 인물이다. 김맥동 옹 역시 1922년 피검돼 마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을 당시 비행기 태우기 고문 등 거꾸로 매달려 난타를 당했다고 했다.

    김맥동은 선천경찰서 투탄 사건 이후 「대한광복군총영」으로 귀환한 뒤 곧바로 그해 9월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 이번엔 군자금 모금과 국내 지하항일조직을 결성하려는 목표였다. 공작대상지역은 자신의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이 주 무대였고 거창도 공작 대상이었다. 김맥동은 지역 내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며 비밀결사조직을 기도했다. 그러한 활동 도중 1922년 4월경 마산경찰서 형사들에게 피검됐다. 『동아일보』 5월 7일자 보도내용을 보자.

    “마산경찰서에서 4월 28일 경에 마산부석정 마산여관에서 본적 함양군 안의면 이전리 김모(글쓴이 주 : 김맥동을 가리킴)를 체포하여 마산서에 인치하고 엄중히 취조한 결과, 그 사건이 중대하고 연루자가 각처에 벌려 있는 것이 발각되어 방금 연루자를 체포하기에 마산서에서는 크게 활동을 하는 중인데 현재 체포, 연루된 자는 밀양, 안의 등지 사람이 사오 인이라 하며 그 내용은 비밀에 부처 있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규모의 군자금 모집에 관한 사건인 듯하다더라.”

    – 『동아일보』. 「군자금 모집에 연루된 듯한 《중대 범인 체포, 마산서의 활동》」 . 1922년 5월 7일자 3면 4단 기사.

    『동아일보』5월 19일자 보도에선 체포한 날을 4월 12일로 기사화하고 있다. 당시 일제가 항일독립운동 등 사상범 보도를 몇 개월씩 통제하던 것을 생각하면 5월 19일자 보도가 정확한 것 같다. 4월 28일이 아니라 4월 12일에 김맥동은 마산여관에서 피검됐다. 5월 19일자 보도 당시 검사국으로 압송한 두 명의 인적 사항이 적혀 나오는데 함양 출신 김맥동(당시 28세) 이외에 밀양 출신 주순조(당시 52세)도 성명과 본적을 보도하고 있다.

    2019년에 발간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24권에는 김맥동은 23살인 1918년에 중국 남만주로 망명해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20년 7월 「대한광복군총영」결사대원으로 국내에 급파된 걸로 나온다. 그리고 “1920년 8월 정인복(鄭仁福) 등과 함께 신의주경찰서 및 신의주역사(新義州驛舍) 폭파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라고 기술돼 나온다. 관련 자료가 미비하여 독립운동가 김맥동 옹 후손의 진술에 의존한 듯하다. 김맥동 옹은 신의주, 선천지역 결사대원으로 참여한다. 그 중에서도 임용일, 이학필과 함께 선천지역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을 폭파하려는 임무를 맡았다.

    결사대원 가운데 김응식은 김맥동의 이명으로 추정된다. 다른 항일독립투사들처럼 김맥동 옹도 이명이 있었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김맥동의 이명으로 김응수, 김성열이 나온다. 김맥동 독립유공자 후손은 이명이 4가지였다고 언급했다. 사망 시점도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1980년 1월 14일이 아니라 1977년 말이나 1978년 초로 추정했다. 왜냐하면 김맥동 옹이 노년기 10년 정도 치매 증세로 대소변을 후손들이 받아냈고 사망신고를 뒤늦게 했기 때문이다. 김맥동 옹의 손녀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김맥동 옹이 작고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함양군 안의면 몰락한 가정에서 병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대한광복군총영」신의주-선천 지역 결사대원으로 참여한 이후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 모금 활동과 지하비밀조직을 결성하려던 항일 운동 일체에 대해 후손들은 김맥동 옹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고자 했으나 김맥동 옹이 극구 거부했다고 한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김맥동 옹은 항일독립운동에 나서던 1920년 당시 경남 함양과 거창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본인 또한 경찰서와 검사국에서 고초를 겪은 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항일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못내 씁쓸했다.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전 재산과 생명을 바쳐 항일투쟁에 나선 독립운동가들을 국가는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예우를 다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 보훈행정의 기본이자 국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조치이다.

    부끄럽게도 김맥동 옹은 해방된 지 73년만인 2018년에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인정받았다. 가장 낮은 훈격인 7등급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은 것이다. 문제는 김맥동 옹의 항일독립운동 흔적을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수행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김맥동 옹의 후손이 20년에 걸쳐 대학도서관, 국회도서관, 독립운동사 전공 학자. 향토사학자, 국가기록원을 이리저리 발로 뛰며 자료를 찾아다닌 결과였다. 물론 시간과 경비를 모두 감당한 결과였다.

    『동아일보』5월 7일자와 5월 19일자 기사도 독립유공자 후손이 경북대 도서관과 영남대 도서관에서 여러 차례 검색한 결과 발굴한 자료들이다. 아직 어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지, 그리고 수형기록조차 찾질 못하고 있다. 「대한광복군총영」기록도 남아 있는 게 없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도 ‘김맥동’에 대한 자료가 하나도 없다. ‘김맥동’을 입력하면 1930년대 초 전남지역에서 활동하다 피검된 ‘김백동’(金百東)만 검색될 뿐이다. ‘김백동’(金百東)은 1930년대 초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독립투사이다.

    이제 대한민국 보훈 행정은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보훈행정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공훈 발굴 인원이 부족하거나 심사위원의 능력이 부족하면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연구 인력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적은 인원과 예산 타령으로 항일독립투사들의 빛나는 발자취를 70년이 넘도록 망각 속에 방치하는 건 제대로 된 국가보훈행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보훈 정책이 적극적인 방향으로 180도 방향 전환을 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소개
    '우리역사에서 왜곡되고 사라진 근현대 인물한국사'(2021)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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