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릴린 몬로 '남편'이 빨갱이라고?
    By
        2006년 11월 23일 11:2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그 동안 잠시 연재가 중단됐던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가 다시 시작됩니다. 아서 밀러를 시작으로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졌으나, 그들의 사회주의적 가치 지향과 관련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아서 밀러 하면 사람들 머리 속에는 어떤 것들이 먼저 떠오를까.

    우선 <세일즈맨의 죽음>이 가장 많을 테고, 이어서 마릴린 몬로의 남편, 자본주의 미국의 명암을 그려냈던 극작가 정도의 순일 것이다.

    2005년 2월 타계했을 때 국내 언론들은 아서 밀러가 “자본주의의 타락을 그린 문제 작가이기는 했지만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고 강변하기에 바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를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힘들여 부인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같은 시기 전 세계의 좌파 신문들은 이 ‘사회주의자의 죽음’을 추모했다.

    세계가 추도한 사회주의자의 죽음

    1915년 뉴욕에서 출생한 아서 밀러의 가정은 대공황으로 몰락한 미국 중산층들 중의 하나였다. 10대 후반 집안에 몰아닥친 빈곤과 브룩클린 빈민가로의 이주는 이후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됐다.

       
     ▲ 아서 밀러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38년 루즈벨트 행정부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연방극장 프로젝트’에 가입해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연방극장 프로젝트는 뉴딜의 일자리창출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가입하고 얼마 뒤 뉴딜 자체를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고 증오했으며, 연방극장 계획에 몸담은 좌파 예술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 의회가 이 프로젝트를 중단시켜버렸다.

    비록 당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아서 밀러도 미 의회가 우려를 금치 못했던 좌파 예술인들 중 하나였다. 밀러는 30년대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공산당에 입당했던 가장 큰 동기는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은 미국사회라는 허상 뒤에 숨겨진 위선이 폭력적으로 재현된 윤리적 대재앙이었다.”

    그러나 40년대 당의 스탈린주의노선에 염증을 느껴 공산당과 절연하게 된다. 이때 아서 밀러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게 됐다고 후에 고백했다. 아서 밀러는 자신의 공산당 활동을 소재로 1964년 희곡 <몰락 이후>를 쓰기도 했다.

    1949년 초연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서 밀러의 대표작이다. 전후 미국 연극계 최대의 성과로 꼽히며, 자본주의의 참혹함을 고발한 이 작품의 초연은 역시 공산당원 경력의 엘리아 카잔이 연출을 맡았다. 카잔은 1947년 아서 밀러의 다른 작품 <모두가 나의 아들>을 연출했었다. 연극은 비평과 흥행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1952년 엘리아 카잔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하원 ‘비미(un-America)활동위원회HUAC’의 청문회에 소환돼 할리우드에 침투해 있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굴복했다. 이른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서 밀러는 절친한 동료 엘리아 카잔이 권력과 할리우드 영화자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들을 팔아넘기자 좌파 극작가인 릴리안 헬만과 함께 카잔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엘리아 카잔의 배신과 매카시즘의 탄압

    카잔의 청문회 직후 밀러는 매사추세츠주로 달려가 1690년대 마녀사냥에 대해 조사했다. 밀러는 여행을 통해 수집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1952년 <시련>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누가 봐도 매카시즘의 천박함과 광기를 가장 작가다운 방식으로 반박한 셈이다. 이 희곡은 5년 뒤 사르트르가 영화로 옮기기도 했다.

       
     ▲ 마릴린 먼로와 아서밀러
     

    1956년 이제는 밀러가 비미활동위윈회의 청문회에 불려 나갔다. 그는 이름을 대라는 의원들의 요구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 대가는 벌금과, 30일간의 구금, 블랙리스트 등재, 여권 말소였다. 그런데 청문회 기간 중 세인들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의원들과 설전을 벌이는 아서 밀러가 아니라 그의 곁을 지킨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배우 마릴린 몬로였다.

    둘은 1951년 처음 만나 청문회 기간 중인 56년 6월에 결혼했다. 나이 차이 뿐만 아니라 미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문학가와 스크린을 주름잡는 섹스 심벌의 결합은 여러모로 이색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카잔이 불러일으킨 할리우드의 공포가 확산 중인 할리우드에서 또 다른 좌파 혐의자인 아서 밀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마릴린 몬로에게 있어서 배우 생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서 밀러는 이름을 대라는 의원들에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할리우드의 흔한 사랑 놀음으로 비쳐졌지만 마릴린 몬로에게 있어서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용기’였다. 밀러와 몬로는 1961년 이혼했다. 둘의 결혼기간은 마릴린 몬로에게 있어서는 가장 긴 결혼생활이기도 했다. 

    9.11 보복 공격은 ‘인간성에 위배되는 전쟁’ 

    1965년 아서 밀러는 ‘국제문인협회PEN’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아서 밀러는 국제문인협회가 ‘세계 문인들의 양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을 거치면서 국제문인협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에서 행동그룹으로 변모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 문제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반전운동은 60년대 내내 그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투여한 활동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말년에 늙은 몸을 이끌고 동참했던 활동은 9/11 사건 이후 벌어진 전쟁과 공포에 대한 반대다. 2001년 12월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86세의 노작가는 9/11 직후 미국이 취한 보복공격과 이후의 반테러 전쟁 계획을 ‘인간성에 위배되는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미군의 군사교도소에서 벌어지는 잔혹 행위와 미국이 힘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시민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40년 전 그 자신이 체험했던 바로 그 ‘광기’의 재현을 경고한 것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