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혁명을 위해
    함께 단두대에 섭시다"
    [중국 현대사 인물열전-5]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의 연애와 혼인생활
        2021년 06월 09일 01: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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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닮고 싶은 혁명가의 한 명

    덩잉차오 약전 : 중국공산당 홈페이지 인민망에서 발췌

    덩잉차오(鄧潁超 ) 1904년 허난성 광산(光山) 사람이다. 광시 좡족 자치주 난닝에서 태어났다. 1924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1925년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견결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이다. 중국 여성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제 6차 전국 정치협상회의 주석을 역임하였다. 저우언라이가 남편이며 쑨웨이스(孫维世)가 양녀이다. 1992년 7월 11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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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잉차오에게 보낸 저우언라이의 연애편지
    “우리 함께 단두대에 섭시다.”

    프랑스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도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처럼 함께 단두대에 섭시다.” 저우의 편지를 받고 덩잉차오도 결심을 밝혔다. “나도 혁명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겠다.” 서로의 신념을 확인한 그들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 서로 돕고 격려하던 우의가 애정으로 변한 것이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저우언라이는 본래 장뤄밍(張若明)이라는 다른 여학생을 좋아하였다. 장뤄밍과 덩잉차오는 다같이 텐진의 학생 진보단체인 각오사(覺悟社)의 성원이었다. 장뤄밍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근공검학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떠났고 덩잉차오는 중국에 남아 있었다. 그러면 왜 저우언라이의 연인이 장뤄밍에서 덩잉차오로 바뀌게 되었을까?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1919년 5.4운동 중에 처음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텐진 학생운동의 지도자였고 덩잉차오는 텐진 여성 애국동지회의 집행위원 겸 강연대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9월 16일, 그들은 각오사에 함께 가입하였다. 각오사는 저우언라이가 주동하여 발기한 청년 진보단체였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보다 여섯 살 아래다. 나이차 때문에 일찍 연인이 될 조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우언라이는 한참 동안 독신주의를 고집하였다.

    5.4운동 때 텐진중학교 학생이던 덩잉차오는 시국강연회에서 연사가 되어 열변을 토했다. 저우언라이는 훗날 “체구는 자그마한데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커다란 여학생이 연단에 올랐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애국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과 한간(민족의 배신자를 말한다.)을 규탄하였는데 연설 솜씨가 썩 좋아 청중들이 숨도 쉬지 않고 들었다.”고 술회하였다. 이때부터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를 총명하고 의지가 굳은 동지로 여기게 되었다.

    1920년 11월 7일, 저우언라이와 리푸춘, 궈룽쩐, 장뤄밍 등은 상하이에서 배에 올라 근검공학 유학길에 올랐다. 저우언라이는 유럽에 도착한 뒤 192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에는 소년 공산당(훗날 사회주의 청년단으로 개칭) 설립을 주도했으며 집행위원 겸 서기에 취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정치의식은 날로 성장하였다. 그는 본래 독신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였으나 차츰 연애감정을 갖게 되었다. 유럽에 있을 때 저우언라이는 장뤄밍과 가깝게 지냈다. 어떤 기록에는 두사람이 연인이었다고 한다.

    장뤄밍은 1902년 2월 허베이성 바오딩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운데다 재기가 넘쳤다. 행동이 민첩하고 글을 잘 썼는데 저우언라이, 궈룽쩐(郭隆真) 등과 함께 텐진 학생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유럽에서 소년 공산당원이자 국민당 유럽지부 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중국 여성 중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선전물을 발표한 선각자였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훗날 프랑스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얻게 되었다.

    1924년초 장뤄밍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 공산당 리용지부에서 레닌 추도대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발언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 비밀경찰은 그녀를 잡아 심문하였으며 하마터면 추방당할 뻔하였다. 그후 그녀는 줄곧 프랑스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장뤄밍은 신분 노출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그녀는 정치활동을 그만두고 조직에서 나와 공부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장뤄밍은 학업에 전념하여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였다. 그녀는 베이징대학과 윈난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장뤄밍 부부는 중국 1호 박사부부로 이름을 알렸으나 1956년 반우파 투쟁의 그물에 걸려 들었다. 과거 탈당한 경력 때문에 윈난대학교에서 비판을 받은 장뤄밍은 1958년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비판 과정에서 모욕을 받은 데 대한 항거였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부부가 직접 윈난 대학에 가서 사실을 확인한 뒤 장뤄밍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장뤄밍을 비판한 이들이 가족에게 사과하는 등 명예를 회복하였다. 장뤄밍은 문화대혁명 후 완전히 복권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정작 혁명활동에 종사한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부부는 투옥도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탈한 연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헤어진 연인을 챙긴 저우언라이나 함께 노력한 덩잉차오도 대단한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덩잉차오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장뤄밍이 혁명대열에서 이탈하자 저우언라이는 크게 실망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시선은 덩잉차오에게 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덩잉차오는 혁명의 열정이 충만했을 뿐 아니라 용감하고 의지가 굳었다. 그때 덩잉차오는 베이핑 여자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텐진에서 교사로 있었다. 그녀는 텐진에서 각종 사회활동에 활발히 참가하고 있었다.

    1924년 1월 덩잉차오는 텐진에서 공산주의 청년단에 참가하여 선전위원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텐진에서 중공 부녀부장을 맡았으며 국민당에서도 직을 맡았다. 저우언라이는 그동안 소식이 끊겼던 덩잉차오가 그토록 사상적으로 진보한 데 대하여 감탄하였다. 5.4 운동때 함께 했던 많은 여학생들이 혁명의 의지를 잃거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봉건 가정의 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가장 어리던 덩잉차오가 투쟁의 최전선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하였고 여성 해방운동에도 열심이었다.

    1922년말 저우언라이는 근검공학 동료인 리웨이한을 통해 덩잉차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의 편지에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는 저우언라이가 장뤄밍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찔러보나 하는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본래 저우언라이는 텐진의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덩잉차오도 저우언라이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인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동지로서 두 사람은 편지를 계속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우리도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처럼 함께 단두대에 섭시다.” 혁명의지가 투철한 저우의 편지를 받고 덩잉차오도 결심을 밝혔다. “나도 혁명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겠다.” 서로의 신념을 확인한 그들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 서로 돕고 격려하던 우의가 애정으로 변한 것이다. 덩잉차오는 총명하고 의지가 굳세지만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여학생 가운데 덩잉차오를 선택하고 줄기차게 구애의 편지를 보냈다. 이런 것도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혁명을 위한 동반자를 찾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잉차오는 “시화팅에 핀 해당화의 기억”이라는 글에서 연애과정을 이렇게 썼다. “예상치 않은 일이었지만 우리는 헤어져 두 대륙 사이에서 서로 잘 알게 되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감정이 싹튼 것이다. 우리는 같은 혁명이상을 가졌고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3년간 그는 점점 더 자주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우리는 점점 애정을 담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서로 약속하게 된 것이다.”

    덩잉차오의 어머니는 저우언라이가 귀국한 뒤에 정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덩잉차오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 두고 있었다. 덩잉차오는 편지에 “우리의 사상이 서로 통한다. 서로 동반자가 되기를 원한다. 평생토록 공산주의를 위해 함께 분투하자.”라고 썼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덩잉차오가 밝힌 연애 이야기

    1987년 9월 30일, 덩잉차오는 중난하이(中南海) 시화팅(西花厅)에서 일본인 타케이리 요시카스 등의 방문을 받았다. 덩잉차오는 일본인들과 중일우호협회 쑨핑화(孫平化) 등에게 저우언라이와 알게 된 일과 서로 이해하게 된 것, 그리고 연애과정을 털어 놓았다.

    1919년 나는 텐진 여자사범학교에 다녔고 저우언라이 동지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다. 5.4운동 직후 언라이가 귀국하였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 저우언라이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대중집회가 열려 산둥 군벌이 애국지사를 살해한 데 대하여 규탄하였다. 대회 주석단에는 헌팅캡을 쓰고 푸르누름한 옷에 흰색 구두를 신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어떤 친구가 내게 “저사람이 저우언라이야.”하고 말해 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나는 저우언라이가 저렇게 생겼구나 하여 마음속에 호감이 생겼다. 언라이도 나를 알고 있었다는데 어떤 만남도 없었다. 나중에 텐진에 각오사가 설립되었다. 언라이와 나는 모두 각오사의 성원이었다. 언라이는 학생회 조직의 책임자였으며 나도 학생운동을 하여 서로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언라이 및 다른 이들과 대화했는데 상당히 길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둘이 대화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가끔 짧은 몇 마디를 나누기도 했지만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때는 봉건적인 인습이 강하여 남녀의 접촉을 금하던 시절이었다. 조직의 규정이나 규약에도 학생운동 기간에 서로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때 조직의 성원이 스물 몇 명이었지만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다.

    당시 언라이 동지는 독신주의를 주장하였으며 논문을 발표한 일도 있었다. 지금 그 글을 찾지는 못하겠다. 그때 나는 그의 독신주의를 지지하였다. 나는 어떤 결혼관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다. 열 몇 살이었지만 봉건사회의 억압이나 남존여비 사상, 그리고 여성은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꽃가마에 탄 여성을 보면 “저 여자 인생은 저걸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나는 인생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건 아니고 역시 결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생의 큰일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야지 어설프면 안될 것이다. 하여간 그때는 조직의 규정도 있어 나는 연애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1920년이 되어 나는 유물주의 사상을 갖게 되고 또 다른 이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며 나도 결혼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결혼 대상이나 이상적인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에 형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언라이 동지에게 몇 가지 부합되는 점이 있었지만 서로 연애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언라이 동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나는 텐진에서 교사로 있었다. 그때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편지의 문맥에 어떤 뜻이 담겨 있었지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고 그의 말에 믿음도 부족했다. 그때 언라이는 어떤 여학생과 친하였고, 호감이 있었으며, 둘 다 프랑스에 있었다. 언라이 동지와 그 여학생이 서로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언라이의 편지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라이는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 여학생과 정치적으로 맞지 않고 왕래도 하지 않는다며 진전된 관계를 요구해 왔다. 편지를 보낼수록 그는 나와 분명한 관계를 요청했다. 나는 별로 급할 게 없어 회신도 빨리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하고 상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라이 동지는 자꾸 편지를 보내 나의 태도 표명을 재촉하였다. 1923년이 되자 우리가 연애관계라는 게 분명해졌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우리 편지에는 연애 이야기는 적고 사상이나 국가의 운명, 혁명활동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결혼생활

    저우언라이와 결혼에 관해 덩잉차오는 1988년 4월 ‘시화팅의 기억’에 쓴 일이 있다.

    “우리는 3년이 지나 비로소 애정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그것을 확인하는 기간이 있었지요. 당 중앙이 당신을 귀국시킨 뒤 우리는 당조직의 동의 아래 결혼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민주를 주장하였고 혁신을 주장하였습니다. 혁명을 주장했으며 구사회의 모든 봉건적 속박과 풍습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지요. 우리의 결혼은 등기할 곳도, 증인도, 사회자도 필요 없었습니다. 약간의 사치도 없었고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함께 살았어요. 혁명이 꽃피던 시절에 우리 애정의 꽃도 피어났습니다.

    당신의 조카가 연애시절을 이야기하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했지요. ‘나는 그때 혁명을 견지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한 것이다.’ 나도 당신의 그 점을 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용모를 보거나 성격 차이를 따지는 사이가 아니었지요. 공산주의의 이상을 위해 분투하는 것, 이것이 믿고 의지할만한 기반이었고 보증이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고 한눈에 반하지도 않았으며 연애만을 위해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편지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뜻을 알고 서로 확인한 뒤에 결혼했습니다. 몇 십년간의 전투속에서 전우가 되고 반려가 되었으며 한결같은 애정을 가진 부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애정은 인민사이에서 깊어졌고 동지들 사이에서 융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애정생활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애정만을 위한 애정도 아니며 깊고 영원한 것입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의 결혼에 특별한 의식은 없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피로연에 참석하였다. 장즈중의 비서 위잔방(余湛邦)은 이렇게 말하였다. “두 사람은 1925년 8월 8일 광저우에서 결혼하였다. 당시 혁명정세가 어지러워 매우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들은 혼례에 휴가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장즈중은 축하연에 직접 참가하였다. 축하연은 광저우의 크지 않은 서양 레스토랑에서 진행되었다. 참가자는 덩옌다(邓演达), 후이다이잉, 숑숑(熊雄), 까오위한(高语罕), 루이(鲁易), 덩중샤(邓中夏), 천옌녠(陈延年) 등이었다. 모두 신나게 떠들고 마셨다.

    60년대 초에 장즈중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렇게 회상했다. ”당신들이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소. 옛날 장소에 가서 밥이라도 먹으며 기념해야 되지 않소?“ 저우언라이는 웃더니 장즈중 등을 불러 한턱 내었다. 결혼한 뒤 밀월여행은 커녕 휴가조차 내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결혼 다음날 바로 황푸군관학교로 출근하였다. 당시 저루언라이는 황푸에서 정치부 부주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8가지 약속을 평생 지키다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 부부는 부부관계에 관한 8가지 원칙을 정해 평생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격려하고, 위로하며, 양보하고, 용서하며, 서로 돕고, 서로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국 부부들의 모범인 두 사람도 아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맞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덩잉차오에게 크게 화를 낸 일이 있었다.

    결혼 후 덩잉차오는 곧 아이를 가졌다. 얼마 후 저우언라이는 북벌군을 따라 군벌 천중밍을 토벌하는 데 참가하였다. 그때 홀로 있던 덩잉차오는 약을 먹고 태아를 지워 버렸다. 혁명을 해야 하는데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저우언라이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아이가 혁명의 장애물이라니 말도 안된다. 혁명의 자산이고 희망이다.“ 그후 덩잉차오는 다시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아이를 잃게 되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정변을 일으키자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둘 다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덩잉차오는 출산이 임박하여 몰래 병원에 입원했으나 긴장해서 그런지 난산이었다. 결국 아이는 낳자마자 곧 숨을 거두었다. 그후 덩잉차오는 다시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1927년 희생당한 공산당 간부 쑨빙원(孙炳文)의 딸인 쑨웨이스를 양녀로 맞아 들였다. 두 사람의 보살핌 속에 쑨웨이스는 잘 자랐다. 러시아에 유학했던 그녀는 중국의 연극과 영화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며 문화계의 총아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쑨웨이스의 재주와 명성을 질투한 장칭 등 4인방에 의해 타살되고 말았다. 저우언라이는 일국의 총리임에도 그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알 수 있다.

    백년해로 끝에 저우언라이가 먼저 세상을 뜨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는 덧붙일 필요가 없다. 두 사람은 항상 붙어 있었으며 동지애로 굳게 결속되어 있었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의 후사를 위해 새부인을 맞으라고 권하기도 했다 한다. 저우언라이는”조국을 사랑한 덩잉차오를 슬프게 해서는 안된다.”며 일축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부부관계에 대하여는 마오쩌둥이 늘 부러워하였다. 장칭 때문에 골치를 앓던 마오는 저우에게 “나는 총리의 부부관계가 부럽다.” 고 말하곤 하였다.

    화장하여 뼛가루를 남기지 말자던 약속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덩잉차오는 저우의 평소 소망에 따라 그를 땅에 묻지 않았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골분함을 조종사들에게 맡겨 조국의 대지에 뿌리게 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덩잉차오는 이렇게 술회한 일이 있다.

    “화장을 권장하는 것은 중앙의 방침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후에 뼛가루를 남기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저우언라이는 내게 ”당신이 먼저 가면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소. 내가 먼저 가면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소?”하고 물었다. 저우언라이는 내가 마음이 약해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언라이가 먼저 떠난 뒤 나는 중앙에 그의 유언을 견결하게 요청하였다. “뺏가루를 남기지 말고 조국의 대지와 강물에 뿌려 달라.” 유언을 실행하고 나니 나는 이제 마음이 편하다. 언라이는 내게 이런 말도 하였다. “땅에 묻다가 화장하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뼛가루를 보존하지 않는 것도 혁명이다. 우리는 유물론자다. 물질은 불멸하는데 뼛가루는 비료가 된다. 죽어서도 인민에 복무하고 인민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덩잉차오의 이야기를 들은 옛 동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에게 이런 말도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을 때였다. ”내 장사에 사람들이 많이 올 필요도 없고 특별하게 처리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의사를 탓하기도 하고 의료인력을 탓하기도 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병세를 잘 알고 있었다. 의료진의 보고를 읽고 스스로 수정해서 마오쩌둥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저우언라이가 스스로 화장을 선택하여 뼛가루를 대지에 뿌린 것은 덩샤오핑에게 이어졌다. 덩샤오핑도 자신이 죽은 후 화장하여 조국의 대지와 강, 바다에 뼛가루를 뿌리라고 유언한 것이다. 이처럼 최고 지도부가 끝까지 모범이 되기 위해 애쓴 것을 보면 중국이 범상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우언라이를 그리는 덩잉차오의 회상

    12년 후 그들 부부가 살던 중난하이 시화팅(西花厅)에 해당화가 만발하였다. 덩잉차오는 “시화팅에 해당화가 또 피었네요.”라는 글을 썼다.

    “봄이 왔네요. 온갖 꽃이 다투어 피는데 시화팅에 해당화도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보던 주인은 벌써 갔지요. 당신이 떠난 지 벌써 12년이 지났군요. 그렇게 해당화를 사랑하더니 당신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군요. 해방 초기에 당신은 우연히 해당화 만발한 화원을 처음 보았지요. 그때부터 우리는 그 옆에서 26년을 살았네요. 나는 당신보다 더 오래 살아 벌써 38년이 되었습니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가 사랑하던 해당화 곁을 지켰으며 그들이 살던 집을 지켰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을 간직하였다.

    “일생동안 당신 손을 놓지 않고 고난을 함께 했지요.
    어떤 후회도 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아는 영혼의 반려였어요.
    우리는 함께 먼 곳을 바라보는 동지이고 전우,우리의 애정은 깊고 영원히 변치않습니다.”

    “내가 언라이의 일생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저우언라이가 활약할 때 덩잉차오는 수십년 동안 묵묵히 그를 도왔다. 그래도 덩잉차오는 여러번 당 중앙의 고위층에 이름을 올렸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뒤 덩잉차오는 비로소 중앙 정치국에 진입했으며 전국 정치협상회의 주석에도 올랐다.

    나중에 중공이 저우언라이 전기를 간행하기로 하였을 때 덩잉차오는 전기내용에 간섭하지 않았다. 출판 전에 집으로 보내온 초고를 읽지도 않았다. 초판이 발행된 뒤 관계자들과 대화에서 “실사구시에 따라 집필하면 된다”고 하였다 한다. 그때 덩잉차오는 의견을 묻는 관계자들에게 ”나는 언라이의 일과 그의 물건에 대하여 직접 의견을 내지 않겠다. 그는 보통의 당원이 아니라 당의 간부이고 지도자였다. 그가 죽은 뒤 당중앙이 결정하고 조직이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당신들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회피하지는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당잉차오는 또 이런 말도 하였다. “당신들은 내가 언라이의 일평생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언라이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토지혁명 전쟁 시기 저우언라이와 중앙 고위층 사이의 논쟁 과정을 묻자 덩잉차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잘 모른다. 당신들은 오늘날 내가 정치국 위원으로 그때 일을 말하는 것을 원하지 마라. 그때 나는 일개 졸병에 지나지 않았다. 언라이는 돌아와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늘 당신들에게 듣고 비로소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전기 집필자 한 사람이 1958년에 저우언라이가 ‘무모한 전진에 반대하여 비판 당한 것을 물었다. 덩잉차오는 “언라이는 기율에 엄격한 사람이다. 많은 일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난닝회의와 청두 회의 뒤 나는 당내에 여러 주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누가 무모한 전진에 반대했는지 잘 몰랐다.”

    1982년 가을에서 겨울 무렵 ‘저우언라이 전기’의 원고가 덩잉차오에게 도착하였다. 덩잉차오는 12월 5일 집필조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들이 저우언라이에 대하여 쓸 때 지나치게 찬양하지 마세요. 폄하하지도 말고 실사구시를 하면 됩니다.” 덩잉차오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하였다. “언라이 동지도 자신의 공적을 부풀려 쓰는 것을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저우언라이와 평생을 함께 한 덩잉차오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연행되어 쓴 자술서를 바탕으로 한 ‘펑더화이 자술’ 그리고 자신은 물론 부인까지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찬양을 배척했던 ‘저우언라이 전기’ ‘덩잉차오 전기’라면 믿을만 할 것이다. 그밖에 수많은 이른바 위인들의 전기나 평전을 나는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십중팔구 부풀리거나 없는 사실을 첨가한 용비어천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재미없고 그래도 본받을만한 덩잉차오 약전과 애정 생활을 이걸로 끝맺는다. 내가 중국 관련해서 쓴 글중 가장 재미없고 딱딱할 것으로 확신한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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