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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는 도덕적 선악의 선택·선언 아냐
    [책소개] 『정치를 옹호함』(버나드 크릭/ 후마니타스)
        2021년 04월 24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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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을 결정하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정치

    오늘날 우리의 삶과 운명(그런 것이 있다면)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다. 누군가의 삶과 운명이 신탁에 의해 예정되거나, 말씀에 의해 결정되었던 시절이 사라지고, 내 운명이 내 주인의 운명에 달려 있던 세계가 무너진 이래로,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 되었다. 그 모든 확실성의 지표가 사라진 시대,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꾸려야 하는 세상에서 ‘정치’ 이외의 방식으로 사회를 정당하게 또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더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는 또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치를 각기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핵심적 신조, 다시 말해 정치를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또는 과학주의로 환원하려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2년에 처음 출간된 이래로 네 차례 개정을 거쳐 60년이 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국 일반 가정집의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은 장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되고 있다. 이 책은, 좌우 이념 갈등이 치열히 벌어졌던 냉전 한복판에서, 정치를 어느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이념적 잣대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맞서, 또한 과학기술과 관료제의 놀라운 발전과 더불어 정치를 행정으로 치환하려는 시도에 맞서, 그 어느 하나의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의 독특한 특성을 밝히며, 위대하고 개명된 인간의 ‘행위’로서의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힘쓴다.

    이 책은 획일성보다 다양성을 보존하고, 폭력과 강압을 사용하는 것보다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를 통해, 그 모든 어려움과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정치적’인 체계를 설립하고 유지해야 하는지를 감동적으로 옹호한다. 나아가, 이 글은 정치가 왜 선과 악의 대결이 될 수 없으며, 또 되어서는 안 되는지, 정치를 통해 불변의 어떤 제도나 성과를 남기겠다는 욕망이 왜 반反정치적일 수밖에 없는지, 정치를 민주주의로 환원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 정치는 말로써 서로를 달래어 조정해 자유와 질서 보존하려는 인간의 개명된 행위

    모든 사람이 천사라면 갈등은 없을 것이고, 그런 천사들이 사는 곳은 정치가 필요하지 않은 천국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악마라면 만인은 만인에 대해 투쟁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거나 자연 상태일 것이지, 정치적 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모두가 동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곳에서는 아마도 이처럼 정치가 필요 없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는 체계화된 국가가 단일한 종족, 종교, 이해관계 혹은 전통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집합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너와 내가 그리는 꿈과 이상이 다르며, 그렇기에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치적인 체계가 설립되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억압을 통해 언제든 파괴될 수 있고, 은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체계는 이 같은 차이에 대한 깨달음에서 더 나아가, 이런 차이들에 대한 승인, 그리고 우리가 이런 차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속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체계의 성립은 자유의 탄생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며, 안전을 제공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의사 표현의 수단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정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이 지적하듯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는 이처럼 인간의 개명된 행위이기 때문에 매우 드문 것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고, 양보와 타협을 강요하며,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지만, 그 이외의 정당한 방법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면 말이다.

    # 선과 악 사이에도 정치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흐름은 정치를 여전히 어느 하나의 이념이나, 제도, 가치, 도덕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들이다. 정치적인 경합을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상정하거나, 적과 아의 대결, 민주주의 세력 대 반민주주의 세력의 대결로 그리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집권당들의 목표는, 다음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다음 정부가 되돌릴 수 없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거나,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향후 100년 동안 ‘계속해서’ 집권하겠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서로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표현들로 부르고,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 양 서로 저주한다. 선거가 끝나면 시민들은 어떻게 저런 세력들에게 표를 줄 수 있느냐는 하소연을 동료 시민들에게 하고, 특정 지역을 비난하거나 폄하한다.

    이 같은 조롱과 하소연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공동체에서 척결하거나 쫓아내야 할 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이런 시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정치는 도덕적 선악으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고귀한 가치나 신념에 기반을 둔 행위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정치는 말 그대로 인간이 처한 실존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 이질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폭력적 방법을 제외한 채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결코 배타적으로 정당하다거나 옳은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한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이 정치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맥락을 부정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특히, 진정한 정치적 신조는 오히려 조정이라는, 끝도 없고 어렵기 짝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시도임을 역설한다.

    # 정치는 민주주의로도 환원될 수 없다

    정치는 말로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라는 저자의 주장, 특히 이를 민주주의로 환원할 수 없다는 지적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최상의 가치로 상정해, 정치적인 경합을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혹은 독재)의 틀로만 환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이 같은 이분법을 기반으로 상대방을 서로 악마화하고, 이를 선악의 가치로 전환시키기까지 하며,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 바라본다. 이 같은 구도에서 여당은 대체로 제왕적 권한을 가진다는 대통령과 더불어 독재 세력, 반민주 세력으로 불리며 비판을 받는데, 얄궂은 일이지만, 이 같은 상황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공수가 뒤바뀌며 반복된다. 민주화 이후 25년이 넘었고, 여야 간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두 번 이상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를 최고의 선으로 바라보는 관점, 또한 정치를 민주주의로 환원하는 방식을 명확하게 거부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를 상대화한다. 민주주의 그 자체로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크릭은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반짝이고 아름답다”는 식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그것이 다수의 힘이나 선동가의 수사 앞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준다. 민주주의란 인간들이 운용하기에 따라서 최선의 정치가 될 수 있지만, 또한 최악의 통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한국 사회에 큰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신성한 무엇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장 공정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게임의 규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게임 그 자체로는 선악을 따지기 어렵고, 게임의 승패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의 참여자는 누구든 이기고 질 수 있으며, 자신이 이기면 선이고 다른 편이 이기면 악이라는 식의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이런 구분을 잘 하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가 희망이라거나 민주주의가 문제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민들은 희망과 절망의 악순환에 빠지는 반면, 정당들은 적대적 상호 공존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상대화하고 정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하나의 조건이지 결과를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선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정치’를 더 잘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 원래 ‘정치’는 기득권에 반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정치 또는 정치인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어감이 배어 있다. ‘정치적 계산’이나, ‘정치적 고려’ 등과 같은 표현은 특정 세력이나, 부류의 이해관계만을 고려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인처럼 보인다’는 말은 표리부동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사람들은 정치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고, 정치가 개입해 공정하고 효율인 경제와 사회의 작동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정치’는 일반적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이란 왕가, 법조계, 교회의 기득권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도전 방식은 다소 특이했는데, 전제정에서 흔한 궁정의 음모가 아니라 분명한 정책 이슈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공중에게 알리는 방식이었다. 정치인들은 경우에 따라 고결해 보이는 사람일 수도, 경박해 보이는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합법적인 기득권’에 맞서 ‘공중’the public과 ‘인민’the people의 권력을 주창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정치(인)이라는 표현은 당대 기득권 세력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토리의 대지주들이 정치인들이라 조롱했던 휘그의 거물들은 하층민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대변하며, 그들을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는 정치(인)의 이 같은 의미를 되찾고, 정치의 이 같은 차원을 옹호하고 방어해야 한다. 정치가 원래의 의미처럼 기득권에서 배제된 사람들, 말하자면 몫 없는 사람들에게 몫을 나눠 주고, 그들이 공동체의 질서와 자유를 보존하는 행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때, 또 정치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좀 더 안정되고, 문명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은 기득 세력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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