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만의 변화···F1은
    정말 공정한 경쟁 꿈꿀까?
    [왼쪽에서 본 F1]'버짓캡' 도입 배경
        2021년 04월 20일 1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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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28일 바레인 그랑프리가 개최되면서 F1 월드 챔피언십 2021시즌이 막을 올렸습니다. 2021시즌은 70년 역사의 F1이 큰 변화를 맞이하는 매우 중요한 시즌입니다. 새 시즌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신설 재정 규정 때문입니다.

    F1은 포뮬러라는 이름답게 규정이라는 틀 안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승리를 노리는 무대입니다. 이와 같은 F1에는 지난 2020년까지 ‘기술 규정’과 ‘운영 규정’이라는 두 가지 기준만 존재했습니다. 지난 70년의 F1 역사와 참가한 팀 및 개인의 흥망성쇠는 모두 이 두 가지 틀 안에서 결정된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F1을 규정하던 틀과 전혀 다른 개념의 새로운 규격, ‘재정 규정’이 신설되면서 ‘가장 자본주의적이었던 스포츠’ F1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습니다.

    재정 규정의 핵심은 ‘버짓 캡(budget cap)’이라고 불리는 팀 운영 비용 제한입니다. 경기 참가는 물론 팀 유지를 위해 엄청난 돈이 드는 모터스포츠 중에서도 압도적인 비용 부담으로 악명 높은 F1에서 처음으로 비용 억제에 나선 것입니다. 70년 넘게 매년 증가하기만 했던 F1 팀의 운영비가 처음으로 드라마틱하게 줄어들 전망입니다. 일부 대형 팀의 운영비는 2020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어들 전망입니다.

    버짓 캡의 세부 내용을 뜯어보면 누구나 분명한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2021시즌 재정 규정은 21경기 기준 1억4천5백만 달러를 운영비의 상한선으로 정했습니다. 한화 1,600억 원이 넘는 큰 금액이긴 하지만, 이전까지 F1 팀의 지출을 생각하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팀이 즐비한 수준입니다. 2019년 기준 F1 최강팀 메르세데스는 1년 동안 5,400억 원가량을 소모했고, 그 뒤를 잇는 페라리와 레드불의 지출 규모 역시 5,000억 원 수준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예외 조항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금액을 그대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절반 이상, 최대 1/3 규모가 될 때까지 팀의 운영비를 절감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반대로 소형 팀들에게는 버짓 캡이 큰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장 적은 돈으로 팀을 운영하던 윌리암스의 2019년 지출은 1,500억 원에 미치지 못했고, 토로로쏘(현재 알파타우리)와 알파로메오의 지출도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버짓 캡의 표면적인 제한보다 적은 돈을 쓰고 있던 세 팀 외에 하스와 레이싱포인트(현재 애스턴마틴) 등은 재정 규정의 예외 조항을 고려하면 마찬가지로 버짓 캡과 비슷한 수준의 지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F1의 재정 규정 신설과 버짓 캡 도입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F1 월드 챔피언십 자신의 생존입니다.

    7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F1이지만 최근에는 새로 팀을 만드는 경우가 드물어졌고, 기존 팀들 역시 매년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철수를 고려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재정 문제로 문을 닫거나 팀의 소유주나 최고 경영자가 바뀐 경우만 열 건이 넘는다는 것에서 운영 비용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직감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대형 팀들 역시 과도한 비용 문제로 철수를 고려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용을 더 투입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공멸의 늪에 빠져있던 F1 팀들에게 구명 밧줄이 된 셈입니다. 팀들이 생존한다면 F1 월드 챔피언십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공정한 경쟁 유도입니다.

    F1 팀 지출 중 상당 부분은 연구/개발과 관련된 인건비나 각종 장비의 운용 비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지출은 곧 빠른 차와 좋은 성적, 나아가서 더 큰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돈을 많이 쓰는 쪽이 많은 돈을 버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많은 돈을 쓰는 팀과 가장 적은 돈을 쓰는 팀 사이에 세 배가 넘는 규모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이런 격차를 해소한 2021시즌 버짓 캡 도입은 강팀의 약세와 약팀의 성적 상승을 이끌어 F1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F1에서 불공평한 경쟁을 당연히 여기던 관행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를 일입니다.

    버짓 캡 도입에 따른 일부 대형 F1 팀의 구조 조정은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또 다른 효과가 예상되기도 합니다.

    팀 운영 비용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팀 단위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지만, 어지간해서는 팀원을 함부로 방출하지 않는 F1 팀의 특성상 쉽게 인력을 줄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대형 팀이 F1이 아닌 다른 메이저 모터스포츠 분야의 팀 또는 부서를 신설해 인력을 전환 배치하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대표적인 F1의 터줏대감 페라리가 최상위 프로토타입 스포츠카 레이싱에 복귀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부 실직자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F1이 아닌 다른 종목의 팀으로 인력을 전환 배치해 가능한 해고를 피하고 지출 규모를 새 규정에 맞추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덕분에 F1에 비해 적은 참가자와 거듭 축소되는 대회 규모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미래가 불투명했던 몇몇 메이저 모터스포츠들이 인기를 회복하고 시장을 확장할 기회가 생긴 셈입니다.

    물론 재정 규정 신설과 부유한 대형 팀들의 대응 속에 얼핏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움직임이 보였다고 해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인 F1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F1이 아무리 겉으로 ‘공정한 경쟁’, ‘비용의 상한선’을 외친다고 해서 실제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F1은 앞으로도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일 것이지만, 재정 규정의 신설과 버짓 캡의 도입은 그런 F1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궁여지책일 뿐입니다. 지난 10년 이상 여러 F1 팀들이 떠나고 엄청난 지출이 문제시되면서 신규 유입이 줄어드는 문제가 없었다면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F1 팀들이 쉽게 대량해고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모터스포츠 분야의 팀을 신설하고 전환 배치를 계획하는 것 역시, 기업이 앞장서서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담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F1 팀은 보통 적절한 자리에 배치할 인력을 구하기 힘들고, 시장에 인력 풀이 넓지 않기 때문에 인력난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뛰어난 인력들로 팀을 구성해야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F1 특성상 기업이 갑이 되어 횡포를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경영이 어렵다고 해서 쉽게 팀원을 해고하거나 고용 유지 노력을 게을리하는 팀은 장기적으로 우수한 인력에게 외면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F1 팀들은 다급한 상황이라도 가능하다면 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압박받고 있는 것입니다.

    F1은 여전히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로서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앞으로 더 큰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기업이나 자본을 인격화하고 그들에게 선량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F1을 구성하는 시스템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팀들에게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하게 순진한 접근입니다. 정의롭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다분히 정치적인 움직임이고 잘 포장된 상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공멸을 앞둔 F1이 안고 있던 어려운 문제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나름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임이 이뤄졌다는 점만큼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행동이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멸의 길을 가면서도 절대 손에 꼭 쥔 자기 것은 조금도 내놓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랄까요? 이미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불러온 커다란 위기 속에서 더 큰 위기를 겪게 된 것이 비단 F1만은 아니었을 텐데, 다들 이런 상황에서 공멸하지 않는 나름의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긴 합니다. 주변 여러 곳에서 위기를 빌미로 약자들에게 모든 짐을 떠넘긴 예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포장이라도 잘하는 F1 주변의 상황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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