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평 좀 내려달라고요?…안 되겠는데요"
    By
        2006년 11월 10일 02:34 오후

    Print Friendly

    오늘 재미있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농심라면 홍보팀 손모 과장이라고 밝힌 이 분은 오늘 치 만평 ‘믿을 수 있는 라면’이 농심 ‘신라면’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며 만평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젊잖고 세련된 문제 제기를 들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농심라면의 홍보팀까지 ‘레디앙’을 볼 정도로 레디앙이 컸구나!” 하는 엉뚱하고 야릇한 희열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 내용을 대략 재구성하면 이렇다.

    손과장: 이창우 박사님이세요?
    나: (송구스럽다는 투로) 아이고 박사는 무슨 박사? 저 박사 아닌데요?
    손과장: (그래도 계속 ‘박사님’ 호칭을 고수하며) 이박사님이 그리신 만평을 잘 봤습니다.
    나: 고맙습니다.

       
     ▲ 본문에 언급된 신라면은 아닙니다만 맛있겠네요.
     

    손과장: 만평 내용이 좋긴 한데요, 저희 농심 ‘신라면’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 걱정입니다. 사실 지난 11월 국정감사 때 열린우리당 김선미 의원(보건복지위)이 라면 스프에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쓰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었는데 우리가 관세청에 수입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코드 오류로 호주, 뉴질랜드산 쇠고기가 미국산 쇠고기로 잘못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해프닝으로 끝났죠.

    나: 그랬나요? 그런데 제가 그린 그림은 이번에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에 관한 건데요.

    손과장: 예, 저도 압니다만 그림에서 묘사된 라면은 네티즌 누가 보더라도 ‘신라면’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고, 마치 ‘신라면’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로 스프를 만든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나: 하긴 제가 라면을 패러디해 그릴 때 ‘신라면’ 봉투를 참고한 건 맞습니다(시간이 남아도는 독자여러분은 신라면 봉투와 그림을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신라면의 매울 ‘신’자 대신 나는 소가 혀를 내밀고 있는 그림으로 슬쩍 바꿨다) 저도 ‘신라면’을 좋아하거든요. ‘신라면’ 팬으로서 신라면을 음해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믿을 수 있는 라면”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았다고 되어 있잖아요?

    손과장: 그렇게만 생각해준다면 상관없겠지만 광우병 우려가 퍼져 있는 상황에서 ‘신라면’과 광우병 쇠고기 스프를 연결시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걱정인거죠.

    나: 네.. 그렇군요. 어쨌든 제 뜻은 이번에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가 고깃덩어리 그자체로 판로를 찾지 못하다가 라면스프와 같은 가공식품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우려를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고, 그래서 최소한 원산지 표시라도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제안을 담았던 겁니다. 더불어 ‘신라면’ 팬으로서 앞으로 신라면도 못 먹게 되면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손과장: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스프 재료로 쓰이는 쇠고기 사골이 봉당 미량만 들어가기 때문에 원산지 표시를 검토하지 않았습니다만 앞으로는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박사님이 그린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좀 대체 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나: 글쎄요… 농심 측에서 제 그림이 실정법상 문제가 있어서 법률적인 대응을 하시겠다면 그런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검토해 볼 순 있겠지만… 이건 표현의 자유 영역이고, 언론의 독자성을 기업측에서 간섭한다는 것도 좀 볼썽사납지 않겠습니까?

    손과장: 그런 건 아니고 좀 배려해주십사는 겁니다.

    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그림이 몇 날 며칠씩 걸려 있을 것도 아니고 하루만 걸려 있을텐데(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오늘이 금요일이라 토,일요일은 쉬기 때문에 도합 사흘은 걸려 있겠다) 괜히 농심측에서 ‘압력을 가했다’는 식으로 되면 오히려 “도대체 뭐길래 그러냐?”며 벌집 건드린 꼴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겠지요.

    손과장: (그는 계속 그림을 내려달라고 사정한다) 내일 다른 그림으로 바뀔 거면 오늘 저녁이나 좀 더 일찍 바꿔주실 순 없겠는지?

    나: 손과장님이 상급자로부터 지시를 받아 곤혹스런 입장이셔서 그러시나 본데…

    손과장: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홍보팀에서 인터넷 담당이다 보니 제 일입니다.
    나: 아! 그러세요? 농심 홍보팀 인터넷 담당께서 레디앙에도 다 들러주시니 고맙네요.

    손과장: 네티즌들이 근거 없는 악성 루머를 퍼뜨리면 대응해야 하니까요…
    나: 수고 많으십니다. 그림 문제는 레디앙에 직접 말씀해보시든지 하시고 어쨌든 저는 그림을 내리지 않겠어요. 양해해주세요.

    손과장: 그러시다면 제가 레디앙에 직접 전화를 해보겠습니다.
    나: 그럼 수고하세요.

    대략 이런 내용의 대화가 오가는데 옆에 앉아 있는 동료들이 난리다. “야, 만평 내려주는 대신 신라면 한 박스 달라고 해봐” 등등… (라면 한 박스로 거래할 만큼 내 그림의 가치를 낮게 보는 이런 인간들과 한 솥밥을 먹고 살다니!)

    <레디앙> 편집장에게 이런 전화가 왔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글로 써보란다. 그림에 쪽글도 달렸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필명을 ‘너구리’로 쓴 분이 “라면스프에 사용하는 소고기 및 사골은 호주 뉴질랜드 청정지역에서 완벽한 품질검사를 거쳐 사용합니다. 표시사항에 호주산을 추가하는 것은 검토해 보겠습니다” 빙고!

     최소한 원산지 표시제가 라면계에 불어 닥친다면 이 만평의 사회적 영향력은 기대치 이상이 된다. 그 아래 철자 교정 팬인 김윤진님은 친절하게 ‘동그랑땡’은 쇠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를 원재료로 쓴다고 친절히 교정을 해주셨다. 쇠고기 가공품 모두에 원산지 표시제가 실시되는 그날까지 투쟁!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