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남전역① 공산당,
    중국 서남부를 공략하다
    [국공내전-66]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마지막 결전이 시작되다
        2021년 03월 17일 09: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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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서남지역이라 하면 쓰촨성과 윈난성, 그리고 구이저우성을 말한다. 내전 당시에는 시캉성(西康省)과 함께 네 성을 일컬었다. 시캉성은 쓰촨성 서부지역과 티베트 동부지역에 걸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쓰촨성과 티베트 자치주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중일전쟁 때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쓰촨성 충칭으로 천도했는데 국민정부의 남은 판도는 쓰촨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과 시캉성, 그리고 광시성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충칭에서 장기항전을 이끌며 승리하여 끝내 난징으로 권토중래하였다. 이제 국공내전 최후의 각축이 서남지역, 특히 쓰촨성에서 펼쳐지게 된다.

    해방군이 창장을 도하한 뒤, 국군은 계속 섬멸되어 주력을 상실하였다. 잔존한 병력은 150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국군 주력 부대들은 화남지역과 서남지역, 타이완 등으로 뿔뿔이 후퇴하였다. 장제스는 추풍낙엽처럼 밀리면서도 저항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장제스는 일찍부터 서남지역을 마지막 근거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강전역 이전에는 창장을 경계로 남북 분할을 꾀하였다. 이제는 중일전쟁 시절처럼 서남지역에서 버티며 국제정세가 바뀌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쓰촨성은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쓰촨분지 안의 평야가 넓어 물산이 풍부하였다. 쓰촨성은 파촉이라 일컬었으며 예로부터 ‘천부의 땅’으로 불러왔다.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유비도 이곳을 정벌하여 촉한을 세웠다. 친링(秦岭)산맥과 따바산(大巴山), 우링산맥(武陵山脈)은 천연의 병풍이 되어 쓰촨과 구이저우성을 막아 주었다. 내전 당시 그곳은 봉건세력과 군벌세력이 강하여 장제스가 정치적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만하였다.

    후쫑난 집단군과 쑹시롄 부대로 쓰촨 방어의 주력을 삼다

    쓰촨성에는 백만명에 가까운 국군부대가 있었다. 서남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쓰촨성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그 양대 축은 쑹시롄 집단군과 후쫑난 집단군이었다. 쑹시롄(宋希濂)은 14병단 사령관으로 황푸군관학교 1기생이었다. 그는 남은 국군 지휘관 중 장제스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쑹시롄은 군벌전쟁 때부터 장제스를 따라 숱한 전투를 치렀으며 중일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청천백일훈장을 받았다. 그가 지휘하는 14병단은 14만명의 병력으로 해방군과 제대로 맞붙은 일이 없어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14병단 부사령관 천커페이(陳克非)와 종빈(鍾彬)도 모두 황푸 출신으로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하였다. 쑹시롄은 천상악변구(쓰촨과 후난, 그리고 후베성 경계지역 관할) 수정공서 주임을 맡아 그가 거느린 병력은 모두 20만명에 이르렀다.

    다른 한 사람은 서북왕으로 불리던 후쫑난이었다. 후쫑난은 펑더화이의 공격에 밀려 산시성에서 쓰촨으로 퇴각해 있었다. 후쫑난은 오랫동안 웅거했던 시안을 포기한 뒤 산시성 바오지로 이동했다. 펑더화이의 1야전군이 계속 추격하자 바오지에서 해방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후쫑난 집단군은 큰 타격을 입고 한중으로 후퇴하였으며 서북을 벗어났다. 후쫑난 집단군은 그래도 리원(李文)의 5병단, 페이창후이(裴昌会)의 7병단, 리쩐(李振)의 18병단 등 13개군 40만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시계인 바이충시 집단군을 제외하면 쑹시롄군과 후쫑난군은 장제스 직계 중앙군의 마지막 밑천인 셈이었다. 쓰촨에는 지방 군벌 부대와 잡패군 수십만명을 합하여 백만명의 국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후쫑난(중앙)과 쑹시롄(왼쪽)

    연속극에 보면 쑹시롄과 후쫑난이 만나 대책을 숙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이 볼 때 해방군과 쓰촨에서 결전하는 것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후주임, 해방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쑹시롄이 묻자 후쫑난은 침울하게 대답하였다. “가망 없소. 창장에서도 막지 못했는데 이 좁은 곳에서 막을 수 있겠소?” 쑹시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래도 교장은 우리보고 방어계획을 세우라고 하지 않소.” 하고 말을 흐렸다. 쑹시롄은 한참 생각하더니 후쫑난에게 제의했다. “함께 교장에게 다른 방안을 진언해 봅시다.”

    쑹시롄이 생각한 방안은 두 집단군을 버마로 퇴각시키는 것이었다. 쑹시롄은 중일전쟁 때 쿤밍방어사령관으로 윈난성 방어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때 윈난성과 버마 국경에서 작전한 경험이 있어 버마 사정에 비교적 익숙하였다. 후쫑난은 쑹의 제의에 두말없이 찬성하였다. 후쫑난은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1야전군의 강공에 밀려 산시성에서 주력의 태반을 잃고 후퇴하였다. 자신의 전력이 충실할 때도 당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해방군의 공격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장제스를 만나 전략적 판단을 간하기로 하였다.

    1949년 8월, 후쫑난과 쑹시롄은 충칭에서 순시 중인 장제스를 만났다. 그들은 장제스에게 서남지역을 포기하고 버마로 이동하자고 건의하였다. 장제스는 “서남은 국가의 마지막 보루다. 항전 시기에도 이곳에서 버텨 국토를 회복했는데 싸우기도 전에 달아날 생각부터 한단 말인가?”하고 화를 냈다. 장제스는 두사람에게 “너희들은 황푸의 마지막 제자들이다. 나를 믿고 끝까지 싸워보자.”고 격려하였다. 중요한 결전 때마다 부하들의 건의를 듣지 않았던 장제스는 쓰촨에서도 자신의 판단대로 결전을 선택하였다. 두 사람의 제안은 대륙을 공산당에게 그대로 넘겨주자는 것으로 장제스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제스가 싸우기로 결심했으니 수비 병력을 배치해야 하였다. 9월 8일, 후쫑난은 천섬감(쓰촨, 섬서, 간쑤성 관할) 변구 수정공서 주임을 겸했다. 이때쯤 되면 국군 고위 지휘관들의 직함도 수시로 바뀌었다. 많은 지휘관들이 포로가 되거나 임지를 빼앗기고 도주하니 직함이 유명무실해진 까닭이었다.

    쓰촨에서 방어를 증강할 당시 장제스의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바이충시 집단군과 광둥의 위한머우 부대로 연합 방어선을 구축하여 해방군의 광둥성과 광시성 진격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런 부대 배치는 서남지역 엄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장제스 직계인 후쫑난 집단군은 친링, 따바산, 우링산을 지키게 하여 쓰촨 북부지역을 방어하게 하였다. 바이충시 집단군이 광시성으로 후퇴하자 쓰촨의 후쫑난 집단군과 호응하여 재차 저항을 조직하였으며 윈난과 구이저우의 군벌들과도 협력하게 하였다.

    왼쪽부터 청두, 충칭, 구이양, 창사, 우한

    덩샤오핑 류보청 허룽, 쓰촨으로 진격하다

    1949년 5월 23일, 중공 중앙군사위와 마오쩌둥은 전국으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마오쩌둥은 서남쪽 전황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다. “후쫑난 집단군은 전 병력이 쓰촨으로 후퇴하였다. 쿤밍으로 후퇴한다는 소식도 있다. 장제스와 허잉친, 그리고 광시계는 충칭에 도읍하여 서남에 할거할 꿈을 꾸고 있다. 후쫑난 부대와 쓰촨, 시캉의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나아가 적들의 퇴로를 끊지 않으면 안된다.”

    9월 11일, 중앙군사위와 마오쩌둥은 제2야전군과 제4야전군에 다시 지시하였다.

    “바이충시와 서남의 적들을 대우회하라. 먼저 적의 후방으로 치고 들어가 포위망을 완성한 후에 공격하라. 이런 방침을 바탕으로 제2야전군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제2야전군 4병단은 제4야전군의 지휘에 귀속한다. 4병단은 대우회 임무를 맡아 10월에 장시성 남부에서 광둥으로 진출한다. 그 후 광시에서 윈난을 포위 공격하고 적이 나라 밖으로 후퇴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한다. 제2야전군 주력은 (아군이) 광저우를 해방하고 국민당 정부가 충칭으로 천도하기까지 대기한다. 제4야전군이 광시작전을 시작하면 2야전군은 대우회 움직임을 취해 후난성 서부, 후베이성 서부로 하여 쓰촨성 이빈(宜賓), 루저우, 충칭선으로 진격한다. 2야전군은 후쫑난 집단군 및 쓰촨 경내의 모든 적이 윈난으로 후퇴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바이충시 부대와 연결을 끊어야 한다.

    (섬서성) 바오지 지역에 있는 1야전군 18병단 부대는 허룽, 리징취안(李井泉)의 지휘 아래 후쫑난 집단군을 친링지역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2야전군이 쓰촨성의 적 후퇴로, 즉 캉지역과 윈난지역의 도로를 차단하면 (1야전군은) 신속하게 쓰촨 북부와 청두를 점령한다. 그후 제2야전군과 협력하여 후쫑난 집단군을 섬멸하고 쓰촨 전 지역을 점령한다. 이것이 대우회, 대포위의 작전이다. 서남의 모든 업무를 영도하고 서남을 건설하기 위해 중공 중앙은 덩샤오핑, 류보청, 허룽등 24명으로 중공 중앙 서남국을 조직한다. 덩샤오핑을 1서기, 류보청을 2서기, 허룽을 3서기로 한다.”

    중공 중앙과 마오쩌둥의 부대 배치에 따라 제2야전군은 중국 서남부에 진격할 준비를 하였다. 1949년 8월 19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에 대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제2야전군 주력(4병단 제외)의 임무는 구이양과 쓰촨 동남부를 공략하며 대우회 동작을 취하는 것이다. 먼저 이빈(宜賓), 루현(瀘縣), 장진(江津) 지역으로 진격하여 쑹시롄(宋希濂), 쑨전(孫震) 등 충칭에 있는 적들을 쓰촨 동부지역에 고립시키도록 한다. 그 뒤 이들을 섬멸하거나 정치적 방식으로 해결한다. 쓰촨 북부를 공략할 허룽의 18병단과 협력하여 전 성의 문제를 해결한다. 구체적 행동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제3병단은 차량으로 푸커우에서 쉬저우와 정저우를 거쳐 우한으로 이동한다. 그 후 도보로 창더(常德), 장링(江陵), 즈장(枝江)지역으로 집결하여 보급하도록 한다. 제5병단은 상라오(上饒)에서 차량으로 장수(樟树)로 이동한 다음 도보로 창사를 거쳐 샤오양(邵陽), 우강(武岡, 샹탄(湘潭) 선에 집결하여 보급한다. 2단계로 제3병단은 쭌이(遵義), 펑수이(彭水), 진장(黔江)을 공략하고 5병단은 구이양을 공격 점령한다. 3단계로 3병단은 루현, 장진으로 진격하고 5병단은 이빈(宜賓), 나시(纳溪)로 진격하여 충칭으로 우회한다. 충칭과 쓰촨 동부지역을 장악하여 남쪽에서 포위할 임무를 완성한다.”

    작전명령은 2야전군 산하 각 병단의 진격로와 구체적 행동방침을 담고 있었다. 9월초, 제 2야전군은 후난성 서부와 후베이성 서부로 출격했다. 제3병단과 5병단은 예정된 진로에 따라 각각 차량과 배에 타거나 걸어서 집결지로 이동했다. 제4야전군에 배속해 있던 천겅의 4병단은 9월 하순경 장시성 서부에서 장시성과 광둥성 경계지역으로 진격하여 광둥작전에 참여했다.

    류보청(오른쪽)과 덩샤오핑

    쓰촨 북부 공격지휘부. 수염기른 이가 허룽이다.

    10월 21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 1차 회의에서 결정한 ‘전국 진군에 관한 결정’을 가지고 총총 차에 올라 남하하였다. 그들은 쉬저우에 도착하여 2야전군 사령부가 탑승한 서진 열차에 올랐다. 10월 23일, 류덩은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에 대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제 3병단과 5병단은 준비를 가속해 명령을 앞당겨 실현하라고 요구하였다.

    2야전군의 최종 목적지는 쓰촨성이었다. 장제스가 중국 서남부를 근거지로 구상한 것도 쓰촨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대우회 작전을 구상한 것도 쓰촨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쓰촨이 내전의 마지막 결전장이 될 형국이었다.

    국군 내 첩자 류종콴(劉宗寬), 장제스를 속이다

    국공내전에서 중요한 전투에는 항상 공산당의 첩자가 암약하였다. 내전의 마지막 결전인 쓰촨에서도 국군 중장 신분의 고위 장교가 공산당의 첩자였다. 류종콴은 서남 군정장관 공서의 참모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참모장이 공산당의 첩자이니 해방군은 국군의 방어계획이나 병력배치를 모두 파악한 채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궈루구이가 그랬듯 류종콴도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1949년 11월 하순, 공산당이 충칭을 점령하기 직전 장제스는 국군 병력의 청두로 퇴각하는데 류종콴에게 작전을 입안하게 하였다.

    쓰촨 국군의 공산당 첩자 류종콴

    류종콴은 산시성 푸청(蒲城) 사람이다. 1905년에 태어났으며 황푸군관학교 3기를 졸업하였다. 그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뛰어난 수재로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류종콴은 양후청의 수하였다. 양후청은 서안사변 때 장쉐량과 함께 장제스를 연금하였으니 류종콴이 양후청과 연을 끊지 않는다면 그의 미래가 밝을리 없었다. 양후청이 청년 장교들을 선발하여 황푸군관학교에 입학시키려 할 때의 일이다. 류종콴이 신청하려 하였으나 이미 모집이 끝난 뒤였다. 류종콴은 대담하게도 사령관인 양후청을 찾아가 자신을 황푸에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양후청이 류종콴에게 물었다. “젊은이, 거기에 가면 국민당에 가입해야 한다. 목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래도 좋은가?” 류종콴은 큰소리로 “죽는 일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양후청은 껄껄 웃더니 그를 황푸 입교자 명단에 더해 주었다.

    양후청이 류종콴에게 준 사진

    황푸를 졸업할 때 장제스는 류종콴을 자신의 직계 부대에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류종콴은 양후청에게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끝내 되돌아갔다. 1937년 육군대학을 졸업할 때 류종콴은 수석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장제스는 보기 드문 수재인 류종콴에게 소장 계급을 주어 군사위원회 참모 겸 측근인 탕언보의 연락관으로 기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류종콴은 끝까지 고집을 세워 산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장제스가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을 억류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장제스는 두 번이나 자신을 거역하고 돌아간 류종콴을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류종콴은 사단장이 되어 아편을 밀매하는 연대장을 체포하여 시안으로 압송하였다. 그때는 후쫑난이 그의 상관이 되어 시안 행영 주임으로 있었다. 후쫑난은 류종콴이 사사건건 말썽을 피운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그에게 아편 밀매의 누명을 씌웠다. 후쫑난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당장 처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류종콴을 아낀 펑위샹 등 원로들의 노력으로 죽음을 면하고 13년 형을 언도받았다. 충칭의 감옥에서 복역하던 류종콴은 국군 지휘관들의 전사가 잇따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충칭 방어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에 그는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을 잇따라 만나 그들로부터 애국 민주운동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1946년 내전이 발발하자 류종콴은 국민정부 충칭 행영 참모처장으로 발탁되었다. 류종콴은 차제에 사직하고 옌안에 가서 공산당 활동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때 공산당 쓰촨성 서기인 우위장(吳玉章)이 그에게 사직하지 말고 국군에 남으라고 권하였다. 국군 안에서 공산당의 첩자 역할을 하라고 한 것이다. 1949년 5월 류종콴의 동향 친구인 팡센즈(房顯志)가 찾아왔다. 그는 2야전군이 파견한 연락원이었다. 그로부터 류종콴과 2야전군 지휘부 사이에 긴밀한 연락관계가 형성되었다. 충칭 방어부대 참모장이 공격군의 첩보원이 된 것이다.

    1949년 해방군이 충칭을 점령하기 전날, 류종콴은 중장계급으로 국민당 서남장관 공서 참모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해방군 2야전군이 쓰촨 공격을 하기 전에 류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장제스가 오판하도록 유도하였다. 장제스는 해방군이 쓰촨 북부에서 공격하여 먼저 청두를 공략하고 다음에 충칭을 공격해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쓰촨 북부를 중점방어하도록 병력을 배치하였다. 후쫑난 집단군 14개군 외에 남은 주력인 뤄광원 병단의 3개 군도 북쪽 방어에 동원하였다. 이렇게 북쪽을 강화하자 동남쪽이 비게 되었다. 마침내 2야전군 대군이 구이저우쪽에서 진격해오자 전 전선이 붕괴되어 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장제스는 8월 24일, 아들인 장징궈와 함게 광저우에서 충칭으로 날아왔다. 착륙 후 장제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충칭은 다시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쓰촨의 모든 동포들이 항전할 때의 정신으로 민족혁명을 완성하는데 노력해주기를 바랍니다.”

    8월 29일, 충칭의 꺼러산림원(歌樂山林園)에서 국민당 군사회의가 열렸다. 주요 의제는 공산군의 주공 방향이 어딘지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장췬(전 행정원장. 충칭 수정공서 주임), 후쫑난, 첸따쥔(錢大钧), 쑹시롄(宋希濂), 량썬(楊森), 류원후이(劉文輝), 뤄광원(羅廣文), 선처(沈策) 등이었다. 먼저 장제스가 국군 지휘관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공산군의 주공 방향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참석자들은 모두 침묵하였다. 방어병력을 배치하는 중차대한 문제라 누구도 쉽게 입을 열고자 하지 않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두려운 듯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쪽으로 많이 왔습니다. 삼국시절 등애가 촉을 칠 때 섬서에서 쓰촨으로 왔습니다. 역대 병가의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쓰촨 북쪽으로 왔습니다. 창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만 지세가 험요하여 용병하기에 어렵습니다. 천섬공로(쓰촨과 섬서성 연결)는 교통이 편리하여 공산군이 전개하기에 편리합니다. 학생은 공산군이 북쪽에서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발언한 이는 후쫑난의 부참모장 선처였다. 그의 주장은 참석한 사람들의 동의는 물론 특히 후쫑난의 동의를 받았다.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쓰촨 동부는 지세가 험요하고 인적이 드물다. 교통도 불편해서 대병이 움직이기 어렵다. 그 옆 후베이와 후난에는 아직 바이충시가 막고 있다. 쓰촨 북부는 지형이 복잡하지만 옛날부터 중원에서 서남으로 오려면 이 길로 왔다. 쓰촨과 섬서에는 간선 공로로 이어져 있으며 특히 관중지역과는 철도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병단의 작전애 보급을 감당할만 하다.”

    선처의 발언으로 장제스는 생각을 굳혔다. “여러 정황을 보면 쓰촨 북부가 공산군의 주공로가 될 것이다.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 친링 방어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내 명령이 없이는 후퇴하면 안된다. 바이룽장(白龍江), 미창산(米倉山), 따바산(大巴山)에 2방어선을 구축하라. 뤄광원 병단은 신속하게 난충(南充), 따주(大竹) 방향으로 이동하여 병력을 배치하라. 쓰촨 북부에서 기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장제스는 서남 군정장관 각 병단에 명령을 하달하였다. “비적 토벌기지인 쓰촨을 보위하고 장기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 북쪽의 따바산에서 미창산, 마텐링(摩天岭)을 잇는 선에 지형을 이용하여 비적을 저지하고 섬멸하라.”

    하지만 선처의 발언은 사실상 류종관의 책략에 따른 것이었다. 회의 전에 류종콴은 선처를 찾아 ‘정황판단’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하여 선처가 회의에서 보고해 달라고 청하였다. 선처는 장제스와 후쫑난이 참석한 회의에서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흔쾌히 응락하였다. 류종콴의 판단은 그의 상관인 후쫑난의 생각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한 류종콴은 회의 결과를 2야전군 연락원 방센즈에게 주어 즉시 해방군에게 통보하게 하였다.

    류종콴은 그후에도 쓰촨 북부를 방어하던 후쫑난 부대의 충칭방향 철수를 해방군에 알려 마지막 공을 세웠다. 1949년 11월 중순 장제스가 충칭에 왔다. 그는 쓰촨 북부보다 구이저우쪽과 후난성의 해방군이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장제스는 트럭 800대를 동원하여 후쫑난 집단군 주력부대를 충칭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장제스의 긴급명령은 후쫑난과 서남 군정장관 공서의 고위간부 몇 명에게만 통보된 군사기밀이어서 류종콴도 알지 못하였다. 류종콴은 어느날 오후 제 4보급 사령관 치우옌(邱淵)이 급히 건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류종콴이 “치우형, 무슨 급한 일이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총재가 미쳤소. 10시간 안에 트럭 800대를 대령하라니 그걸 지금 어디서 가져올 수 있소? 내가 무슨 제갈량이오? 제갈량도 화살 10만개를 만드는 데 사흘은 걸렸소.” 하는 것이었다. 류종콴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트럭을 어디에 쓴다는 말이오?” “총재가 후쫑난 부대 1군을 충칭으로 옮겨오라고 하였소.” 류종콴이 이 정보를 즉시 해방군에 통보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후 충칭을 점령한 류보청은 이렇게 류종콴을 칭찬하였다. “류종콴의 공로는 10만 군대에 필적할 만한 것이다.”

    해방군, 거짓 공격으로 국군의 주력을 붙잡아 두다

    해방군의 쓰촨성 진격을 막기 위해 국군도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국군 섬감변구(산시성과 간쑤성을 관할) 수정공서 주임 후쫑난은 14개군 16만 병력으로 친링, 한중, 쓰촨 북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후쫑난의 방어 중점은 북쪽을 방비하는 것이었다. 국군 서남 군정장관 장췬(張群)도 휘하 23개군 30만 병력으로 바둥(巴東) 지역에 대한 방어선을 쳤다. 그 가운데 천상악(쓰촨성과 후난성, 후베이성 관할) 수정공서 주임 쑹시롄의 부대가 8개군 10만명이었다. 쑹의 부대는 바둥, 언스(恩施), 셴펑(咸豊)선을 장악하고 서남 방어의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천섬악변(쓰촨성과 산시성, 후베이성 경계지역 관할) 수정공서 주임인 쑨쩐의 병력은 3개군 4만명 남짓이었다. 쑨의 부대는 우산(巫山), 우시(巫溪) 및 완현(萬縣), 종현(忠縣) 선을 장악하고 쓰촨 북부를 방어하였다. 나머지 수비병력은 쓰촨과 윈난, 구이저우 지역에 나뉘어 있었다. 장췬은 장제스의 오랜 측근으로 행정원장을 역임하였다. 국민정부의 판도가 서남부로 좁혀지자 장제스는 장췬을 지역의 최고 군정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해방군은 국군의 방어배치가 1야전군이 친링을 양공하여 바산(巴山)을 압박한 결과라고 인식하였다. 제2야전군 진격 초기에 마오쩌둥은 허룽의 18병단으로 하여금 친링을 공격하게 하였다. 후쫑난 집단군을 북쪽에 묶어 두기 위해서였다. 산시 남부와 후베이 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원군구 부대도 양공작전에 적극 참여하였다. 해방군 1야전군 주공 부대가 따바산(大巴山)을 지나 쓰촨으로 진격하는 모양을 만든 것이다. 후쫑난은 본래 펑더화이의 1야전군과 오랫동안 싸워 왔다. 해방군의 입장에서는 양공을 펼친 것이지만 후쫑난으로서는 주공방향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도 해방군의 주공 방향을 쓰촨 북부지역으로 판단하였다. 그 길은 옛적부터 중원에서 쓰촨을 공략하는 전통의 통로였으며 교통과 보급도 편리하였다. 구이저우에서 쓰촨으로 가는 통로는 지세도 험하고 교통도 불편하여 대병단이 움직이기에 곤란한 곳이었다. 그리고 바이충시 집단군이 후난성과 광시성에 집결되어 있어 해방군이 마음 놓고 이동하기 힘들었다. 장제스는 해방군이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갈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잘못하면 앞뒤로 적을 맞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친링을 축으로 바둥(巴東)을 보조로 하는 방어계획을 수립했다. 장제스는 뤄광원(羅廣文)부대를 북으로 이동시켜 쓰촨 북부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언제나 상식을 벗어난 전략으로 장제스의 의표를 찔렀다. 마오쩌둥은 2야전군 주력을 우회시켜 구이저우성과 후난성쪽에서 쓰촨쪽으로 치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의 통일 부대배치에 따라 류보청은 계획을 수립했다. 류보청은 제2야전군으로 국군을 더 현혹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야전군 지휘기관에게 3병단을 인솔하고 진푸(津浦)철도와 룽하이(龍海)철도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대병력을 공개적으로 서진시켜 허난성 정저우에 도착하게 한 다음 환영대회에 참가하게 하였다. 류보청 자신도 대회에 가서 대군이 쓰촨으로 진격하여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래놓고 2야전군 주력부대를 비밀리에 남하시켜 후난성과 후베이성 서부로 이동하게 하였다. 류보청은 5병단에게 4야전군이 광둥전역을 위해 헝양, 바오칭으로 이동하는데 편승하여 자신의 부대를 후난성 서부에 집결하게 하였다. 4야전군이 양광지역(광둥성과 광시성)을 호호탕탕 공략할 때 2야전군은 잠행하여 서남쪽으로 우회한 것이다. 류보청은 후베이성 우한에 도착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마오 주석이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다. 좋은 그림이다.”

    1949년 10월, 제4야전군 주력과 제2야전군 4병단은 헝바오 전역과 광둥전역에서 승리하였다. 린비아오는 바이충시 집단군 주력 4개 사단과 위한머우의 광둥 부대를 섬멸한 뒤 승세를 타고 4야전군을 광시성으로 진격시켰다. 광시 군벌의 본거지를 들이친 것이다. 전황에 여유가 생기자 제 4야전군은 병력을 나누어 쓰촨과 구이저우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1월 1일,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북로에서 3병단과 4야전군 47병단으로 좌익 집단군을 편성하였다. 좌익 집단군은 펑수이(彭水)와 진장(黔江)으로 나왔다. 그곳은 쓰촨, 후베이, 후난, 구이저우 경계지역으로 충칭이 코앞이었다. 제4야전군 50군과 42군, 후베이 군구 부대는 우익 집단군으로 편성하여 좌익 집단군과 호응하게 하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쑹시롄 집단군을 펑수이 동쪽 지역에서 섬멸하려고 하였다. 남로에서는 5병단과 10군으로 대우회를 하게 하였다. 남로군은 구이저우로 치고 들어가 구이양과 쭌이를 빼앗은 뒤 쓰촨성 이빈, 나시, 루저우로 진격하여 국군이 윈난성쪽으로 후퇴하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

    국군에게 제2야전군의 행동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국군의 구이저우쪽 방어선은 간단하고 신속하게 돌파되었다. 해방군 남로부대인 제5병단과 10군은 열흘도 지나기 전에 구이저우 경내로 들어가 구이양과 쭌이로 진격하였다. 3병단과 4야전군 부대들도 쑹시롄 집단군의 양익을 돌파, 우링산(武陵山)을 넘어 진격하였다. 국군은 급히 부대배치를 조정하여 구이저우 경내에서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쑹시롄군은 증원해 온 뤄광원 부대와 펑수이, 진장 지역에서 합류하였다. 그들은 우장(烏江)에 의지하여 공격군에 저항하기로 하였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남로군 5병단과 10군에게 전문을 보내 더 빨리 우회하라고 명령했다. 구이저우를 점령한 뒤 3일만 휴식하고 계속 전진하게 하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특히 강조하였다. “이 전역의 핵심은 쑹시롄의 4개 군과 뤄광원의 3개 군이 윈난쪽으로 퇴각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창장 남안에서 그들을 포착하여 섬멸하라.” 류덩은 부대가 연일 폭우속에서 강행군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험준한 산을 힘겹게 넘어가고 있을 때 다시 격려 전문을 보냈다. “사기를 고무시키라. 비용을 써서 전사들의 급양과 건강을 잘 챙겨라. 1인당 매일 4전어치 기름과 소금을 지급하라. 채소 1근(중국의 1근은 500그램)을 반드시 보장하라.” 그와 함께 류덩은 북로로 진격하는 3병단 주력과 제 4야전군 부대에도 만난을 무릅쓰고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당의 점령지 정책을 견결히 집행하여 순조롭게 진군하라고 지시했다.

    진창길을 강행군하는 해방군

    해방군은 악천후 속에서 맹진격했다. 하루에 200리(중국의 1리는 500미터) 가까이 전진한 부대도 있었다. 11월 15일, 남로로 진격하던 5병단과 10군은 구이저우성 성도인 구이양을 점령했다. 16일에는 북로 좌집단군이 펑수이를 점령하고 우장 동안에 접근하였다. 11월 19일, 북로 우집단군은 서쪽으로 퇴각하던 씅시롄 휘하 14병단을 포착, 셴펑 동북지역 바이마산(白馬山)에서 섬멸하였다. 쑹시롄군의 섬멸과 최후에 대하여는 다음에 더 자세하게 기록한다.

    그때, 충칭에 있던 장제스는 해방군이 대우회를 하는 것을 깨달았다. 해방군은 후베이와 후난에서 쓰촨과 구이저우로 우회하여 충칭과 청두를 포위하려 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급히 후쫑난 집단군에게 친링, 따바산에서 남쪽으로 후퇴하여 쓰촨에 들어오라고 명령하였다. 장제스는 20병단과 15병단에게 쓰촨 남부 및 그 동쪽 지역에서 해방군의 전진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후쫑난 집단군의 남쪽 방향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류보청과 마오쩌둥은 제5병단 주력과 10군에게 서북쪽 루저우, 이빈 방향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였다. 3병단과 47군은 즉시 우장을 도하하여 쓰촨 남부지역으로 진격하여 국군 제 15병단과 20병단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에 따라 3병단과 5병단 주력은 국군을 신속하게 우회하여 포위하였다.

    1949년 11월 28일, 제 3병단 주력과 47군은 국군 20병단과 15병단 병력 3만명을 난촨(南川) 북쪽 지역에서 섬멸하였다. 승세를 탄 해방군은 충칭 외곽에서 국군 일부를 섬멸하였다. 11월 29일 국군은 청두로 퇴각하고 인민해방군은 30일 충칭을 점령하였다. 1949년 12월 8일, 제 3병단및 5병단 주력과 47군, 50군 등 공격부대는 각각 네이장(内江), 통량(铜梁), 광안(廣安) 지역을 점령하여 국군의 구이저우, 윈난 방향 퇴로를 차단하였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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