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비아오와 바이충시②
    '바이충시 군대 섬멸되다'
    [국공내전-65] 해방군, 중국 제2의 섬 하이난다오를 점령하다
        2021년 03월 10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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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군, 헝바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

    칭수핑 전투는 유례없이 참혹하였다. 광시군의 맹렬한 반격에 종웨이가 지휘하는 49군은 피로 목욕하며 싸웠다. 부대원들의 희생 속에 해방군은 겨우 전장에서 탈출하였다. 광시군은 승리했지만 주력의 위치가 드러났다. 바이충시는 이 일전으로 전황을 바꿨다고 생각하고 후난성과 광시성의 문호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주력을 헝양과 바오칭(寶慶)에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른바 헝바오에서 4야전군과 결전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작은 제갈량이 걸려 들었다.” 린비아오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13병단 주력으로 서로군을 편성하고 4병단과 15병단으로 동로군을 편성했다. 두 갈래 부대로 광둥 북부와 즈장(芷江: 즈장 둥족侗族 자치주)을 점령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광시군의 ‘후난, 광둥 연합 방어선’을 돌파한 뒤 바이충시 집단군의 구이저우와 윈난쪽 퇴로를 끊을 생각이었다. 중로군 5개군은 협동작전으로 공격하여 일거에 헝양의 광시군을 섬멸할 계산이었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의 보고에 대하여 회신 전문을 직접 썼다.

    1. 5월 12일에 보낸 5개군 협동작전 부대배치에 동의한다.

    2.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부대는 기동성이 강하고 전투력이 강하다. 각급 간부들은 적을 경시하지 말라. 작전방법은 각개섬멸하는 것이 적당하다.

    린비아오와 덩즈후이는 헝바오공로(헝양-바오칭)의 부대에게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서로군 주력은 바오칭과 치양으로 동진하여 전투준비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10월 5일 오후, 중로군 일부와 동로군이 포위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바이충시는 4야전군이 자신의 부대를 우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 부대에 광시 방향으로 급히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린비아오는 휘하 부대에 추격하게 하였다. 해방군은 치양 북쪽에서 광시군 7군과 18군을 포착하여 포위하였다. 10월 7일, 린비아오가 군사위원회에 상황보고를 하자 10월 10일 마오쩌둥이 군사위 명의로 회신을 보내왔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의 결정에 찬성했다.

    1. 당신들은 광시군 4개 사단을 치양 북쪽에서 포착했다. 나머지 부대도 구원하러 올 테니 후난, 광둥 경계에서 바이충시군 주력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2. 당신들 제의에 완전히 동의한다. 천겅 병단은 샤오관(韶關)과 잉더(英德)에서 구이린 류저우를 직접 치고 들어갈 것이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바이충시 비적을 섬멸하는데 협력할 것이다. 이 계획대로라면 작전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시 시행하라.

    3. 덩화의 병단 및 쩡셩(曾生), 린핑(林平)의 부대는 자력으로 광저우를 빼앗으라. 부대배치는 서로 상의한 뒤 보고하라.

    4. 현재 샹탄(湘潭)의 2야전군 부대는 필요시 치양 지역의 바이충시 부대 섬멸작전에 참가하라.

    원 표시 위아래가 창사와 광저우, 중간 별 표시 부분이 헝양

    린비아오 주력부대와 2야전군, 그리고 3야전군 일부 병력까지 동원하여 바이충시 부대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바이충시 집단군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마침내 린비아오의 숙원이 이루어졌다. 광시군 주력을 포위한 해방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마음껏 적을 두들겼다. 이 전역에서 해방군은 바이충시 집단군의 정예 주력인 7군과 48군 대부분을 섬멸했다. 그리고 해방군 서로군 주력은 62사단을 섬멸했다. 광시군은 전군이 섬멸당할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정예 4개 사단이 섬멸되었다. 바이충시는 헝바오 전투에서 린비아오에게 치명적 일격을 당했다. 바이충시는 헝바오 전투를 계기로 더 이상 해방군과 겨룰 힘을 잃었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용병을 한다 하더라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더구나 100만 대군에다 중무장한 린비아오의 4야전군의 공격에 바이충시는 피하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0월 중순, 4야전군 4병단과 15병단, 쩡셩이 지휘하는 양광종대는 광둥전역을 시작하여 광저우를 점령했다. 헝바오, 광둥 전투를 거치며 국군은 방어능력을 상실하였다. 완패를 면하기 위해 바이충시는 남은 5개 병단 15만 병력으로 후난성 둥안(東安), 신닝(新寧)과 광시성 싱안(興安), 공청(恭城), 양쑤어(陽朔) 등을 수비하였다. 구이린을 중심으로 샹구이 공로(후난-구이린)에 방어선을 쳐 광시성을 수비하고자 한 것이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와 마오쩌둥은 치양에 있는 4야전군에게 구이린, 류저우 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국군의 구이저우 쪽 퇴로를 막은 뒤 바이충시 집단군과 위한머우 패잔부대를 광시성안에서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린비아오와 덩즈후이, 참모장 샤오커(肖克)는 부대를 서로군과 남로군, 중로군으로 편성하여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서로군은 국군의 방어선을 우회, 서쪽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으며 남로군은 국군의 하이난다오 쪽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중로군은 국군을 견제하여 잡아두고 서로군과 남로군이 퇴로를 막으면 함께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린비아오는 바이충시 집단군을 크게 포위하여 섬멸할 함정을 팠다.

    11월 5일, 바이충시는 구이린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리핀셴(李品仙), 샤웨이(夏威), 쉬주이(徐祖贻), 황제(黄杰) 등 광시군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하였다. 바이충시는 광시성이 이미 수렁에 빠져 오래 지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두가지 방안을 제출했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가 친저우(欽州)에서 하이난다오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다른 방안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구이저우와 윈난 경계지역에서 윈난성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서쪽과 남쪽을 놓고 이론이 분분하자 바이충시가 나서 하이난다오 쪽 후퇴를 결정하였다. 그는 황제(黄杰)가 지휘하는 1병단을 구이저우 동부로 보내고 장진의 2병단은 남하하게 하였다. 11병단도 앞의 두 병단과 함께 레이저우 반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로 가는 통로를 열 계획이었다. 나머지 부대들은 위 부대들의 이동을 엄호하게 하였다.

    11월 6일, 4야전군 서로군이 비밀리에 출격했다. 보름 뒤 서로군은 광시성 경내에 들어섰다. 15일에는 남로군이 출격하여 광시군이 하이난다오로 가는 퇴로를 끊기 위해 움직였다. 중로군은 18일, 샹구이 철도(湘桂鐵道: 후난-구이린을 잇는 철도)를 따라 공격하며 전진하였다. 3로 대군이 노도처럼 밀려들자 바이충시 집단군은 한덩어리로 몰리게 되었다. 하이난다오로 가는 도로에 광시군이 벌떼처럼 붐비게 되었다.

    이 작전의 관건은 광시군이 하이난다오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느냐 여부였다. 남로군 총지휘를 맡은 천겅은 부대에 피로와 희생을 무릅쓰고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광둥성과 광시성의 목구멍을 틀어막아 광시군의 후퇴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때 린비아오는 남로군이 지나치게 돌출하고 특히 천겅의 4병단이 고립될 우려가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4병단에게 광저우의 위한머우 집단군을 섬멸한 뒤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로군이 국군의 남쪽 이동을 차단하는데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천겅은 린비아오의 명령에 의구심을 품었다. 자신의 부대를 광저우 쪽으로 돌리면 레이저우 반도와 하이난다오에 대한 압력을 줄여 바이충시 집단군이 새어나갈 위험이 있었다. 천겅이 자신의 판단을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자 마오는 11월 24일 린비아오에게 회신하고 그것을 천겅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천겅은 1개 군을 여전히 적의 측후방으로 우회하게 하라. 나머지 주력은 광시 경내로 진격하지 말라. 렌장(廉江), 신이(信宜)등 광둥 지역에서 적을 기다려 섬멸할 태세를 갖추라. 일부 부대는 위한머우 공격에 함께 하라.” 마오쩌둥의 지시는 린비아오와 천겅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남로군은 우선 광시군의 남쪽 후퇴로에 저지선을 치고 대기하게 되었다.

    바이충시는 남로군이 비교적 돌출한데다 자신의 남쪽 철수로를 차단한 것을 보았다. 그는 3병단과 11병단에게 남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광시로 진출한 13병단에게 북쪽으로 돌아가 공격에 가담하게 하였다. 남북으로 협격하여 남로군을 해치우고 포위망을 뚫으려는 것이었다.

    바이충시 집단군은 외로운 맹수처럼 싸웠다. 4야전군 전선지휘부는 즉시 부대배치를 조정했다. 린비아오는 북로군을 신속하게 광시로 진격하게 하였다. 리쭤펑이 지휘하는 43군도 광저우에서 광시로 서진하게 하여 남로군의 작전에 협력하게 하였다. 24일, 광시군은 렌장(廉江), 우밍(茂名), 신이(信宜)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며 수비를 굳힌 해방군의 완강한 반격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시군은 천겅의 4병단에게 보바이(博白)에서 포위되었다. 남쪽 전선의 위한머우 부대 일부도 달아나다가 렌장(廉江) 일대에서 4병단 13군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했다.

    바이충시의 남부 공격이 좌절된 뒤 1병단과 10병단, 11병단 잔여병력은 각각 광시성 남부 도시인 난닝, 친저우 지역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4야전군 서로군과 남로군, 중로군등 대군에게 끝내 포위당했다. 마오쩌둥의 대포위 전략이 마침내 바이충시 집단군을 옭아맨 것이다. 12월 14일, 압도적 대군에 포위당한 바이충시 집단군은 흙더미처럼 무너졌다.

    헝바오 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하는 해방군

    항바오 전선의 국군 병사들

    린비아오는 전투 시작 전 각 부대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이충시를 사로잡으라고 명령하였다. 바이충시는 광시성에서 숨 쉴 틈 없이 독전했지만 국면을 바꾸지 못하였다. 그의 지휘소는 갈 곳도, 둘 곳도 없게 되었다. 바이충시의 오랜 친구인 청스위안(程思遠)은 이렇게 회상했다.

    “1949년 11월 21일, 인민해방군 중로군이 광시 북부를 공격하였다. 해방군이 샤오롱장(小溶江)에서 광시군 황제 병단의 71군을 격파하자 바이충시는 곧바로 지휘소를 구이린에서 남쪽인 류저우로 옮겼다. 11월 24일, 해방군 선봉부대가 구이저우에서 싼장(三江)으로 진격해 왔다. 바이충시는 다시 류저우에서 광시성 최남단 난닝으로 이동하였다. 12월 3일 8시 40분, 황제는 바이충시에게 전화를 걸어 부대를 난닝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보고했다. 이날 10시 바이충시는 비행기를 타고 하이난다오로 탈출했다.”

    다음 날, 바이충시는 국민당 하이난다오 행정장관 천지탕(陳齊棠)에게 모든 선박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광시군을 하이난다오로 이동시키기 위해서였다. 12월 8일, 바이충시는 애가 타서 황제와 쉬지밍(徐启明)에게 명령했다. “각 부대는 싸움을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라. 경무장으로 분산하되 안전이 상책이다.” 12월 9일, 그는 암담한 심정이 되어 좌우에 말했다. “린비아오가 길을 나누어 끝까지 추격해 오는구나. 부대들이 모두 패하거나 흩어졌으니 과연 얼마나 배를 탈 수 있겠는가?”

    바이충시는 그날 배 위에서 잤다. 10월에서 12월까지 백일 남짓한 기간에 그의 몇십만 병력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이난다오는 바이충시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였다. 장제스도 하이난다오를 중시하고 있었다. 타이완으로 후퇴한 장제스는 저우산(舟山), 진먼(金門), 완산(萬山), 하이난다오를 해상 철쇄로 삼고자 하였다. 이 섬들이 서로 의지하여 타이완을 방어하게 할 계획이었다. “대륙 반격”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장제스는 하이난다오에 10만명의 보병을 배치하였다. 50척의 군함과 40여대의 항공기도 배치하여 ‘육해공 입체 종심방어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작업을 하이난다오 방어사령관 쉐웨가 총괄 지휘하였다. 장제스는 하이난다오에서 다시 한번 진먼다오의 승리를 재현할 생각이었다.

    해방군, 하이난다오를 공격하다

    아무리 기세를 탄 해방군이라 할지라도 하이난다오를 일거에 점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달 전 해방군은 진먼다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1만여명이 섬멸당한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레이저우 반도와 하이난다오 사이에는 징저우(琼州) 해협이 자리하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파도는 높은데 4야전군은 배 한 척 가진 게 없었다. 공중엄호도 없었으며 해전경험도 없었다.

    광둥성과 광시성 전투가 끝난 후 중앙군사위원회는 린비아오에게 하이난다오 도해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바이충시를 격파했으니 전략적으로 중요한 하이난다오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린비아오는 15병단 사령인 덩홍(鄧洪)에게 임무를 맡겼다. 덩홍은 한센추의 40군과 리쭤펑의 43군에게 도해작전을 준비하게 하였다. 양군 합쳐 총병력은 10만명이었다. 12월 26일, 린비아오는 중남국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는 후베이성 우한에서 하이난다오 도해작전을 지휘했다.

    하이난다오는 광둥성 레이저우 반도와 마주하고 있다. 양쪽에서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정도이니 가까운 거리이다. 서북쪽으로는 광시성 친저우시와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3만 평방킬로미터이며 크기로는 중국 제2의 섬이다. 타이완 섬이 3만 6천 평방킬로미터이니 그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제주도가 2천 평방킬로미터에 못 미치니 매우 큰 섬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넓은 섬을 공격하는데 공격용이나 상륙함 한 척 없는 해방군으로서는 진먼다오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5병단 작전회의에서 40군과 43군은 작전방식을 놓고 숙의했다. 작전 시기에도 이견이 있었고 목선으로 도해할 것인지 상륙함을 구매할 것인지에도 이견이 있었다. 15병단 부사령원 겸 40군 군단장 한센추는 “빠른 시일 내 하이난다오 전역을 시작해야 한다. 적이 자리를 잡고 소위 ‘대륙 반격’의 해상배치를 하기 전에 쳐야 한다. 적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면 방어를 강화하여 토벌이 어렵게 된다. 미제국주의가 손을 뻗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15병단은 마침내 조기작전을 결정했다. 육군을 해군 상륙부대로 변화시키고 목선을 이용해 도해작전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949년이 가기 전에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원 표시 위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구이린 류저우 난닝 광저우, 별 표시가 하이난다오

    마오쩌둥은 하이난다오 작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9년 마지막 날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에서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내 15병단의 방침에 동의했다.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 섣불리 움직여 실수를 범하면 안된다.”고 경계하였다. 마오쩌둥은 전문에서 하이난다오 작전의 특징을 상세히 지적하고 시기도 못박았다. “하이난섬 문제는 1950년 봄여름 두 계절 안에 해결하라.” 마오의 전문에 따라 15병단은 음력 설 이전에 하이난섬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린비아오는 15병단 사령원인 덩홍과 정치위원 라이취안주(赖傳珠), 참모장 홍쉐즈(洪學智)에게 직접 레이저우 반도에 가서 지휘하라고 명령했다.

    도해를 준비할 때 40군과 41군은 노획한 자동차 엔진을 떼어내 목선에 장착했다. 돛이 달린 기선으로 개조한 셈이었다. 이 ‘기범선’에 포 2문씩 양쪽에 장착하니 ‘토포정(土炮艇)’이 되었다. 이 토포정은 목표가 작고 은폐하기가 쉬워 적에게 접근하기 좋았다. 가격도 싸고 시간도 줄일 수 있으니 단시간 내 많은 장비를 갖출 수 있었다. 레이저우만과 안푸항(安铺港)에는 이런 토포정으로 가득찼다.

    1950년 2월 10일, 린비아오는 리쭤펑에게 43군에서 1개 연대를 보내어 시험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내어 지시했다. “1개 연대가 시험공격하는데 동의한다. 다른 부대도 기회를 보아 속속 도해하라. 하이난다오 해방을 앞당겨라.” 마오쩌둥이 굳이 이런 전문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지나친 잔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린비아오는 작은 지시는 물론 쓰핑 사수와 같은 중요한 명령도 곧잘 자신의 판단대로 하곤 하였다.

    3일, 40군과 43군 상륙정들이 출격했다. 해방군은 4차례에 걸쳐 몰래 바다를 건넜다. 그들 가운데 많은 배들이 섬으로 들어가고 안전하게 돌아왔다. 린비아오는 계속 몰래 도해하라고 명령하였다. 교두보를 확보하여 작은 승리를 쌓아가라고 지시했다. 시기가 무르익으면 내외에서 협공하여 일거에 하이난 섬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린비아오의 하이난다오 전역 구상과 부대 배치는 한센추의 반대에 직면했다. 한센추는 몰래 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리와 형제부대가 연속 네 차례 몰래 도해했는데 적이 분명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적은 이미 모터카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저지하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병력을 분산하면 허송세월을 하게 되고 지구전이 된다. 그러면 전기를 놓치게 된다. 우리는 몇 번 도해하고 정찰하여 적의 부대 배치를 파악했다. 대규모 상륙으로 화력을 강화해야 한다. 부대와 병력이 많으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한센추는 린비아오에게 조기에 대규모 도해작전을 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린비아오는 계속 몰래 도해작전을 하라고 명령했다.

    한센추의 건의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선공과 어민으로부터 징저우 해협의 풍향과 조류를 들은 바 있었다. 한센추는 매년 정월에서 청명까지 북풍과 편북풍이 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는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여 도해에 유리하다고 하였다. 곡우 때가 되면 남풍으로 바뀌고 파도가 거세어져 도해에 불리하게 된다. 이제 곧 곡우가 닥쳐오게 되자 한센추는 불안해졌다. 그는 병단과 4야전군에 기나긴 전문을 써서 보냈다. 대규모 도해작전과 소규모로 몰래 도해하는 것의 이익과 폐단을 써서 린비아오와 중앙군사위의 마오쩌둥에게도 보냈다.

    한센추의 전문을 보고 마오쩌둥은 1년 전 진먼다오 실패의 교훈을 상기하였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내 의견을 제기하였다. “1차 도해에 충분한 병력과 3일 이상의 양식을 충족시켜야 한다. 교두보를 확고히 세우고 언제라도 독자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후방지원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마오는 한센추의 건의를 지지한 것이었다. 위에서 지시하고 아래에서 재촉하니 린비아오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한센추에게 도해와 상륙 후 전투를 통일 지휘하게 하였다. 한센추는 한국전쟁 때 참전하여 펑더화이 밑에서 조선인민지원군 부사령원 겸 19병단 사령원을 지냈다. 린비아오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여 관철한 것을 보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이난다오를 공격하는 해방군 범선

    1950년 4월 16일 저녁 레이저우만에 가득찬 배가 일제히 출발했다. 선대는 국군 함정의 저지를 물리치고 하이난다오로 향했다. 40군과 43군은 교두진지를 점령하고 종심으로 확대하였다. 대부대가 상륙하자 미리 상륙했던 부대들도 국군의 배후에서 공격하여 앞뒤 협공이 이루어졌다. 한 시간도 못되어 쉐웨가 고심하여 설계한 하이난다오 입체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한센추는 노획한 자동차로 즉시 쾌속부대를 편성하여 전 전선에서 추격에 나섰다. 기세를 탄 해방군의 공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이난 섬에 있던 국군은 모두 섬멸당하고 해방군은 5월1일 하이난다오 전역을 점령하였다.

    하이난다오 점령후 기념촬영한 해방군 부대

    하이난다오 전역이 끝난 후 중공 중앙은 린비아오를 소련으로 보내어 정양하게 하였다. 그의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린비아오는 아들 린리궈와 함께 두 번째로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에서 린비아오는 스탈린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처음 연회에서 스탈린은 린비아오를 ‘무적원수’라고 불렀다. “린비아오 동지, 지금 중국에 평화가 왔소. 군인이 쓸 데가 없어진 거요. 당신 이제 겨우 43세인데 애석하지 않소?” 린비아오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모두 평화를 위한 겁니다. 중국인은 본래 평화를 애호하지요.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박수가 울려 퍼졌다.

    베트남으로 달아난 국군 패잔병

    바이충시 집단군의 패배로 해방군 4야전군은 후베이성과 후난성, 광둥성과 광시성, 하이난다오를 점령하였다. 바이충시 집단군에 속해있던 국군 중 일부는 베트남으로 달아났다. 그 과정을 소개하기로 한다. 1949년 12월 후난과 광시, 윈난성에서 패배한 국군 가운데 3만명이 넘는 병력이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으로 가서 3년 6개월간 머물렀다.

    황제(黄杰)는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장제스 직계로 분류된다. 하지만 3대 전역의 패배로 장제스 직계 중앙군이 대부분 섬멸당한 후에는 끝까지 바이충시의 지휘에 따랐다. 황제가 지휘하는 1병단은 후난, 광시 전투에서 패배한 뒤 남은 병력 17,000명을 이끌고 쿤룬관에서 서쪽으로 후퇴했다.

    12월 4일, 황제는 광시성과 베트남 국경을 따라 윈난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황제는 광시성 서쪽에 위치한 바이서(百色)가 이미 해방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2월 9일에는 국민정부 윈난성 주석인 루한(盧漢)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오갈 데가 없게 된 것이다. 그때 화중 군정장관 바이충시가 황제에게 전문을 보내 “지금 정세에서는 전투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라. 부대를 이끌고 하이난다오로 가라”고 권했다. 장제스 직계의 맏형격인 천청도 타이베이에서 황에게 전문을 보냈다. “아우의 부대가 베이하이(北海), 팡청(防城)에서 나오면 정세로 보아 하이난에 가기 어려울 듯하다. 서쪽 월남으로 가서 근거지를 가지는 것만 못하다. 그후 기회를 보아 행동하는 것이 어떤가?”

    황제는 장교 회의를 열어 의논한 뒤 방향을 정하기로 하였다. 회의에서 황제가 결심을 밝혔다. “월남으로 간 후 길을 빌려 타이완으로 가겠다.” 황제는 천청과 바이충시에게 전문을 보내고 프랑스 주 인도차이나 군 총사령부등에도 전문을 보내어 이같은 생각을 알렸다.

    12월 12일, 황제 병단의 참모장 허주번(何竹本)과 프랑스 량산(諒山: 베트남 북부도시이다.) 변방군 참모장이 ‘가도협정(길을 빌리는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중국군에게 500명 규모로 한 대오를 편성하여 베트남에 들어오게 하였다. 무기는 잠시 프랑스군이 맡기로 하였으니 사실상 무장해제를 한 셈이다. 프랑스군은 연도에서 안전을 위해 경계병을 배치하고 식료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또 중국군은 기율을 엄정히 할 것이며 베트남의 프랑스 상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였다.

    황제의 부대는 닝밍(寧明)을 거쳐 국경에 이르렀다. 1949년 12월 13일 오전 9시부터 권속, 평민, 부상병부터 국경을 넘었다. 황제 병단의 병사들과 뒤에 따르는 경찰, 학생등이 12월 18일 프랑스가 지정한 멍인(蒙陰)에 도착했다. 그후 광시계 부대도 국경을 넘어왔다. 프랑스군은 감독관을 보내 즉시 광시군을 무장해제하고 수용하였다.

    베트남의 국군 패잔병

    멍인은 석탄 폐광지역이어서 삼면이 산이었다.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정오경에나 겨우 햇볕이 들었다. 숙소에는 전기도 없었으며 모기와 벌레가 끓었다. 병사들은 벌목을 하고 풀을 잘라 겨우 막사를 지었다. 보름뒤 겨우 안둔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수시로 와서 금품을 빼앗거나 몰수해 갔다. 주식은 프랑스군이 제공하는 1인 쌀 4량(1량은 37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물과 기후가 맞지 않고 배가 고파 병에 걸렸으나 약품이 부족해서 사망자가 끊이지 않았다.

    리쫑런, 바이충시의 부대는 중국을 30년간 종횡한 정예였다. 그러나 1949년 하반기에 해방군에게 모두 섬멸당해 사라졌다. 광시계에서 남은 병력은 장진의 3병단 126군과 장쩌샹과 쉬지밍의 10병단 46군 등이었다. 이들은 룽저우(龍州)에서 베트남으로 달아났다. 양광 지방의 부대도 뒤를 따라갔는데 모두 합하면 1만명에 이르렀다. 광시군도 프랑스군이 정한 지역에 머물렀는데 멍인보다는 자연환경이 나았다. 그밖의 생활은 황제부대와 같았다.

    국민정부 직계 중앙군인 26군 3,879명도 나중에 베트남으로 합류했다. 8병단 부사령원 겸 26군단장 펑쭤시가 인솔하여 윈난성에서 베트남 북북 차이저우(菜州)로 갔다. 그밖에 베트남의 국민당 수령인 우훙칭(武鸿卿)이 광시의 루다오위안(鲁道源)의 11병단 일부 병력을 받아 ‘월남 건국군 경위여단’으로 편성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이들도 멍인으로 보냈다.

    1950년 1월말까지 베트남으로 도주한 국군은 모두 33,400여명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장제스 직계인 윈난 동남부 유격부대 2,000여명이 해방군의 토벌을 피해 베트남으로 갔다. 이들은 1951년 7월 12일 홍허(红河)를 몰래 건너다 후치민을 따르는 월맹 부대의 공격을 받아 사단장 위지유 이하 과반수가 물에서 죽었다. 간신히 강을 건넌 병사 1,023명을 사단 참모장 장야룽이 지휘하여 1951년 7월 푸궈다오(富國島)에 도착했다. 국군 패잔병이 자꾸 베트남으로 가자 신중국 외무부장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저우는 프랑스 당국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프랑스 당국은 식민지인 베트남에 국공 내전의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하여 국군이 체류한 3년 6개월간 무장해제하고 사실상 연금상태를 유지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가도협정’을 맺을 때는 베트남의 길을 빌려 타이완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중국은 타이완의 병력을 증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프랑스에 항의하였다. 프랑스는 중국 내전에 불개입하는 방침을 가지고 국군 패잔병을 월맹에 대항하는 기동부대로 편성할 것을 고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폭발하자 미국은 베트남에 체류 중인 국군을 ‘반공대륙(反攻大陸 :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대륙을 회복하기 위해 본토로 반격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구호이다.)부대로 쓰기를 원하였다. 본인들 의사와 관계없이 국제정세에 휘말린 것이다.

    베트남 체류 1년 후인 1950년 12월 25일 절망에 빠진 황제 이하 국군 병사들은 단식을 벌이며 프랑스군에 항의했다. 1만여 병사들은 비행장으로 가서 항의를 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프랑스군에게 막혔다. 단식으로 급양 등 처우는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타이완으로 돌아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후 타이완 당국과 프랑스 사이에 지리한 교섭을 거쳐 1953년 4월 하순이 되어서야 베트남에 체류하던 국군 3만여명이 타이완 까오슝(高雄)으로 돌아갔다.

    <국공내전>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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