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재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호소
    "누더기 아닌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예방 취지 위해 핵심사항, 법안에 반드시 담아야"
        2021년 01월 05일 06: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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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재해 피해당사자와 유가족들은 일터에서 죽거나 다친 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과정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을 위해선 경영책임자와 원청·발주처 처벌, 하한형 형사처벌과 인과관계 추정 도입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주최로 산재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들은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정문 단식농성장 앞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들은 ▲안전관리 담당 이사가 아닌 경영책임자 처벌 ▲기업비용으로 처리되는 벌금형이 아닌 하한형 형사처벌 ▲소규모 하청업체 처벌이 아닌 원청 처벌 ▲공기단축 등의 강요로 사고 유발하는 발주처 처벌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불법적 인허가 등 공무원 책임자 처벌 ▲반복적 사고 및 사고은폐 기업에 대한 인과관계 추정 ▲직업병, 조직적 일터 괴롭힘, 50인 미만 사업장 등 사각지대 없는 법 적용 등을 반드시 법안에 담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가족이 발표한 요구사항은 고인이 된 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산재 피해 입증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라, 산재 예방이라는 중대재해법의 취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핵심 사항이기도 하다. 8일 중대재해법을 처리하기로 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피해 당사자인 유가족의 이러한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탁상공론에 그친 누더기 법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사진=유하라

    안전관리담당 이사가 아닌, 예산과 경영권 쥔 경영자 처벌해야

    정부는 국회에 제출한 의견에서 ‘안전관리이사 및 경영자’를 법 적용 대상으로 적시했다. 정부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거치면서 ‘안전관리이사 또는 경영자’로 잠정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전관리이사와 경영자를 모두 처벌하는 방안에서 안전관리담당 이사나 경영자 둘 중 하나만 처벌하는 내용으로 후퇴한 것이다.

    이날 간담회의 사회를 본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는 “한 사람에게 안전관리를 담당하도록 하고 사고가 나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가족들은 법의 실효성과 사내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경영자에게 산업재해의 책임을 묻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 이한빛PD의 동생 이한솔 씨는 “경영책임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경우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안전보건 담당자에게 국한시키고 꼬리자르기로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 씨는 “고 이한빛PD 대책위에서 CJ ENM 사장의 공식 사과를 받자 자회사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제작사들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자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부족하지만 방송업계의 악행도 개선돼가고 있다”며 “누가 어떻게 책임지느냐가 중요하다. 말단 관리자는 결정 권한이 없고 (안전보건 조치를 위한) 예산 권한도 없기 때문에 경영책임자가 바뀌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경영책임자 처벌은 우선적으로 적용돼야 하는 법안의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위험의 외주화 막기 위한 원청·발주처 처벌, 하한형 도입
    “작은 하청업체 처벌 말고 원청 처벌하라”

    위험의 외주화는 중대재해법의 출발이기도 하다. 원청 대기업이 생명·안전 업무를 모두 하청업체에 떠넘기면서 가격 입찰로 선정되는 하청업체는 안전인력을 감축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했다. 자연스럽게 산재 사망사고는 하청 노동자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구의역 김군 사고와 태안화력발전 고 김용균 노동자의 사고도 위험한 업무를 하청업체에 떠넘기면서 발생한 사고였으나, 원청은 산재 사고가 벌어질 때마다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해왔다.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피해노동자인 김영환 씨는 “조선소는 공기단축을 위해 휴일에도 출근하고 잔업을 강요하는 게 일상화돼있는 곳”이라며 “말이 좋아 협력업체지, 실상은 원청의 책임자가 하청업체 소장, 부장, 반장, 팀장을 단체 메신저 방에 들어오게 해 작업·잔업 지시 등을 모두 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씨는 “그런데도 하청노동자만 죽어나가고 다친다”며 “처벌이 약한 걸 잘 아는 원청에서 뭐가 무서워서 하청노동자 안전까지 챙기겠나. 하청노동자를 살리려면 반드시 권한이 있는 원청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사처벌의 하한형 도입도 핵심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산재에 따른 수위 높은 처벌 규정이 있지만 법원에선 대부분 집행유예나 벌금에 그친다. 솜방망이 처벌을 해온 법원의 관행을 깨기 위해서라도 하한형 처벌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김 씨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6명이 죽고, 25명이 다쳤지만 이에 대한 책임으로 감옥에 간 사람은 없다. 말단관리자부터 조선소장, 하청업체 대표, 원청인 삼성중공업 대표도 마찬가지다. 업무상과실치사상과 산안법 위반이 인정됐지만 몇 백만원 벌금이나 집햅유예가 고작”이라며 “이러니 누가 사람 죽는 걸 겁내겠나”라고 반문했다.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한 고 김태규 노동자의 누나 김도현 씨는 공기단축 등을 강요해 사고를 유발한 발주처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건설 산재사고가 발주처 때문에 일어난다. 한익스프레스처럼 무리하게 공기단축을 요구하고 건설비용을 깎아서 안전이 지켜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발주처의 책임이 크다. 아예 위험한 설비나 공법을 발주처가 요청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현행 산안법은 발주처의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씨는 “발주처는 고사하고 하청업체 현장 소장과 차장만 징역 1년과 10월을 선고 받았을 뿐 하청업체 대표조차 처벌받지 않았다”며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았다면 이런 처벌도 없었을 것”이라며, 발주처 처벌과 하한형 형사처벌 도입을 촉구했다.

    소규모 사업장 적용유예, 법의 사각지대 넓히는 일

    법안 논의 과정에서 적용유예 대상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부칙에 50인 미만 사업장 4년 적용유예를 포함한 데 이어, 고용노동부와 법무부는 100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을 유예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최근 중소기업벤처부는 300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유예 범위를 넓히는 의견을 냈다. 유가족들은 사실상 껍데기뿐인 중대재해법을 처리하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50인 미만 사업장을 적용 유예할 경우, 광주광역시 하남 산단에 있는 생활폐기물 처리업체 조선우드에서 일하다 파쇄기에 끼어 사망한 고 김재순 노동자나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한 고 김태규 노동자 등 대부분 노동자들이 중대재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고 김재순 노동자 아버지 김선양 씨는 “조선우드는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이다. 이런 사업장에 법 적용을 4년 유예한다면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계속 죽어도 된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혜진 공동대표는 “법안을 얼마나 걸레짝으로 만들려 하느냐”며 “작은 사업장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조선우드와 같은 사업장은 벌써 두 번째 죽음이다. 그럼에도 사업주는 떵떵거리며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데 이런 사업장에 왜 중대재해법을 적용유예해야 하나”라고 비판했다.

    반복적 사고, 산재 은폐 사업장에 한해 인과관계 추정 조항 필요

    민주-국민의힘 양당은 인과관계 추정 조항 삭제를 유력하게 논의하고 있다. 실제로 박주민 의원 발의안엔 이 조항이 포함돼있으나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이 조항을 삭제한 법안을 이후 발의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산재 피해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인과관계 추정 조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밝혔다. 모든 정보를 기업이 독점하는 상황에서 유가족 스스로 산재 피해를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한솔 씨는 “명예회복과 진상조사 위한 요구를 시작했을 때 회사는 출퇴근 정보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다 보니 개인이 근무태도가 태만했다거나, 직장 내 관계 좋지 않았다며 개인의 문제로 돌렸다”며 “결국 저희가 6개월간 회사 모르게 동료들 몰래 찾아다니면서 조사를 했다. 만약 기업이 조사 사실을 알게 됐다면 결과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현 씨도 “화물용 승강기에 안전 바가 없었고, 추락방지시설도 없었다. 심장재세동기도 없었고, 안전교육도 없었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현장이었다”며 “이 모든 걸 제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조사했다. (조사과정에서) 회사는 저를 조롱하고 쫓아내기도 했다. 동생이 죽었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조사하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고 말했다.

    양당은 인과관계 추정 조항이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고를 조사해 입증하는 검찰과 경찰의 책임을 기업한테 전가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손익찬 변호사는 “모든 경우에 무조건 인과관계 추정 조항을 적용하자는 게 아니다. 5년간 다수의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산재 은폐를 위한 조직적 시도가 발견됐을 때에 한해 인과관계를 추정하자는 것”이라며 “경험적으로 입증된 경우에 한해 입증책임을 분배하자는 의미라 위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손 변호사는 “산재 범죄는 일반 범죄에 비해 재범률이 굉장히 높다. 조선우드 사례에서 보듯 같은 사업장에서 반복적으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그 사업장이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관리가 잘못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수많은 안전조치 중 한 두 가지라도 조치를 했다면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런데 그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적인 산재 은폐 시도에 대해선 “그 조직적인 시도 자체가 검사가 사고의 책임을 입증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은폐 시도가 확인되는 한에서 인과관계를 추정하자는 것”이라며 “이는 산재 은폐 시도를 차단하고 잘못을 드러내어 수사에 협조하게끔 하고자 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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