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한’ 자리를 고수하며
    맥과 흐름 짚고 길을 찾아가는 사유
    [서평]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심광현·유진화)
        2020년 12월 06일 08: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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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듯하다. 기술-산업적인 변화와 도시-문화적인 변화는 급속하게 일어나는 반면 그런 변화가 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네 삶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수행할 수 있는 참조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인류세-자본세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 4차산업혁명과 인공지능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한다. 대학에서 양산되는 담론 자체가 현실의 변화를 좇아가기도 벅찬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학이 그만큼 파편화되고 상품화된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유는 현실에 관한 지식-정보들만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보는, 일정한 머무름과 천착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정보의 홍수에 휘말리면 사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도 거리를 두고, 사유의 ‘고독한’ 자리를 고수하면서 물길의 맥과 흐름을 집고 그것이 보여주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 문명 전환을 위한 지식순환의 철학과 일상혁명 스토리텔링』(심광현 · 유진화)은 바로 그런 사유를 하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참조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너무 성급하고 쉽게 현재의 상태 및 미래의 변화를 추적하고 자신의 판단 및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유가 어려운 것은 우리네 삶이 어렵기 때문이며 글이 어려운 것은 사유의 참조지점을 제공하는 글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쉬운 글은 그것을 이끌어가는 생각이 짧고 우리네 복잡한 삶을 재단하고 일면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도 읽기 쉽거나 친절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그것은 삶과 사유 모두에서 극도의 충실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도 그만큼의 충실성을 견지해야 하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라는 텍스트는 두 가지 충실성의 산물처럼 보인다. 하나는 오래전부터 예술-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 사이에서의 통섭과 순환을 연구해 온 저자 자신의 지적 성실성과 『문화/과학』, ‘문화연대’, ‘맑스코뮤날레’ 등에서의 지적 소통 및 ‘지식순환협동조합’에서 대중적인 지식 순환과 교육 실험을 몸소 실천해 온 실천적 성실성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상을 함께 온 부부가 지난 8년 동안 공동 작업을 통해서 학문적 형식지와 일상적 암묵지 사이의 긴장과 갈등, 상호 소통을 통해 만든 사랑의 충실성이다.

    “1부 인간혁명 시대의 도래와 지식순환의 철학적 실천”과 “3부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는 지식인 남편이 쓰고, “2부 일상혁명 스토리텔링과 철학적 탐구의 순환”은 전업주부인 아내가 썼다. 1부에서 남편이 사회적으로 높은 수준의 추상과 개념들로부터 개인의 암묵지로 하강해 내려오며 2부에서 아내는 50개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몸의 자유로부터 시작해 관계의 역동적 흥을 연결함으로써 흩어진 마음의 능력들을 연결하는 시간-리듬분석을 수행함으로써 다시 상승하며 3부에서는 이들 개인적 암묵지를 사회적 형식지로, 지식 순환을 만들어감으로써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라는 철학적 실천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렇기에 1-2-3부로 이어지는 글의 여정 또한, 이런 두 사람의 독특성을 따라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둘’이 여전히 하나가 아니라 둘로 존재하면서도 ‘공통의 무엇(encommun)’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진리의 공정에 참여하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을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라고 정의한 알랭 바디우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뮤니즘(communism)은 ‘코뮌(commune)’+‘이즘(ism)’으로, ‘코뮌’이라는 이름 위에 존재하는 이념적 형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코뮌은 몸(body)과 몸 사이에서 나누는 정동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난 세기 동안 코뮤니즘을 대표했던 맑스주의조차 여기서 다시 길을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맑스의 이름으로, 2년마다 열리는 학술문화의 장이자 축제이고자 했던 ‘맑스코뮤날레’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여 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 책의 필자를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그랬지만 나 또한 길을 잃었고 사람들은 각자 암중모색했다. ‘맑스’라는 거대담론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무너졌고, ‘탈’ 또는 ‘후기’란 뜻을 가진 ‘포스트(post)’의 다원성과 해체의 시대로 넘어갔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오류와 실패가 있었고 더딘 걸음이었지만 한국 맑스주의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는 이런 진전을 대표하는 성과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의 맑스주의자들이 암중모색을 하면서 사유의 참조대상이 되었던 것은 알뛰세, 그람시뿐만 아니라 발리바르나 네그리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스피노자-맑스주의였다.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도 이런 사유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들 사유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이들의 철학적 사유를 단순히 소개하고 텍스트를 ‘정전(connon)’으로 만들거나 이를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는데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이들의 사유 궤적에서 “생산양식-주체양식-통치양식-생활양식의 선순환 회로”라는 길을 찾아낸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아니다. 이 책의 성과는 맑스가 이미 예견한 경로를 따라 ‘인공지능+자본주의’를 ‘인간혁명+대안사회’의 물질적 조건의 창출로 규정하고,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반폭력적인 문명 전환 과정’에 관한 과학적·철학적·일상적·사회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뇌신경과학과 21세기의 인지생태학, 자유-평등-연대의 가치를 규명해 온 철학적 통찰(스피노자, 칸트, 그람시, 벤야민, 시몽동)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연결함으로써 ‘환경 변화와 자기 변화의 일치’라는 맑스의 테제를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인간학”으로 발전시킨다.

    둘째, 이 책은 뇌신경과학에 의해 해명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잠재력을 ‘뇌의 신체지도’에 상응하는 ‘마음의 항해 지도’로 약도화하고, “자본순환의 폐쇄회로/기술적 통섭”에 맞서 “지식순환의 개방회로/수평적 통섭”을 제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과학기술 발전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역동적 신진대사의 과정”과 “개인(자아)-자연(이드)-사회(초자아)의 동적 관계의 창조적 과정이 교차하는 역동적 다중지능 네트워크”라는 문명 전환의 주체화 양식을 제안하고 있다.

    셋째, 인간혁명의 이론을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인간학과 주체양식의 혁명”으로, 인간혁명의 실천을 “생활양식의 혁명”으로 정의함으로써 오늘날 르페브르가 열어놓은 공간학적 사유를 흡수해 거시와 미시세계를 통합하고, 이를 다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라는 확장이라는 관점 속에서 적-녹-보라 연대 및 협력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맑스주의적 전망을 놓치지 않고 “자연-노동-젠더 간의 공진화”를 촉진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한 지구적 공유)”, “생산력의 생태문화적 재구성”, “사회생활과 일상생활 전반의 민주화”를 통해 “각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세계화〉”라는 코뮤니즘으로의 이행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는 지구적이면서 총체적이고 거시-미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철학만이 아니라 인지심리학, 뇌신경학, 지리학, 정치학, 미학 등 인문-사회-예술-자연과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지식-정보의 홍수에 빠져 있는 듯이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들이 그러하듯이 지식-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사유의 고독한 자리를 잃지 않는다면 이 책은 독자들이 현재 일어나는 변화 및 현상들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넘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사유하는 데 충분한 참조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이라는 창을 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몰려오는 자본의 물결에 희망을 잃고, ‘냉소적 태도’를 자신의 지적-정신적 우월감처럼 내보이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함께 미로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문득 웃음이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웃음소리는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은 출구를 향해 나아가니까요. 그들은 다 함께 큰 소리로 웃으며 희망을 찾아갔습니다. 결국 미로를 빠져나갔죠. 인간에게는 더러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가장 멋진 웃음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396쪽)

    필자소개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단 HK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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