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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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0월 21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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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최장집 교수는 신문 인터뷰, 특히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강연 등을 통해 진보운동의 한계를 비판하여 세인의 관심을 끈 바 있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변호사도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진보가 새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노무현 정권의 국정홍보처장은 최장집 교수를 향해 "진보의 위기를 열린우리당의 위기로 치환하지 말라"고 비판하였고 시민운동의 위상, 성격과 관련하여 박원순 변호사의 주장을 둘러싼 이런저런 촌평들 또한 제기된 바 있다.

국정홍보처장의 최장집 비판의 생산성

사실 두 분이 말하는 진보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국정홍보처장은 열린우리당과 진보를 대립시킴으로써 최소한 열린우리당이 진보정치세력에 포함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진보의 범주를 획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대상이 불분명한 진보에 대한 해석과 논의가 대중에게 미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효과에 대해 한번쯤 숙고해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명확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진보정치’ 혹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순기능을 하기보다 역기능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 또한 이런 불분명한 맥락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지닐 수 있다.

여하튼 지금 ‘진보’는 이들의 평가에 대해 거의 발언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최장집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미FTA반대를 매개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이지만 거리에서 ‘강력한 반론’을 펴고 있는 격이다. 그럼에도 진보정치, 민주주의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직접 이견을 제기하는 것 또한 그리 무익한 일은 아니라는 판단 아래 몇 가지 생각을 제기하고자 한다.

2.

   
 
▲ 최장집 고려대 교수
 

먼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 정당정치를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최장집교수의 발상은 정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다. 특히 사회운동은 일상으로 회귀하는 대중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없기에 결국 민주주의는 정당정치에 의해 진전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정치발전론 류(類)가 오랜 동안 설파해 왔던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들은 민주화이행을 둘러싼 서구의 많은 논의들, 그 연속 상에 있는 국내의 논의들 속에도 변형되어 흐르고 있다. 그 핵심은 대중운동은 민주화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행위자로서 작용하지만, 민주화이행 이후에는 오히려 ‘그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관리되어야 한다’는 논조 속에 배어 있다. 이것을 도식화시키면 ‘관리되어야 할 운동’, 혹은 ‘관리되어야 할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구분의 배제적 성격

최장집 교수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도 이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분명 다시 숙고할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분석과 주장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 나아가 그 주체인 것으로 보이는 진보운동세력에 대한 비판적 평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를, 특히 근대정치의 핵심인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사회운동과 정당정치를 대별시킨 후 그 속에서 정당정치의 중요성에 최종 방점을 두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그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분과 강조조차도 특정 행위주체와 요구에 대한 배제를 담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거기에도 민주주의의 핵심기제인 ‘동일성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기 위해서이다.

어떤 가치판단을 지니든 근대정치에서 정당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민주주의는 결국 자유주의적 정당체제를 통해서만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최장집교수가 제기한 다른 질문을 통해 재접근해볼 수 있는데, ‘정치인의 민주주의’와 ‘인민의 민주주의’ 사이에 심화되는 괴리를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우에서 좌가 비어 있는 상황’에서-아마도 그에게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 등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닌듯하다-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결국 운동세력이 지니고 있는 정당정치에 대한 잘못된 오리엔테이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향의 뿌리는 80년대 ‘급진운동의 경험’으로까지 소급된다.

정당정치, 사회운동을 타자화하면 곤란

그런데 양자의 심화된 간격을 좁히는 것이 그가 말하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혹은 그 위에 서고자 하는 ‘정치인의 민주주의’를 제어하는 것, 그리하여 결국 하나의 지향이자 목표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사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하게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종말이자 ‘그 어떤 꾜뮨’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에 근접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정치의 변화를 매개로 해서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재생산되는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들, 즉 직접적인 운동들-‘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의해서 추동되기도 한다.

최장집 교수가 대중들이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해도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정당이 활동하는 의회라고 말한 것은 다르게 해석하면 정당들의 주요기능이 이질적인 이해관계와 정치지향들을 지닌 사회, 혹은 사회운동의 요구를 수렴, 변형시켜 제도화시키는 것에 있다는 원론을 환기시켜주는 것인데, 이것은 정당정치만이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그 민주주의조차도 사회관계들, 사회운동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항상 긴장과 갈등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정당들이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도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타자를 필연화하는 동일성의 정치’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일성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내재된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때, 역사적인 민주주의를 논의하면서 그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정당정치가 사회운동을 타자로 설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당의 대표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볼 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기제로 존재치 않게 되고 오히려 해소, 극복의 대상으로 부각되는데,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가 지니고 있는 역설이며 지금의 정치현실이 드러내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최장집 교수의 2부작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제목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변증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위기의 발본적 원인 탐구가 필요하다  

   
  ▲ 최 교수의 책 <민주주의의 민주화>  

따라서 민주주의의 위기, 특히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운동이 ‘민주주의의 변증’을 가로막아 결국 ‘그 어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일반과 동일시하는 경계를 구축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의 주장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분석과 설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그는 대답하고 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그 주체들이 정당정치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들이 정당정치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인식의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실제 ‘정치적 자유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정조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아니 설사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과연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기의 발본적인 원인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주장은 최장집 교수가 강조하듯 정당정치에 의해 대표되는 정치만이 민주주의라고 전제할 때만 성립 가능한 것이 된다.

기존 정당구조 한계가 위기의 근원

그런데도 굳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의 원인을 정치적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그들의 도덕적 결벽주의와 같은 완고한 태도와 인식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와 같은 접근이 호소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제도가 위기를 해소시켜 줄 ‘열려진 기제’라는 점이 전제될 때, 혹은 그러한 확신이 객관적으로 입증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참여 내용과 형식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략적, 전술적 판단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여러 이유로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기제가 긴장, 갈등 관계를 지닌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하여 양보하고 타협하는 열려진 제도임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비판이 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정치를 ‘믿음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바 있는 ‘반정치적 도덕주의’ 혹은 주의주의를 조장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오히려 위기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있기보다 ‘정당정치’, ‘정치인의 민주주의’에 존재한다. 이것은 지금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다양한 영역의 비대칭적 사회관계들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들, 대중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봉쇄하고 그것을 오히려 제도 밖으로 내모는 기존 정당구조나 체제의 한계가 위기의 근원인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더욱 활성화돼야

민주주의는 기존의 법, 제도로부터 배제, 억압된 주체들의 존재 상황, 그들의 향후 미래와 관련된 것인데, 정당체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이 기제가 이와 같은 상황을 고정화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약화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최장집 교수 또한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최장집교수의 진단과 달리 그 완고한 경계를 넘기 위해서라도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영역에서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진정 위기에 처해 있다면-노동운동위기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실제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배제된 대중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 안팎의 다양한 기제를 고안해 내는 것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좋은 정당’의 건설, 대표성의 제고를 위한 정당정치의 재편도 중요한 방안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이다.

3.

다음은 ‘알리바이이론’과 관련된 것으로, 최장집교수는 87년 이후 운동의 정치가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만일 일찍 정당을 만들었다면, 지금과 다른 무언가 생산적 의미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그는 역시 그 이유를 운동세력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와 정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적은 적절한 것인가. 왜 당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했는가. 최장집 교수의 과거 논의를 빌리자면 ‘왜 한국의 노동운동은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알리바이 이론’ 비판의 한계

그 당시에도 그는 최대강령주의에 기반한 운동세력의 급진성에서 비롯된 주체적 오류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도 그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우선 강조하고픈 것은 최장집 교수가 ‘알리바이 이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것, 즉 행위주체의 배경을 이루는 ‘구조적 조건들’은 결코 행위주체의 바깥에, 반대로 행위주체는 ‘구조적 조건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행위주체의 ‘전략적 선택’은 그 적절성 여부와 무관하게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원인들’을 분리시켜 행위주체의 외부에 존치시킨 채, 그 주체의 잘못된 선택과 대응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구조적 원인을 부각시키는 것을 외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 이론’으로 비판하는 것은 하나의 연구방식은 될 수 있지만, 이론과 실제의 긴장, 모순을 따라 움직이는 운동을 평가하는 경우,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 같은 접근은 양자의 분리를 현실 속에서 절대화시키면서 결국 문제를 행위주체의 전략적 선택의 적절성 여부의 문제로 귀결시켜버리고 마는 또 다른 주의주의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 위에서라면, 미시적 행위의 차원에서 더 효과적인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구조적인 제약의 측면이 강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87년 체제의 배제적 성격

그렇다면 실제 87년 이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진보적인 운동세력은 그들이 내세운 과격한 구호, 주장과는 무관하게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그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전화, 결집시킬 수 있을 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최장집교수도 주목하였듯이 87년 대선을 경과하며 드러난 운동세력의 상이한 행보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조건이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과 그들 요구의 배제를 핵심으로 하는 ‘87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기반이고 그렇기에 그 체제를 수용하지 않는 이상 운동세력은 정치적 시민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물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세력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것으로 부정한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정당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90년 전후 ‘전향의 탄원서’를 노태우정권에 제출하고 전개된 합법적 진보정당건설 시도의 실패는 행위주체로서의 그들의 전략적 선택의 폭을 논의하기 이전에 보수독점의 사회정치구조가 얼마나 완고하고 강한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최장집교수도 애석해 한, 왜 그들 가운데 다수가 이후 자유주의정치세력이 구사하는 변형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열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을 외적인 것으로 부차화하게 되면, 그들의 ‘변형’은 단지 운동주체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환원된다.

객관성을 결여한 하나의 주장일 수도

그 이행의 공간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새로운 선택지를 구사할 수 있는 열려진 공간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요인들의 규정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외부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알리바이이론’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객관성을 결여한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

   
▲ 지금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문제인가. 사진은 ‘한미FTA 저지를 위한 광주전남 운동본부’의 20일 기자회견(사진=연합뉴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이미 거기에는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신군부의 ‘협약의 정치’로 표현되는 ‘동일성의 정치’가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장집 교수의 ‘알리바이이론’을 통한 비판은 ‘행위주체의 비결정성’을 전제하는 주의설의 변용이라고 역비판할 수 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더더욱 정당정치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 부족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일 수 없다. 물론 관심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제도 안에 진입한 민주노동당과 제도화를 선언한 사회당이 존재하고 이른바 급진좌파 내부에서도 그 내용과 형식은 다를지라도 합법정당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적절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행하는 실천 또한 정치임을 부정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지닌 발상의 빈곤과 협소한 정치적 태도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사회운동을 타자화시키는 그 완고한 ‘동일성의 정치’에 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다양한 실천을 굳이 정치=정당정치라는 기존의 지배적인 발상과 구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명명해도 좋다.

어쨌든 그것 또한 ‘정치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인식이 다양한 사회관계들 속에 비대칭적 권력을 매개로 재생산되는 긴장과 모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적대와 대립 그 자체를 ‘비정치적인 것’, 따라서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간과하거나 배제하게 되는데, 이러한 발상과 태도야말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요구하게 하는 가장 큰 ‘반정치의 논리’이자 문제발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지금 보수정치세력이 지배하는 정당정치와 엄청난 괴리를 보이며 전개되는 한미FTA반대운동은 이를 확연히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이다. 여전히 기존의 정당정치는 그것을 하나의 압력행위 정도로 보면서 ‘주권자의 정치’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자신들의 위기의 근원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참여민주주의, ‘참여정부’는 하나의 수사에 머물고 풀뿌리정치는 고사되고 있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노무현정권의 평가와 관련, 핵심적인 정치행위자로서의 노무현정권의 무능력에 가한 최장집 교수의 비판은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적과는 다른 맥락에서, 노무현정권이 자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겼던 개혁입법을 정치적 생명을 걸고 관철시킬 만큼 개혁적인 정권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은 노무현 정권의 ‘개혁성’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는데, 이것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세력’이 무수히 지적해 왔던 사항이기도 하다.

‘권력화된 386세대 무능함을 넘어선 구조적 문제’

이미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의 일원이었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세 번의 집권을 통해 정치적 목표, 과제를 실현하였고 그 끝에 위치한 노무현정권이 진보진영과의 소연정이 아닌, 수구세력과의 대연정을 시도한 의미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최장집 교수의 기대와 달리, 노무현정권도 대중의 개혁요구를 변형시키고 관리하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의 길’을 걸었던 이전의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보세력과 연대하지 않는, ‘독자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의 꿈’이 한국사회의 정치구조에서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과 조건은 지금 그들의 정치적 행태 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제기되는 더 많은 개혁과제, 신자유주의로부터 파생된 사회경제적 문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 질적으로 상이한 정치시스템의 모색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접근 방식은 다를지라도, 최장집 교수가 ‘더 좋은 정당구조, 정당체제’를 강조하는 것에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조희연교수가 지적한 대로, 행위주체로서의 노무현정권이 노정한 문제들은 이미 그들의 주체적 대응의 수준을 넘어서는, 너무 빨리 변한 젊은 참모들의 정치적 사고, 태도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더 ‘구조적 요인들’ 속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교수의 노무현 정권 평가가 주는 혼란

그런데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와 관련, 최장집 교수가 주는 더 큰 혼란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마저도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단정하건데, 노무현정권이 노출하는 문제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필연적인 연관이 없다.

노무현정권에 참여한 사람들, 특히 ‘386세대’가 지녔던 진보적인 이념, 정치적 태도 등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과거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지녔던, 혹은 지금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그 어떤 문제점-반(反) 정치적 자유주의-과 연결시켜 노무현정권이 노정한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 있는 객관적 설명력을 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과거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이론적, 정치적으로 대결하였던 진보적이고 급진적이었던 그들이 어떤 수준에서 무슨 발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민주화이행 이후에 그토록 빨리 기존의 관계로 흡수되어 권력화될 수 있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더 큰 설명력을 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의 위기를 열린우리당의 위기로 치환하지 말라"는 국정홍보처장의 비판은 일면 적절함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접근, 태도야 말로 ‘알리바이 이론’보다도 더 완고한 ‘운동책임환원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글의 모두에서 제기한 문제, 즉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운동정치와 정당정치를 나누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 질문이 진정 민주주의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 경계가 무엇을 배제, 억압하는가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자극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것은 양자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존재론적,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과 정당정치라는 이분법이 실은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강제하는 위계적인 정치관의 표현이며 따라서 그 자체를 문제시할 때, 비로소 ‘정치인의 민주주의’와 ‘인민의 민주주의’의 간격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통해 제도화된 민주주의들이 취하는 ‘동일성의 정치’를 부단히 재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전을 담보하는 의미 있는 대안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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