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5.18을 담은 노래와 음악가들
    [역사의 한 페이지] 10개의 장면으로 보는 5.18
        2020년 10월 13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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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만에 다시 그가 돌아왔다.

    지난 추석 연휴 KBS 나훈아 공연은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다. 단 1회 공연으로 예정되었던 방송이 뜨거운 요청으로 다시 방송될 정도였다. 나훈아는 70대라는 만만치 않은 나이와 비대면 공연이라는 한계가 무색하게 시청자들을 열광시켰으며,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음악 평론가 윤중강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를 IMF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평했다.

    그 시절엔 <상록수>(양희은)라는 노래가 필요했고, 지금 이 시대에는 <테스형>(나훈아)일지 모른다. 희망을 가져야 했던 그 시기엔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김민기 작사, 작곡)고 해야 했다면, 코로나의 지금은 다른다. 나훈아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노래를 가지고 나왔다. 신곡 <테스형>에선 ”세상이 왜 이래“라고 울부짓듯 노래한다. <테스형>은 철학자이자, 저 세상에 살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태의 노래! 나훈아는 저 세상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소환한다. 그를 통해서, 그런 노래를 통해서 세상을 원망하며, 사람을 다독인다. 지금 우리에게 딱 필요한 노래를 부른다.

    [사진] 2020년 9월 30일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KBS TV화면 캡쳐)

    그런데 내게 나훈아가 대단하게 보였던 것은 열정적인 무대와 화려한 퍼포먼스 때문이 아니라 딴 데 그 이유가 있었다. 공연에서는 비록 빠졌지만, 그가 이번 공연을 계기로 새로 공개한 9곡 중에 포함된 <엄니>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이 노래는 1987년 6월 항쟁 무렵 나훈아가 80년 5.18 당시 스러진 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한다. 죽어 망월동에 묻힌 아들이 화자로 등장해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는 2017년 한강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노래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엄니 엄니 워째서 울어쌌소 / 나 여그 있는디 왜 운당가”로 시작해서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인자 그만 울지 말랑께”로 끝나는 이 노래를 통해 나훈아는 앞서 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에 울며 잠 못드는 어머니에게 그만 우시라고, 또 그만 주무시라고 노래한다. 특히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게 어서 잠드시라는 대목에서 망자의 한과 산자의 슬픔이 겹쳐지면서 듣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1987년 나훈아는 이 곡을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유족들에게 전하려다가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33년이 지난 올해, 그것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에 이 곡을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광주를 노래한 이는 비단 나훈아만이 아니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보통사람의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정부 때 조성된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 관련 청문회가 진행되는 등 광주를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되면서 광주에 대한 노래는 봇물 터지듯 제작되고 불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노래가 1989년 윤항기가 작사·작곡하고 이선희가 부른 <오월의 햇살>이다. 이 노래는 “어두운 밤 함께 하던 젊은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던 내 친구 어디로 갔나”라며 광주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 노래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역시 이선희가 부른 <한바탕 웃음으로>도 광주를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는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 하기엔 / 이 세상 젊은 한숨이 너무나 깊어 / 한바탕 눈물로 잊어버리기엔 이 세상 젊은 상처가 너무나 커”라는 가사를 통해 5.18의 아픔과 상처를 언급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 당시는 이선희 같은 톱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태우 정부 이전 전두환 정부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5.18 직후에 들어선 전두환 정부 하에서는 ‘광주’는 철저히 금기의 영역이었다. 당시 수많은 청년 세대는 ‘광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피가 끓었다. ‘광주’는 전두환 정부의 원죄이자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뿌리였다. 그런데 이 엄중한 시기에도 용감하게 광주를 노래한 이들이 있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노래들은 나훈아의 노래처럼 탄압을 받아 금지되거나 아니면 강한 은유를 통해 광주를 노래함으로써 광주를 표현한 것인지 모르게 자신을 숨겨버렸다. 이런 은유 때문에 그 노래들은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다수의 대중들은 그 의미를 모른 채 그 노래들을 즐겨 왔다.

    이 글에서는 전두환 정부 하에 만들어진 광주 노래들은 중심으로 현재까지 만들어진 광주에 대한 노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훈아의 <엄니>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제외한다. 총 10개 장면을 나누어 짝수 장면에서 전두환 정부 이후 대중가요가 어떻게 광주를 노래했는지를 살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가 한쪽에서 꾸준히 생명을 얻어갈 때, 또 다른 반대편에서는 다른 의미의 ‘노래’(실제로는 노래라기보다는 그들이 외치는 주장이 더 정확한 표현일것이다)가 줄기차게 불려졌다. 이 ‘노래들’은 주로 필자가 수집한 자료들 속에 들어있는 노래들인데 홀수 장면에서 이 노래들을 살펴볼 것이다. 양측의 노래를 돌림노래로 같이 한번 들어보자. 꽤 긴 글이지만 이것 자체가 지난 40년간의 ‘광주’의 역사이다.

    장면1. 그들의 노래1 – 국난극복 기장

    2014년 5월 경매를 통해 수집한 자료 중에 ‘국난극복기장’이란 것이 있다. ‘국난극복기장’이라는 글이 새겨진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어보면 그 안에 훈장이 하나 들어있다. 훈장의 모양은 5각형 별 속에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 별의 바깥으로 빛이 뻗어나가고 있는 형상이다. 별 위로는 횃불 문양이 보인다. 횃불 문양 위로 연결된 네모난 금속판에는 ‘국난극복기장’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사진] 1981년 3월 수여된 국난극복기장 (박건호 소장)

    그런데 이 기장이 말하는 ‘국난극복’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전쟁을 말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국난’이라고 지칭할만할 다른 사건은 뭐가 있을까?

    이 기장 뒷면에는 국난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시간 정보가 적혀있다. ‘1981년 3월 3일’이다.

    1981년 3월 3일?

    이 날은 전두환 정부가 공식 출범한 날이다. 광주를 유혈진압하고 제11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10월 27일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는데, 이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이 취임한 날이 1981년 3월 3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이 ‘국난’이 무엇인지 감이 오실 것이다. 이 기장 속의 ‘국난 극복’은 넓게는 10.26사태 이후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한 것을 말하고, 좁게는 ‘폭도들’이 주도한 ‘광주 사태’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국난극복기장은 당시 국방부가 1981년 3월2일 대통령령으로 제정한 ‘국난극복기장령’에 근거를 두고 제작한 것으로 현역 장병과 예비역, 경찰, 주한미군, 병역 관련 공무원 등 100만명에게 수여했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때 저항한 사람은 ‘국난을 야기한’ 자들이지만 나머지 군인과 경찰 등은 모두 국난극복에 동참했다는 취지로 이 기장을 수여한 것이다. 이 기장은 이렇게 전두환 정부 출범 당시 신군부의 역사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면2. 정오차의 5.18

    광주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1981년 12월 1일 제5회 MBC 대학가요제에 한양대 복학생 한 명이 무대에 섰다. 그의 이름은 정오차, 그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가요제 문법에서는 다소 생소한 주제의 노래였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세상 만사 야속타고 주저 앉아 있을소냐 / 어이타고 이내 청춘 세월속에 묻힐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한맺힌 내청춘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저하늘 끝에서 이세상 웃어보자 하 하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저하늘 끝에서 만세상 웃어보자
    아 아 바윗돌

    이 노래는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였고, 가요제 직후 대중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어느 방송에 출현하여 정오차는 <바윗돌>이 무엇을 노래한 것인지를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5.18 때 죽어간 친구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고 ‘바윗돌’은 그들의 묘비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헉! 용감한 청년 정오차.

    어찌 되었을까? 예상대로 방송 그 다음날 이 노래는 ‘불온사상 내포’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대학가요제 노래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금지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인 2008년 5월 말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오차는 이 노래를 만든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무섭고 암울한 시기였기에 희생자 묘는 방치돼 있었어요. 사람 손을 타지 못해 황폐해진 묘와 비석을 ‘바윗돌’로 형상화했고, 바윗돌이 굴러 굴러 다시 한번 민주화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가사를 썼죠.”

    어쨋든 이 노래는 전두환 정부 하에서 광주를 노래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직후 전두환 신군부가 5.18을 국난으로 규정하고 국난극복 기장 100만장을 뿌리며 집권을 자축하고 있을 때, 정오차라는 한 대학생은 5.18 당시 폭도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청년들이 있었음을 <바윗돌>을 통해 고발했던 것이다. 골리앗에 돌팔매로 맞선 다윗처럼, 정오차는 바윗돌을 굴려 신군부의 아성에 맞섰던 것이다.

    장면3. 그들의 노래2 – 지만원의 5.18

    올해 2월 경매를 통해 수집한 한 권의 책이 있다. 『5.18 영상 고발』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저자는 지만원으로 이름 뒤에는 ‘시스템분석 박사’라고 설명을 붙였다. 2016년 비매품으로 제작되었으며, 표지 큰 제목 밑에는 “5.18은 북한의 침략이었다”, “광주폭동 현장 사진 속 478 얼굴, 모두 평양에 있다”라는 매우 도발적인 부제가 붙어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썼다고 보이지 않는 이 책은 서문에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1,200명으로 추산되는 침략군을 보내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모략하기 위해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면서 5.18이 북한의 작품이라는 전제로 저자는 소위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2015년 5월 5일부터 15개월 동안 광주의 폭동현장에서 촬영된 사진 속 인물들이 북한에서 출세한 권력실세라는 사실”을 찾아냈다면서 그 수를 478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각 인물에 대한 광주의 얼굴과 평양의 얼굴을 비교하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비슷한 용모가 나오면 전부 북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일 황당한 것은 5.18 당시 찍한 사진 속 평범한 중년 여성을 나중에 북한 인민군 원수가 되는 ‘리을설’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여장(女裝)까지 해서 광주에 침투해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펴낸 단체는 ‘대한민국대청소 500만 야전군(www.systemclub.co.kr)’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북한 게릴라 세력이 개입된 사건으로 5.18을 설명해버리면 이를 무력 진압한 것은 구국적 행위가 되는 것이고, 이 때의 무고한 광주 시민들의 희생도 북한군이 한 행동이므로 신군부에게는 그것도 면죄부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 ‘광주’를 ‘국난’으로, ‘광주 진압’을 ‘국난 극복’으로 보는 신군부의 역사관에 근거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지만원이 쓴 『5.18 영상 고발』의 표지, 오른쪽은 책 속에서 ‘62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여성이 실은 나중에 인민군 원수가 되는 ‘리을설’이 여장하여 침투한 것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심지어 ‘31번’ 인물은 북한의 내각 총리 연형묵, ‘197번’ 인물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이 설명에 따르면 북한의 지도부 다수가 광주에 잠입했다는 것이다. (박건호 소장)

    장면4. 김원중의 5.18

    1985년 가요계는 조용필과 구창모 등이 주름잡고 있었다. 이런 때에 광주 출신의 더벅머리 청년이 기타 하나를 맨 채 방송국 무대 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김원중!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3년 전의 정오차처럼 또 바위 노래였지만 이번에는 돌이 아니라 아예 섬을 들고 왔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서정적인 선율과 아름다운 가사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방송 직후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 라디오 챠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 노래도 은유적 방식으로 ‘광주’를 노래한 것이었다. 신군부의 총칼에 맞서 홀로 저항하고 있던 고립된 광주를 온몸으로 폭풍우에 맞서고 있는 바위섬으로 은유한 것이었다. 당시 『Time』지가 광주의 상황을 ‘고립된 섬’으로 표현한 것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가 숨기고 있는 이런 의미는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다행히 금지곡 지정은 면할 수 있었다.

    [사진] 김원중의 <바위섬>은 1984년 발매된 옴니버스 앨범 《예향의 젊은 선율》에 최초로 수록되었다.(박건호 소장) 오른쪽은 1984년 <바위섬> 부를 당시의 김원중.

    이 노래는 김원중의 후배 배창희가 작사·작곡했다. 이 노래가 처음 실린 것은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으로, 1984년 광주전남지역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다. 이 음반에서는 김원중의 <바위섬> 말고도 <님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이 부른 노래 <내 사랑>과 <무등산 친구>도 실려 있었다. 어쨋든 이 음반 속의 <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알려졌고, 김원중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원중은 1985년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하여 스타 가수가 되었던 것이다.

    1980년 광주는 바위섬처럼 철저하게 고립된 채 신군부라는 거대한 폭풍우와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은 외부의 어떤 지역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곳에 북한군 500명이 침투했다는 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슷한 얼굴을 북한 지도부에서 찾고자 하는 지만원식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소설이고, 다큐가 아니라 코미디에 불과하다.

    장면5. 그들의 노래3 – 양재천에서 수집한 전단지 한장

    2017년 4월 8일 토요일. 서울 양재천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주운 전단지가 하나 있다. 벤치 위에 몇 장이 놓여 있는 모양새로 보아 누가 거기에 여러 장을 놓아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가산점에 병역감면까지 받는 금수저’, ‘5.18 유공자가 누리는 귀족대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전단지를 만든 주체는 뒷면 하단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 하단의 문구는 “ ‘50.18영상고발’ 화보집 또는 미니화보 신청할 곳; 500만 야전군(의장 지만원 박사), 홈페이지 www.systemclub.co.kr‘로 되어 있다. 그러니 장면 3에서 보았던 그 『5.18영상고발』이란 책을 낸 세력과 동일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이 전단지에서 그들은 5.18을 이렇게 정의한다. “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발생한 무장폭동이었다. 광주시민 155명이 사망했고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했다. 당시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1990년대 386민주화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면서 5.18은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인 것으로 뒤집혔다.”

    [사진] 왼쪽은 2017년 4월 7일 양재천에서 우연히 주운 ‘10% 가산점에 병역감면까지 받는 금수저’라는 제목의 전단지, 오른쪽은 약 한 달 뒤인 2017년 5월 8일 강남에서 주운 전단지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두 장 모두 박건호 소장)

    우리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정의하는 것을, 그들은 역사 거꾸로 세우기로 보고 있다. 5.18은 폭동이고 그것을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가 애국자들이자 국난 극복자들인데, 도리어 처벌 받았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5.18 유공자들이 받는 ‘특혜’를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 5.18 유공자는 신군부 세력이지 ‘폭동’을 주도하거나 ‘폭동’에 참여했거나 ‘폭동 과정’에서 사상된 자들이 해당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과장된 통계 자료로 유공자가 받는 혜택을 ‘귀족 대우’라는 말로 정의하고 그것의 부당함과 그 ‘특권’의 박탈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장면6. 인순이의 5.18 그리고 김대중의 5.18

    전두환 정권의 집권 중반기였던 1984년 어느 날이었다. 가수 인순이가 광주 MBC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 이 방송에서 인순이가 부른 노래를 듣고 광주 시민들은 두 귀를 의심했다. <여기가 어디냐>라는 노래였다.

    여기가 어디냐 꿈 속에 그리던 곳 / 꿈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 나 여길 떠났던가
    광주 광주 다시보자 눈물이 앞을 가리네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여기가 어디냐 추억이 숨 쉬는 곳 / 정을 버리고 누구를 따라 나 여길 떠났던가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너도 많이 달라졌구나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여기가 어디냐 어머님 계시던 곳 / 정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나 여기 다시 또 왔네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내 어찌 너를 잊으랴 / 나 떠난 뒤에 누가 너를 이렇게 아껴 주었냐

    [사진] 1984년 인순이의 앨범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표지이다. 이 앨범에 서판석 작사·박인호 작곡의 〈여기가 어디냐(광주)>가 수록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누구도 ‘광주’를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시대! ‘광주’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찬동하면 죄가 되던 시대였다. 그런데 ‘광주 광주’라니…….

    당시 그들은 인순이가 광주를 방문한 기념으로 노래 가사 일부를 개사해 그렇게 부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 노래 원래 가사가 그랬다. 인순이의 <여기가 어디냐>는 광주의 아픔을 위로하는 노래임이 분명했다. 5.18이 끝난 지 채 3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임을 상기하자.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눈물이 앞을 가리네’라는 인순이의 노래에 광주 시민들은 말할 수 없는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냐>는 왜 이렇게 비장하게 광주를 외쳤던 것일까?

    이 노래의 작사가 서판석(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의장)은 뒷날 이 노래가 5·18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얘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통해 김대중을 내란죄로 체포해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결국에는 레이건 미 행정부와 가진 협상으로 그를 석방해 미국 망명에 오르게 했다. 이 노래가 처음 공개된 당시에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다. 망명 중인 김대중을 화자로 내세워 핍박과 상처로 얼룩진 광주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1910년 도산 안창호가 미국으로 떠나며 지었다는 ‘거국가’를 연상케 한다. 다만 도산의 ‘거국가’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가는 심정을 담은 노래라면, <여기가 어디냐>는 미국 망명 중인 김대중이 광주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한 점이 다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너와 작별한 후 /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지요 / 시베리아 만주 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나 /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 너를 생각할 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 거국가

    이후 전두환 정부 엄혹한 시국 하에서 ‘광주 광주 다시 보자’라는 가사는 ‘정든 내 땅 다시 보자’로 바뀌어 불리다가 결국은 방송국 자체 검열로 사실상 금지가요가 되면서 이 노래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5.18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를 5.18 내란 혐의로 사법 처리했던 바로 그 정부였다. 이 즈음 인순이는 10년 만에 광주를 찾았다. 1994년 3월 15일 광주문예회관에서 KBS 1TV의 ‘열린음악회’ 녹화가 있던 날이었다. 인순이가 마지막으로 나와 부른 노래는 역시 <여기가 어디냐>였다. 인순이는 조금도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고도 열정적으로 ‘광주 광주 다시 보자 내 어찌 너를 잊으랴…’라고 노래했다. 이 대목에서 객석을 가득 채운 2천여 관중들은 폭발하듯 열광했다. 예상 외의 반응에 인순이도 깜짝 놀랐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이제 세상은 변했다. 내란 수괴는 ‘김대중’이 아니라 ‘전두환’으로 역사는 바로 세워지고 있었다. 1996년 드디어 5.18은 광주 시민들의 폭동이 아니라 국가가 기념하는 ‘5.18민주화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이후 2000년에는 5.18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묘지는 ‘국립 5.18묘지’로 승격되었다.

    참! 망명했던 김대중 이야기도 덧붙여야겠다.

    1985년 ‘폭풍의 귀국’을 감행한 후 국내에서 가택 연금을 당했던 김대중은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사면 복권되었다. 그리고 1987년 9월 8일 드디어 광주를 방문했다. 7대 대선을 앞둔 1971년 5월 이후 16년 만의 광주 방문이었다. 그에게 광주 방문은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편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기다리던 이 김대중이가 16년만에 살아서 여기 왔습니다.”

    광주역에 내린 김대중의 제일성이었다. 그의 방문에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환영했다. 연도에는 “민주주의여 소생하라”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오후 3시경 망월동 5.18 희생자 묘역을 찾은 김대중은 광주의 희생이 자신 때문인 듯 오열했다.

    [사진] 5.18 이후 처음으로 광주와 5.18묘역을 방문한 김대중이 유가족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에서)

    “망월동 5.18희생자 묘역 주변에는 수만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껴안고 그냥 울어야 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때의 광경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자서전 내용이다.

    그는 추도사를 통해 광주의 영령들에게도 자신의 귀환을 신고했다.

    “한없이, 한없이 사모하는 영령들이여. 김대중이가 여기 왔습니다. 꼭 죽게 되었던 내가 하느님과 여러분의 가호로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순간 김대중을 비롯 그곳에 운집했던 광주 시민들은 흐느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망월동에 묻힌 영령들도 분명 같이 울었을 것이다.

    추도사는 이어졌다.

    “나는 주어진 신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광주의거를 알았고, 내가 그 배후 조종자로 조작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광주시민이 계엄령 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했고, 180여 명이 죽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도 보았던 것입니다. 아! 그 기사를 읽을 당시의 나의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 나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것만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우리 국민과 역사 앞에 바르게 서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장면7. 그들의 노래4 – 광주의 한 초등학교 앞에 몰려온 극우 단체의 5.18

    2019년 3월 14일 광주 동산초등학교 앞에 한 무리의 극우 단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집회 신고도 없이 기자회견을 명목으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이 굳이 초등학교 앞에서 집회를 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거기 몰려 온 이유는 며칠 전 있었던 초등학생들의 ‘집단 행동’ 때문이었다. 3월 11일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 훼손 사건 재판을 위해 광주 지방법원 법정에 들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인근에 있던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구속하라”고 구호를 외친 일이 있었는데, 이 극우단체들의 집회는 이 초등학생들의 행동에 항의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광주 시민사회는 “어른들이 초등학생들을 겁박하는 행태”라며 거세게 비판했고,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전두환 추종세력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을 협박하고 있다”며 “어린이들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견해가 있을 수 있고, 그 견해가 사회적 통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 견해를 존중하고 편견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게 어른들의 자세”라고 분노했다.

    장면8. 블랙홀의 5.18

    사실 두려워요 / 내게 다가올 시간이
    아직 내겐 너무도 벅차요 / 먼저 떠난 친구들의
    눈물이 생각이 나요 / 아직도 내 가슴에 흘러요
    이 어둠이 가기 전에 / 나의 짧은 시계 소리 멈추고
    아 나도 잊혀지겠지 / 달빛 따라 펼쳐 있는
    나의 일기장에 그린 어머니 / 영원히 사랑해요
    못다한 나의 숨결은 / 오월의 하늘위에 붉게 떠 있는
    눈부신 금빛이 되어 / 그리운 모든 사람을
    바라 볼 거야

    2019년 5.18 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5.18 국립묘지와 전남도청의 이원 생중계로 블랙홀의 <마지막 일기>라는 노래가 공연되었다. 블랙홀 멤버들과 현악 7중주, 그리고 대학연합합창단이 참여한 공연에 이어 기념식의 중요한 핵심 스토리텔링으로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된 안종필군의 사연이 어머니 이정심씨와 조카 안혜진씨를 통해 전해져서 기념식에 참석한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1995년 발표된 이 노래는 광주 항쟁 당시 희생된 한 고등학생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블랙홀의 4집 앨범 《Made In Korea》에 수록된 <마지막 일기>는 블랙홀의 리더 주상균이 대학원 재학시절에 친구로부터 들은 5.18의 참상, 특히 도청에서 한 고등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그 고등학생이었다면 이런 일기를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에서 작사·작곡한 노래이다.

    [사진] <마지막 일기>가 수록된 블랙홀의 4집 앨범 《Made In Korea》 표지(박건호 소장)

    주상균은 이 노래에 대해서 “내가 만약 그 당시에 고교생 시민군이었다면 이런 일기를 남겼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노래 가사를 만들었다. 노래 가사에는 5.18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한 고등학생 시민군이 느꼈을 두려움과 슬픔 등의 감정이 그대로 담겼다.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된 주인공은 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희생된 고등학생 고 안종필이다. 당시 광주상고(현재의 광주동성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안종필은 시민군에 “심부름이라도 하겠다”면서 가담해 시민군 활동을 도왔다. 안군의 어머니인 이정심씨는 아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옷을 물속에 집어넣고 신발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가면서까지 말렸지만 안군은 어머니가 몸이 아파 누워있는 사이에 교련복을 입고 5월 25일 새벽 다시 집을 나갔고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그런데! 광주에는 안종필 한명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수많은 안종필이 그때 그곳에서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기도의 일기를 남겼다.

    2020년 5.18 4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5월부터 10월말까지 서울 종로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서는 광주 당시의 수많은 일기장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일기들은 한결같이 5.18이 신군부의 폭력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의 저항이었음을, 그리고 고립된 광주에서 그들이 얼마나 숭고하게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노력했는지를 증언해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되고자 노력하는 참된 아름다움’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 전시에 소개된 일기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이 일기 내용을 통해 블랙홀의 <마지막 일기>가 그저 허구의 산물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광주의 안종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옷이 찢겨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는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숨이 막힌다. 달렸다. 도청을 향하여 뛰었다.
    한낮의 피비린내 속에서 나의 걸음은 더 이상 옮겨지지 않는다.

                                                                                        (5월 18일 김현경 일기)

    얼어 붙어버린 나 자신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
    불의를 보고도 참을 수 없는 나.
    어쩔 수 없이 눈감고 귀가리고 살고 있는 나
    세상이 더럽다는 소리만 해대는 나.
    친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떨고 가만히 있는 나
    온갖 것이 정지나 돼 버렸음 좋겠다.

                                                                                        (5월 19일 이춘례 일기)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도 있는가.
    우린 참여하여 뭔가를 보여줘여 한다. 계엄당국의 엉터리같은 오도.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이 외면이 수습을 더 늦게 지연시키는 것이다.

                                                                                          (5월 22일 문용동 일기)

    새벽에 대학생 3명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이 총기를 소지하였는데 함께 총격을 할 수 없는 상대 아닌가?

    저희들 배후에는 많은 시민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어머님도 아마 저같은 아들 때문에 나와서 돌아다니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젊은 자녀가 죽고 희생되고 또 군과 대치하고 있는 한 부모님들은 모두 함께 해서 지켜 주지 않겠습니까? 저희들도 너무 깊이 빠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물러나는 것도 희생의 값이 없지 않습니까? 한 몸 희생하는 것까지도 각오를 해야 하지요.

                                                                                        (5월 22일 조한유 일기)

    천주님!

    죽은 영혼에게 안식처를 주십시오. 남편을 도청에 있는 시체 안치실에 놔두고 그 부인은 태극기를 들고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미친듯이 외쳐대고 있다고 합니다. 유신 잔당 전두환이를 죽여서 자기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호소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가족과 친척과 친구를 잃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시내 외곽에서는 몇 명이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각 병원마다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천주님! 도와주소서. 우리 광주 시민들을 보호해 주소서!

                                                                                         (5월 24일 주이택 일기)

    [사진]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기획전 [5월, 그날이 다시오면]에는 광주 당시의 긴박한 역사가 담겨있는 또 다른 ‘안종필’의 일기장을 만날 수 있다. 광주는 처절했다.

    우리의 광주의거는 이렇게 끝이 났나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서…그러나 역사는 증명할 것입니다. 진실은 꼭 밝혀질 것입니다. 전 확신합니다………

    계속 쏟아지는 총알을 어떻게 다 피할 수가 있었겠는가. 난데없이 등에 뭐가 꽉 박히며 코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 맞았구나.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다.’ 잠깐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수술실의 그 고통스러움, 그걸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더한 고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허위가 판을 치는 세계에서 진실을 고수하고 주장하기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그것도 데모의 주동자로…어이해서 우리 광주시민이 폭도가 됩니까. 오직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려했던 우리가 총을 들었다고 해서 폭도입니까. 아니면 반정부적인 행위들을 해서 폭도입니까.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해도 분은 분대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이 아픔들은 끝내 기쁨으로 돌아오리라. 확신합니다.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그리고 우리들이 압니다. 진실을 밝혀질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우리 광주사태가 ‘광주의거’로 기록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시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5월 27일 김윤희 일기)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보자고….아아 살아보자고.

                                                                                       (5월 28일 김현경 일기)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5월 28일 박연철 일기)

    가슴 아퍼 가슴 아퍼 죽겠네.
    고생도 모르고 자라났던 철부지 우리의 귀한 자식들
    아무리 마음을 진정할라고해도 내 자식들을 보면
    남의 일같지 않아 가슴이 이렇게 뜨거울까.
    하느님 도와주소서. 보하여주소서. 사(謝)해 주소서.
    아버지 하느님 제발 제발 간절히 비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그만 희생시키소서.

                                                                                   (5월 29일 강서옥 일기)

    장면9. 그들의 노래5 – 전두환 변호인단의 5.18

    2020년 10월 5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는 전두환(89)씨의 결심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검사는 이날 “전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기소 2년 5개월 만의 구형이다. 검찰의 구형과 그 취지를 설명하는 의견서 낭독은 재판 시작 30분 만에 끝났다. 그런데 그 후 전씨 측 법률 대리인 정주교 변호사가 최후 변론을 폈다. 정 변호사는 군 문서에 헬기 사격 지시·명령이 없었다는 점, 당시 군 수뇌부들도 헬기 사격을 거부했다는 진술 등을 근거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다”며 전씨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문했던 증인들의 진술 내용과 제출한 자료의 의미를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마지막 변론은 무려 4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에 법정 방청석 곳곳에서는 ‘마지막 변론이지만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정 변호사는 변론 도중 5·18민주화운동을 가리켜 거듭 ‘광주사태’라고 말해 방청객으로부터 “왜 자꾸 광주사태라고 하느냐”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장면10. 비티에스의 5.18

    2019년 4월 28일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기 위한 ‘슈퍼콘서트’가 관객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방탄소년단이었다. 리프트를 타고 무대 아래서 등장한 방탄소년단은 대표곡 4곡을 잇따라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방탄소년단 멤버 제이홉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Ma city>의 일부였다.

    나 전라남도 광주 baby
    내 발걸음이 산으로 간대도
    무등산 정상에 매일 매일
    내 삶은 뜨겁지 남쪽의 열기
    이열치열 법칙 포기란 없지
    나 KIA넣고 시동 걸어
    미친 듯이 bounce
    오직 춤 하나로 가수란 큰 꿈을 키워
    이젠 현실에서 음악과 무대 위에 뛰어
    다 봤지 열정을 담았지
    내 광주 호시기다 전국 팔도는 기어
    날 볼라면 시간은 7시 모여 집합
    모두다 눌러라 062 – 518

    2015년 공개된 방탄소년단의 앨범 《화양연화 pt.2》에 수록된 노래 <마 시티(Ma City)>는 광주 출신 멤버인 제이홉 등 멤버 3명이 직접 작사한 곡으로, 멤버 각자가 자란 도시를 주제로 담았다. 가사 중 “7시 모여 집합”이라는 가사는 광주의 지도상 위치가 7시 방향이라는 이유로 극우 성향 사이트 일베가 광주를 비하할 때 쓰는 ‘7시’라는 표현을 저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의문의 숫자 ‘062’는 광주의 지역 번호이고, ‘518’은 5월 18일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을 가리킨다. 제이홉은 이 노래를 통해 고향 광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았던 것이다.

    〈Ma city〉가 공개된 뒤 이와 같이 ‘7시’와 ‘062-518’라는 숫자 안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방탄소년단의 팬인 ‘아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이 노래 한 편을 통해 5.18이 세계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 때문에 심지어 5·18 묘역을 직접 찾은 아미들도 있었다. 작년 4월 광주의 슈퍼콘서트에 출연하는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보러 온 외국인 아미들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분향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이홉은 2020년 9월 10일 KBS 1TV ‘뉴스9’에 나와 “5.18을 언급한 노래도 만들었는데?”라는 질문을 받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에 담을 수 있다는 건 아티스트로서 영광스러운 부분이다”라면서 “5.18은 잊어서는 안 될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좋게 음악으로 풀고 싶었다”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10개의 장면을 통해 5.18 광주 그리고 광주의 노래를 살펴보았다.

    어떠한가?

    광주가 1996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지정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는가?

    광주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신군부 사관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며, 5.18을 끊임없이 폄훼하고 모독하고 조롱하고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수십년에 걸쳐 하나 하나 쌓아서 만든 진실의 탑 앞에서…….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글을 마친다.

    5.18이 40주년을 맞는 오늘!

    광주는 완전히 끝난 사건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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