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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와 태풍의 후과,
    가을타령 할 팔자 아닌 듯
    [낭만파 농부] 심각한 백수(白穗) 피해
        2020년 10월 02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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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을 타나 싶었다. 허전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고립감에 한없이 타들어가고,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이따금 발병하곤 하던 그 계절병.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오랜 언택트 상황에서 비롯된 우울감이나 무기력증. 사회적 거리두기와 감염 우려에 따른 대면회피가 고립감, 불안감, 상실감으로 이어진다는 진단이다. 듣고 보니 그럴 법하다. 아닌 게 아니라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늘고, 상담건수도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는 소식이다.

    사실 이 고장은 지금까지도 지역발생 확진자수 0을 기록하고 있는 ‘청정지대’다. 그럼에도 방역당국의 거리두기 방침과 그에 따른 사회심리적 여파로 분위기가 크게 위축돼 있는 상태다. 아무래도 크고 작은 모임을 자제하게 되고, 만나서도 첫 번째 화제는 늘 코로나19가 강요하는 비대면 상황의 불편과 불안감이다.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현상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청정지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면활동을 꺼릴 이유가 없다.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방역수칙만 잘 지킨다면 그게 오히려 코로나 우울을 비롯한 2차 피해를 극복하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그 와중에 지난 일주일 남짓 예초기로 논두렁에 우거진 풀을 베는 작업을 했다. 추수철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콤바인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보안경에 안면보호 헬멧을 눌러 쓴 채 세차게 돌아가는 칼날로 뻣뻣한 풀줄기를 쳐내는 일이다. 끝없이 어이지는 좁다란 논둑길 따라 작업봉을 내젓는 짓을 반복하다 보면 때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작업이다 보니 그러기는 쉽지 않다. 거센 원심력과 기계의 진동에 맞서다보면 금세 팔 다리 허리 어깨에 젖산이 쌓인다. 가쁜 숨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봐도 넓은 들녘에는 오직 저 하나. 삼매경보다는 갑갑함, 고립감이다.

    그래도 누렇게 익어가는 탐스런 벼이삭을 바라보며 머잖아 누릴 수확의 기쁨을 떠올리면 언짢은 기분이 싹 가시곤 했다. 이삭을 뽑아 낱알수를 헤아리며 수확량을 점치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피로감을 잊고 다시 작업봉을 내저을 힘이 샘솟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논둑 치는 작업을 멈춘 사이 눈에 들어온 벼이삭은 황금빛이 아닌 칙칙한 잿빛이다. 백수(白穗)라 해서 벼이삭이 시들어 하얗게 쭉정이가 돼버리는 현상이다. 비를 동반한 강한 바람이 분 뒤에 고온 건조한 강한 바람이 통과하면서 출수 직후의 벼 이삭이 하얗게 말라 죽는 것이다. 오랜 장마로 수정이 부진했던 점도 한 몫 한 것 같다.

    백수 피해를 입은 벼포기

    논둑치기, before-after

    두 달 가까이 역대 급 장마가 이어진데 이어 초특급 태풍이 세 차례 휩쓸고 지나갔더랬다. 어쩐지 이삭이 히바리가 없어 보인다 했더니 결국은 이런 2차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처음엔 건성으로 둘러보느라 피해 정도를 5~15%로 가늠하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억지로 위로를 삼기도 했었다. 그런데 논둑치기를 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심한 곳은 반타작에 이를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등에 짊어진 예초기가 그렇게 무거울 수 없고, 굉음은 귀가 따갑고, 칼날은 자꾸만 돌멩이에 부딪힌다. 쉬는 사이 눈에 들어온 희멀건 벼이삭에 속상하고 기운이 빠져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땅이 꺼지도록 새어나오는 한숨. 그 일주일이 어찌나 힘에 겹던지.

    해마다 10월 중순에 펼쳐오던 고산권 벼농사두레의 ‘황금들녘 풍년잔치’는 이래저래 얘기를 꺼낼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이나마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그럴 기운이나 있고, 그럴 기분이나 생긴다면.

    사실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자빠져 있을 게제가 아니다. 지금 기분이 문제가 아니고 기운 돋는다고 풀릴 일이 아니다. 소출이 줄어드는 만큼 수입도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 벌써부터 입에 풀칠 할 일이 한 걱정이다. 지금껏 ‘소비생활’이랄 것도 없이 ‘미니멀 라이프’를 꾸려왔으니 더 덜고 뺄 것도 없는 처지. 무엇으로 수입을 벌충할지, 어떤 밥벌이를 찾아 나서야 하는 건지. 농한기가 사라진다고 징징 댈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 애시당초 가을이나 타고 앉았을 팔자가 아니었던 게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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