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소한 일상에서의 반란
    자전거 타는 엄마들의 '대안적 쾌락주의'
    [적녹연대] 좌절과 불만 생겨나는 바로 그곳에서 변화를
        2020년 09월 28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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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페미니스트 철학자 케이트 소퍼(Kate Soper)의 글을 처음 읽은 때가 2002년쯤이었던 것 같다. 그는 에코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영향력 있는 책 What is Nature?의 저자였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주장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대안적 쾌락주의(alternative hedonism)’라는 개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흥미롭다기보다는 낯설었다. 그리고 뭔가 거북스러웠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를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쾌락주의’를 내세우다니. ‘쾌락’은 마르크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주의를 신념으로 하는 철학자들조차 맞서 싸우려했던 공리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아닌가? 현실을 정당화하는 주류경제학은 자원이 희소하다는 가정 아래 합리적인 개인이 쾌락을 극대화하는 과정으로 사회를 설명해 오지 않았는가?

    의문과 거북함은 곧바로 사라졌다. 소퍼가 말한 ‘대안적’이라는 수식어는 우리가 ‘편리함’이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 상실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과 만족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이동의 편리함(쾌락)을 얻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한다. 가고 싶을 때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있다. 광고는 자동차를 운전자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필수품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거리는 자동차로 가득 차 있다. 도시계획에서 고려되는 공간은 자동차를 위한 주차장과 도로다. 도시 계획가들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도시는 보행자에게 위험천만한 장소가 되었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자각하지 못하지만 소음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수면장애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일부분이다. 배기가스가 내뿜는 유독물질은 미세먼지의 주범이다. 온실가스 배출은 말할 것도 없다. 타이어와 노면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리고 걷지 않는 호모 에렉투스라니! 직립보행을 ‘포기한’ 현대인은 육체적으로 인간이기 위해서 전기로 움직이는 트레드밀 위를 돈을 지불하고 걷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니면 ‘없는 병이라도 만들어’ 진료하고 약을 팔아야 하는 병원과 제약회사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포기하고 자전거 타기와 걷기를 선택할 때 일어나는 일

    우리가 자동차를 포기하고 자전거 타기나 걷기를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음과 미세먼지가 줄어든다. 소음과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신체는 스스로 이동하고 움직임으로써 건강해진다. 굳이 돈을 내고 피트니스센터를 드나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여기가 끝은 아니다. 자동차 바깥으로 나와 햇빛과 바람과 자연의 소리를 느끼면서 이동하는 체험은 호모 에렉투스가 가지고 있는 감각들을 깨우고 발전시킨다. 콘크리트건물에서 또 다른 콘크리트건물로 자동차를 통해 이동하면서 잃어버린 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을 훨씬 뛰어넘는 자동차의 속도로 이동할 때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도드라져 감각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것이다. 자동차라는 껍데기 바깥으로 나왔을 때 접하게 되는 건물들, 거리들, 사람들, 새들, 길고양이들, 나무들은 자동차의 진행을 방해하거나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주변의 풍경에서 나의 몸과 감각을 분리될 수 없는, 내가 그 안에 있는 관계들로 느껴지게 된다. 청년 마르크스의 말처럼 우리는 ‘자연적 존재(natural being)’이며 자연은 우리의 ‘비유기체적 신체(inorganic body)’인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회복은 우리 모두가 생물학적으로 매우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광고는 자동차, 경비시스템과 보호받는 건물, 스마트폰을 통해 접근 가능한 위험에 대한 정보들이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사고를 당하고, 다치고, 죽는다. 하지만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공감의 능력의 약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자동차 안에 있고, 경비시스템으로 보호받고 CCTV의 감시 아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동차와 상품화된 보호 장치들 밖으로 나와 회복된 감각은 ‘나’는 결코 그런 기계와 장치들에 의해 보호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관계들 속에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 날 때 작은 생명체들의 죽음과 훼손을 체험하고 스스로 겪게 되는 몸에 가해지는 작은 충격을 느낄 때 세상의 일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산불은 텔레비전 뉴스에나 나오는 머나먼 나라의 일에서 바로 내가 체험할 수도 있는 일로 공감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기후변화와 생태적 위기가 ‘나의 문제’로 느껴지게 된다.

    자동차가 줄어들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 중 하나가 열린 공간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모험을 하며, 그 과정에서 타자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배우는 공적 공간이 되돌아 올 수 있다. 자동차 밖으로 나왔을 때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대상은 인공적 환경이나 자연 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멈추고, 이동하고,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 안에 있다. 우리는 매우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타자들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한 순간도 편안하게 쉴 수 없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으면 진로를 방해하고 욕설과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익명의 사람들이 감정과 표정을 가진 구체적인 사람들로 다가온다. 거꾸로 뒤집어보면 자동차라는 편리함이 ‘나’를 안심하게 하는, 그래서 나를 보호하는 ‘우리’라는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마더로드’와 책 What is Nature?

    다큐멘터리 영화 <마더로드(Motherlaod)>은 일과 육아에 지친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고 이다. 그 엄마들도 자동차에 ‘중독’된 사람들이었고, 편리함을 이유로 자동차를 탔다. 문제는 엄마들은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지쳐갔고, 무기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들을 태우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몸의 감각이 되살아오고 주변의 모든 것들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깨어나는 경험을 한다. 소퍼가 말한 대안적 쾌락을 체험한 것이다. 자동차가 주는 쾌락이 단지 ‘빠르고 안전한 이동’이라면 그것 때문에 잃어버린 우리 몸의 감각은 대안적 쾌락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자전거 타는 엄마들의 ‘대안적 쾌락’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이 엄마들의 ‘즐거움’을 방해했고, 그녀들은 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공동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커다란 대의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았고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싸움이 ‘즐거움’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치는 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아빠와 비가 오는 날 아이들을 태우고 장 보러 가는 엄마는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영웅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진로를 방해하는 자전거 타는 사람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쾌락’을 체험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연적 존재로서 주변 환경과 교감하는 인간의 능력은 퇴화 중

    현대인들은 ‘즐거움’을 모른다. 즐겁다고 ‘느끼게 하는’ 상품들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면 무엇엔가 ‘중독’되었을 때 쾌감을 얻는다. 여행은 파워블로거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맛집과 포토존을 렌트카로 돌아보는 것에 불과하다. 관광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길을 따라 걷고 왔었다는 인증으로 사진 찍는 것이 전부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조작하면서 무엇인가를 부수고, 누군가를 죽이면서 점수를 얻는 게임에 몰입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주변의 환경과 교감하는 인간의 능력이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타자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마저도 나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기쁨은 돈을 주고 산 상품일 것이고, 상품 구매를 위해 지불된 돈은 경쟁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기쁨을 추구할 기회를 박탈한 것일 테니 말이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그래서 기쁨을 누릴 기회를 빼앗겼다고 느끼는 대다수가 그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과장되어 있고 처음부터 허구라는 것을 안다. 현실 세계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그런 공감을 나눈다는 것은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는 게임에서 쓰러트리는 캐릭터와 크게 다를 바 없어진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만나는 타인들은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공포의 대상이다. 의지하고 연대할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쓰러트려야 하는 ‘적’일 뿐이다.

    어쩌면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런 기술 폭주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해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것을 이동권의 보장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누군가 운전대를 빼앗으려 할 때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자동차세나 탄소세에 저항하는 것처럼 말이다. 역설적인 것은 <마더로드>의 엄마들처럼 운전대를 스스로 버리고 차 밖으로 나왔을 때 희미하게 감지되었던 몸과 무의식의 신호가 확실해 진다는 것이다. 대안적 쾌락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자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독 또는 익숙함이 그렇게 간단한 변화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소소한 반란은 매우 어렵지만 역설적으로 멀리 있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게 시작된 소소한 반란은 연대로 발전할 수 있다. <마더로드>에 소개된 오레곤의 포틀랜드 시의 사례처럼 몸과 무의식의 신호를 자각하고 운전대를 놓은 사람들의 연대는 도시의 인프라를 자전거 친화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타고, 모이고, 이야기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더 넓고 큰 공감할 수 있는 감각을 일깨울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안적 쾌락.

    대안적 쾌락이 걷고 자전거 타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좌절과 불만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쾌락을 좇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대안적 쾌락은 좌절과 불만이 생겨나는 바로 그곳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현실’과 ‘나’의 체험이 어긋나는 계기들을 통해서. 거창한 구호와 거시적 분석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되었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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