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현실, 우울의 일상
그럼에도 절망하지 말고 길을 찾자
[칼럼]‘말도 안 된다’ 하면서도 방관하게 만드는 사회
    2020년 09월 05일 05: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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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제주대 서영표 교수가 부정기적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노동과 좌파정치, 생태주의를 포함하여 사회 이슈에 대한 고민을 담을 생각이다. 현실의 답답함에 비판적으로 맞서되 절망하지 말고 길을 찾자는 게 필자의 고민의 방향이 될 듯하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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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사회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대용량’ 컴퓨터 한 대씩 들고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어떤 사람들은 노트북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 언제든지 원하는 정보를 불러낼 수 있으며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똑똑해진 사회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렇게 ‘똑똑해진’ 사람들의 선택과 결정이라고 보기에는 엉망진창이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은 입만 열면 근거가 없는, 흔히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불리는 허무맹랑한 정보들을 당당히 이야기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은 중요하지 않다. 정적을 공격하고 자기 지지층만 결집시키면 그만이다. 인종적, 계급적, 종교적 갈등을 부추겨 사회를 갈라놓고 원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득이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한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 도널드 트럼프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상식적인 수준에서조차 ‘합리성’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주장을 사회가 걸러내고 있지 못한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고수익만 중요한 언론에게 트럼프가 쏟아내는 공격적이고 원색적인 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는 좋은 기사거리다. 가짜뉴스의 근원이 트럼프인지 언론인지 헷갈리게 된다. 정치권이라고 다르지 않다. 환율과 주가로 표현되는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는 정치권을 단단히 묶어 두고 있다. 정치권의 역할이란 그런 노골적인 착취와 강탈을 ‘국가’ 전체의 이해관계로 표상하는 것일 뿐이다. 자본-권력의 유착이 민주주의와 공론장에서의 토론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트럼프 같은 ‘괴물’을 걸러낼 힘을 상실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계급 전쟁’, 그 후과들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1970년대 직면한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코 완벽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계급 전쟁’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을 양산했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이 계급전쟁의 한 편에 있었다. 주변적인 문제를 둘러싼 소란스러운 소동들이 차이를 부각시켰지만 말이다. 유럽의 중도좌파 정당들도 다르지 않다. 모두 오른쪽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했다.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정당정치와 의회정치 안에서 불만과 좌절이 표출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버렸다는 것이었다.

불만과 좌절이 관리되는 방식은 개인의 역량, 즉 경쟁력을 최고의 미덕으로 가르치고 그러한 시장주의를 윤리적 원리로까지 격상시켜 교육하고 훈육하는 것이었다. 집합의식을 강조하고 계급의식 따위를 들먹이는 정치세력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집단으로 비난받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기댄 ‘연대’니 ‘단결’이니 하는 것들은 스스로의 무능을 감추는 도덕적 타락이라고 가르쳤다. 정부의 계획과 분배는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공격받았다. 자율성은 개인들이 자신의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장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훈육과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의 힘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박탈을 더욱 깊게 했다. 시장의 힘의 결과는 자율성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계급전쟁을 공모한 정치엘리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자본-정치권력 사이의 노골적인 공모는 달콤한 기득권의 철옹성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대의민주주의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도 불만과 좌절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워싱턴’과는 인연이 없는 아웃사이더 트럼프가 빼앗기고 박탈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틈새가 생긴 것이다. 혐오를 조장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좌절과 혐오는 쉽게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낡고 협소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관행에 붙들려 있을 때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정치를 촉발할 수 있다. 이해관계가 논의되고 조정될 수 있는 다양한 수준의 민주적 제도가 결여되어 있는 조건에서 거대한 권력을 특정집단에게 위임하는 대의민주주의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반대자들을 만들 수밖에 없다. 비록 땜질에 가까웠지만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할 수는 분배와 참여의 기제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보장되었을 때 정치권력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땜질마저 사회주의라고 공격받아 파괴되고, 권력의 정당성은 노골적이 이익추구 앞에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때 대의민주주의의 위임은 혐오와 증오의 근원이 된다. 대화와 토의의 장치들이 봉쇄되고, 오직 ‘쪽수’로만 결정되는 절대 권력이 남용될 때 원한과 혐오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고통, 좌절, 불만의 근원에 대한 진단과 토론은 사라진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상상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그것에 더 강하게 집착하고, 결국 달라지는 것 하나 없는 현실에 더 깊이 좌절한다.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혼란은 자본주의가 여러 번 스스로의 얼굴을 바꾸면서(고전적 자유주의, 케인스주의, 그리고 노골적인 시장맹신주의인 신자유주의) 지탱했던 자유주의와의 위태로운 동거가 최종적으로 파탄 나는 역사적 계기로 볼 수 있다. 그 파탄의 결과가 어디로 귀결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철학적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의 노동(labour)과 그것의 결과인 소유(properties)를 기본으로 했다. 미국 <독립선언서>가 기대고 있는 존 로크(John Locke)가 세운 ‘위대한’ 전통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는 현실에서는 자유주의의 근본원리를 부정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옹호하는 ‘불행한’ 동거의 불안한 연속이었다.

자유주의의 몰락, 자유주의자의 궁색함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인 다원주의다. 다양한 의견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합리적인 개인들의 선택’ 같은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허구를 통해서만 다원주의를 방어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과 화폐의 원리로 환원하다. 그것만이 선(good)하다. ‘선’은 오직 절차적으로 옳은(right) 과정을 거쳐 표현된 개인의 선택이라는, 그래서 결코 ‘선’한 것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변명은 궁색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노골적 계급전쟁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결별선언이었다. 원리로서의 다원주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이라고 공격했던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날것 그대로의 경제결정론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인권, 민주주의, 정의는 모두 성장률, 국민총생산, 주가, 환율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현실에서는 ‘무늬만의’ 다원주의가 창궐한다.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비록 아주 제한된 형태였지만) 근대민주주의 혁명이 성취한 합리성마저도 무력화시키는, 편견으로 가득 찬 혐오/증오의 언어들이 난무한다. 그것 자체가 돈이 된다. 유투브의 조회 수가 돈이다. 이제 포스트모던한 소비주의 사회는 혐오마저도 다원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면서 노골적인 경제결정론, 내면화된 물질주의를 정당화한다.

한국 역시 혐오정치, 비이성의 정치 팽배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한국도 서로를 혐오하는 비이성의 정치가 팽배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미국에서 혐오정치의 근원이 트럼프가 아닌 기성 정치질서와 지배계급의 계급전쟁이었듯이 한국의 혐오정치의 근원도 기성 정치세력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히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의 때로는 은밀한, 그리고 때로는 공공연한 공모가 비판되어야 한다. 설명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소위 86세대는 이미 낡은 질서의 한 축이 되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민주화를 주도했다는 자부심에 도취해 스스로가 ‘보수화’ 되었다는 것을 자각 못하고 있다. 1970년 식의 토건주의와 성장주의에 기대어 경제를 지탱하려는 구태의연한 생각이 자신들만이 ‘옳다’는 독선과 뒤섞여 이상한 변종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시장에 의한 사회의 해체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오직 승자만이 대접받는 사회를 능력주의라고 추켜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교육제도마저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평가받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이것이 진보인가? 이제 아집에 빠진 86세대에게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보의 반대편에 있는 수구이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주의 좌파일 뿐이다.

이렇게 오만하고 독선적인 86세대, 그리고 그들이 권력의 핵심에 있는 문재인 정권의 한계는 극우세력에 의해 은폐된다. 기독교 광신도들과 시대착오적 냉전우익이 일으키는 소동은 문재인 정부의 한계가 비판되고 논의될 수 있는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과 극우세력은 역설적 의미에서 공생관계다. 그런데 그 공생은 혐오/증오에서 에너지를 얻고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서로 오직 ‘반대항’으로서만 존재의미를 부여받는다. ‘수구골통’의 반대항=진보, 친북공산주의자의 반대항=자유민주주의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86세대는 이미 진보적이지 않다. 어쩌면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는 소멸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 요청되는 진보-보수 모두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편에서 극우세력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소외되고 밀려난 자들의 슬픈 자화상

트럼프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백인노동자들이 현실의 희생자들인 것처럼, 한국의 극우세력에 의해 동원되고 있는 사람들도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밀어내는 데 앞장섰던 것이 86세대와 민주당 정권들이었다. 생각해 보라. 시장의 원리에 의해 사회적 유대가 해체되면서 나이든 세대는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발전주의 시대 박정희의 신화에 붙들려 있는 반공세대라는 비난만 돌아 올 뿐 자신들이 처한 불안정한 삶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없었다. 돌봄의 손길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서, 극우코뮤니티에서, 태극기 집회에서는 존재를 인정받았다.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존재에 대한 인정(recognition)은 가장 중요한 기본 필요 중의 하나다. 그런데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당한 ‘경쟁력만이 중요한 시장만능주의 사회’의 ‘경쟁력이 없어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익숙한 반공냉전주의의 언어로 ‘인정’의 손을 내미는 집단에 소속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공모한 계급전쟁에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소멸해야할 적,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있는 ‘그들’의 이율배반을 언제까지 참아 주어야 하는 것일까?

현실은 암울하다. 우울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정치는 답답하다. 가짜뉴스와 혐오의 선동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 같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유럽이든, 남미든 상황은 비슷하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여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히려 ‘전환’을 절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전환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대의민주주의, 협소한 지식패러다임 모두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길은 자유주의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를 이념에서 현실로 끌어내리는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그 상식이 실현되지 못한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일 뿐이다. 거창한 철학적 고담준론이 아닌 매일의 일상이 이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매일의 일상은 습관화된 낡은 이데올로기와 관행으로 가득하다. 마찰과 긁힘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몸은 고통스럽고 마음은 피곤하며, 무의식에는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상처들이 새겨진다. 그럼에도 낙관적으로 생각하자.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무의식이 낡은 이데올로기와 관행에 의해 긁히면서 체험되는 통증이 저항과 진보를 향한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이런 마찰과 긁힘을 공감하고 정치화해야 하는 좌파정치세력의 공백이 뼈아프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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