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낭만파 농부] 장마 이어 강력 태풍
        2020년 08월 26일 0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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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일시에 물폭탄을 퍼부어대는 장마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더니 ‘초강력’ 태풍 바비가 치고 올라온단다. 코로나19가 2주째 급격히 퍼지고 있는 와중이다.

    지난번 물난리로 삶의 터전을 잃거나 어지럽힌 이재민, 논밭과 경작시설을 망쳐버린 농가들에 견주면 우린 천행인 경우다. 어쩌다 보니 파괴력이 크지 않은 물폭탄을 맞았고, 어쩌다 보니 자연재해에 비교적 안전한 곳에 터를 잡았을 뿐이다. 그저 요행일 뿐이다. 솔직히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장대비가 쏟아질 때면 뒷산이 무너져 내려 목조로 지은 집채를 덮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다.

    천행이라고 했지만 우리라고 피해가 없을 리 없다. 정도 차이일 뿐 이 난리판에 멀쩡한 곳이 있으랴. 여기저기 논둑이 터지고, 밀려든 토사에 벼포기가 쓸려나갔다. 양동이로 쏟아붓 듯 비가 내리니 해바라기, 고추, 가지, 허브 같은 목질을 띤 작물과 화초, 작은 나무들이 ‘물에 빠져’ 말라죽기도 했다. 문밖으로 나설 틈도 없이 비가 내리니 텃밭의 잡초는 열대우림처럼 우거질 대로 우거져 뽑히지도 않고 베어내야 할 지경이 됐다.

    정글인가 텃밭인가

    병충해도 심각하다. 햇볕 날 틈도 없이 비가 내려 고온다습한 환경이 조성되니 작물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밭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논배미 상황도 심란하다. 포트모 시스템으로 볏모가 튼튼한데다 유기농이라 병충해는 걱정을 안 해온 터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흰빛잎마름병’으로 진단되는 증상에 온 들녘의 벼포기가 시름시름 않고 있다. 역시 장마에 따른 다습한 상황에서 세균이 크게 번진 것이다. 그나마 빽빽하게 심지 않아 통풍이 되면서 여느 논배미와 견줘 심한 편은 아니다. 어쨌거나 해를 입은 만큼 소출이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벼이삭 팬 논배미

    긴 장마가 할퀴고 간 흔적을 주워섬겼지만 어찌 보면 한가한 넋두리인지도 모르겠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지 않는가. 사실 해가 갈수록 그 경고음은 요란하고 섬뜩해지고 있다. 올해 집중호우 또한 여러 기록을 갈아치운 판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고 있다. 한 순간 움찔하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던 길을 내쳐 갈 뿐이다.

    여전히 개발주의는 수그러들 기미가 없고, 경제성장율이 OECD 1등 먹었다는 걸 자랑이라고 내세운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빠진 정책비전에 ‘그린뉴딜’ 딱지를 붙이는 뻔뻔함에 견주면 천진하다고 해야 하나. 내친 김에 온실가스 배출비중이 10%에 이른다는 농업분야를 보면 아예 대책이 없다. 그 주범인 공장식 축산과 화학물질(비료, 농약)을 줄일 방안과 지속가능한 농업을 향한 구상도 빠져 있다.

    이런 아둔함 또는 무모함이 혹여 기후변화 부정론에 근거하거나 ‘과학기술 만능주의’에서 비롯된 무책임이 아니기를 바란다. 어쩌면 경제성장 지상주의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코로나19가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아 대한감염학회 등 대다수 전문가단체가 거리두기 3단계 격상을 촉구했음에도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들먹이며 머뭇대고 있는 태도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초유의 물난리가 휩쓸어가고, 초대형 태풍이 다가오고, 수퍼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세상이 이래도 되나 싶다. 그러는 사이 상황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고 우리는 종말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하긴 이 놈의 인류란 멸종을 당해봐야 정신 차릴 종자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유난스럽지 않느냐고? 그러는 너는 뭘 했느냐고? 그러고 보니 별로 할 말이 없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시골에 산다는 핑계로 자가용을 몰고, 논농사를 좀 짓는다고 화물차 끌고… 이 지구에 못할 짓 많이 하고 산다. 나름 온실가스 좀 줄여보자고 채식(페스코)을 하고, 여적 에어컨 없이 버티는 따위로는 갚지 못할 만큼. 어쩌면 이 모두가 기후위기를 불러들인 응분의 책임을 벗어보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심리적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더위가 꺾인다는 처서가 그제였다. 내가 겪어온 바로는 그렇게 덥던 날씨도 처서만 지나면 신기하게도 싹 가셨더랬다. 올해는 아니다. 오늘도 최고기온은 섭씨 34도를 웃돌았다. 9월로 접어들어도 30도를 넘는다는 예보다.

    그런 가운데서도 벼는 이삭을 올렸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해선가, 이삭이 그닥 히마리가 없어 보인다. 그저 올라오는 태풍 잘 견뎌내고 잘 여물기를 바랄 뿐.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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