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5월 이후 사회운동과 정치철학
    [책소개] 『비혁명의 시대』(김정한/ 빨간소금)
        2020년 08월 22일 1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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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5월, 혁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곧이어 4월 27일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지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다. 그렇게 1991년 5월 투쟁은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5·18 광주항쟁과 6월 항쟁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1991년 5월의 일들은 역사의 먼지와 같은 사건일지 모른다. 당시 공식적인 명칭 없이 ‘분신 정국’이라 불렸고, 뒤늦게 ‘1991년 5월 투쟁’이라는 다소 애매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시 기억을 소환하자면, 당시 백골단의 폭행으로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를 당했으며,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강경진압으로 사망했다. 전남대생 박승희를 비롯해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차태권, 정상순, 이진희, 석광수 등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연이어 분신했다.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그것은 여전히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5·18의 학살자들과 5공화국 독재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제2의 6월 항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급진적 민중운동의 마지막 필사적인 저항과도 같았던 1991년 5월 투쟁은 갑자기 소멸했다. 그 이유가 연속적인 분신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검찰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조작된 허구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했던 것은 서럽고 처절한 투쟁이 그만 종결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제2의 6월 항쟁’이라고 불린 1991년 5월 투쟁은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로 거리의 정치를 복원했다. 하지만 그 패배의 효과는 혁명적 분위기가 범람하던 정치적 시공간의 봉합으로 나타났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구좌파적 반체제 운동이 1848년 혁명에서 출발해 1871년 파리코뮌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제도화한 후, 1968년 혁명과 그 ‘지연된 효과’로서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에 이르는 거대한 순환을 구성했다고 평가한다. 이에 비유하자면 이른바 ‘1980년대’라고 불리는 정치적 시공간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출발해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정점에 이른 후, 1991년 5월 투쟁과 그 ‘지연된 효과’로서 1992년 대선 민중후보의 패배와 좌파 진영의 산개/청산에 이르는 12년 동안의 순환을 나타낸다.

    1991년 5월, 비혁명의 시대를 열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 투쟁까지 한국 사회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였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적으로 분출했고, 드디어 한국에서도 계급이라는 개념에 어울리는 계급의 형성이 가시화되었다. 이어서 1990년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조합의 연합체로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만들어졌다. 이는 전교조를 비롯한 새로운 민주적인 조직들이 결성되어 기존의 관변 단체를 대체하려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5․18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과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를 혁명론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하려는 사회과학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에 맞춰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술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또한 지하에서 비합법 투쟁에 매진했던 사회운동 조직들은 공공연하게 반합법 활동을 전개하면서 혁명운동의 전형을 창출하려는 실험을 계속했다. 대학은 각종 세미나와 소모임을 통한 좌파 이론 학습과 혁명의 정체를 둘러싼 매일의 논쟁으로 뜨거웠다.

    이 대략 4년 동안 한편으로는 혁명적인 민주화의 열망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고 민중운동 세력이 기초적인 조직화의 틀을 마련해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9년 공안통치와 1990년 보수대연합이라는 3당 합당 등을 통해 지배 세력은 민주화 과정을 끊임없이 역전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착적으로 대립하는 국면에서 1991년 5월 투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범위와 방향을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지배 세력과 저항 세력의 중대한 결전의 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민중운동 세력은 패배했고, 민주화 과정은 극히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재야․지식인 운동은 고립되거나 해체되었다. 혁명이라는 화두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거세되었다.

    이렇게 6월 항쟁이 열어낸 혁명적 분위기가 흘러넘치던 정치적 시공간은 봉합되었다. 그에 따라 6월 항쟁에 대해서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 혁명 모델에 준거하여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시킨 자유민주주의적 시민운동이라는 평가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그 귀결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완성이 아니었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왜곡·축소하고 1980년대 사회운동의 잠재력을 봉합시킨, 서구 모델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화였다. 지금까지도 반복되는 표준적인 민주주의 담론들―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한 후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으니 이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은 그런 정치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환상을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1991년 5월 이후를 비혁명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낯설 수 있다. 비혁명의 시대는 혁명을 못한 시대이기도 하고 혁명적이지 않은 시대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은 너무 좁았다. 혁명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세상이 바뀌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 책에는 1991년 5월 이후의 사회운동과 정치철학의 풍경을 다시 돌아보면서 다른 미래를 여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386세대, ‘살아있는 죽음’의 귀환

    역사가 없는 곳에 신화가 자리한다면, 이는 민주화 세대에게도 해당한다. 민주화 세대는 주로 1987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을 가리킨다. 때로는 여기에 1970년대 유신독재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대체로 1980년대라고 불리는 민주화를 상징하는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경우 민주화 세대라는 명칭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386세대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1960년대에 출생해서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90년대에 30대에 이른 연령층을 가리킨다. 1995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에 빗댄 ‘모래시계 세대’라는 용어를 대신해 1996년 총선과 1997년 대선을 전후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후 시민운동의 정치개혁론과 정치사회의 젊은 피 수혈론, 언론과 자본의 상업적 마케팅 등이 결합해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1980년대는 신화가 되었고 386세대는 그 신화의 주역이 되었다. 그에 힘입어 386세대는 김대중 정권에서 부분적으로, 노무현 정권에서 전면적으로 지배 엘리트로 변모했다. 이런 점에서 민주화 세대가 386세대로 변모하는 과정은 사회운동의 정치적 주체가 지배 엘리트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관한 한, 1980년대 민주화 세대의 역사는 이미 오래 전에 종결했다.

    대내적으로 1991년 5월 투쟁이라는 분수령을 넘으며 1980년대 사회운동의 12년 동안의 순환이 종결되고, 대외적으로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된 정세에서 대부분의 민주화 세대가 선택한 것은 사실상 고백과 청산이었다. 1980년대의 ‘미망(迷妄)’을 증언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고백들이 잇따랐고 이른바 ‘후일담’이 유행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정치적 주체는 이렇게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살아남았다. 민주화 세대의 역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 종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얄궂음은 6월 항쟁의 혁명적 효과를 봉쇄한 대가로 확립된 6월 항쟁의 신화화에 힘입어 ‘민주화 세대’를 ‘386세대’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1980년대 사회운동을 스스로 부정한 살아있는 죽음(living-deadness)의 귀환이었다.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와 그에 흡수된 386세대가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앞장서 추진하는 역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악몽은 아니었던 셈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는 386세대는 6월 항쟁을 비롯해 1980년대를 대표하기는커녕 그에 관해 발언할 자격도 주어질 수 없다.

    당시 민주화 세대의 주류가 추구했던 민중주의는 사회적 약자나 하층에 대한 정서적 연대를 유지하고 지배 엘리트의 도덕적인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도덕적인 잣대로 접근해서 ‘우리’와 ‘적’을 구별하고, 대중들의 도덕적 분노를 동원하는 방식은 오히려 그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해법의 창출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정당성의 위기에 처한 지배 세력이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하는 정치 갈등을 호도하기 위해 민중주의를 활용하여 임의의 ‘적’을 상정하고 도덕 담론으로 ‘말들의 전쟁’을 전개할 때 대중들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 더구나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일체의 현대 정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공동체의 가치 규범만을 강조하는 민중주의에는 어떤 대항헤게모니적 기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제도적인 차원에서 민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를 통해 ‘우리’와 ‘적’을 나누는 구획선 긋기를 반복하여 사회 질서를 통합하려는 ‘정치 논리’(political logic)이다. 즉 ‘텅 빈 기표’(empty signifier)로 작용할 뿐이다. 386세대를 매개로 민중주의가 신자유주의 기획과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정한 애도의 정치를 위해

    일찍이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이상(理想)의 상실에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애도는 상실의 슬픔을 고통스럽게 극복함으로써 상실한 대상과 분리되고 결국 그 대상을 잊는 작업이다. 애도가 실패할 경우 나타나는 멜랑콜리의 주요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이다. 그 가운데 애도와 구별되는 멜랑콜리의 결정적인 차별성은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이다.

    1980년대 운동 사회의 정치 주체들은 사회적 애도가 불가능한 정치적 조건에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다 죽어간 자들의 뜻을 받들어 정의와 진리의 길을 추구하려 분투했다. 그리고 편리한 일상생활에 젖어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자책하고 비판했다. 때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죽어간 자들을 뒤따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의 정치 주체를 애도에 실패한 멜랑콜리 주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열사 문화’를 구성했던 운동 사회는 죽은 자들에 대한 양가적인 관점과 태도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애도를 거부하거나 주변화한 멜랑콜리 주체의 감성 세계로 접근하는 곤경에 직면했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것은 멜랑콜리 주체를 애도의 주체로 전환시키고 진정한 애도의 정치를 수행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적 애도라는 문제이다. 애도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완수될 수 없다. 사회적 애도는 공동체적인 의례를 통해 죽은 자를 상징계(또는 상징 질서)에 등록하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를 상징계의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망자와 거리를 둘 수 있게 하고, 또한 죽음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도 상실을 함께 슬퍼하면서 자신이 겪은 상실과 슬픔을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애도는 “애도 간의 대화”이고 ‘한 사람의 애도와 다른 사람의 애도 간의 연결’이다. 사회적 애도는 죽음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타인과 함께 상실을 승인하는 것이며, 죽음을 상징화하는 작업을 통해 망자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관해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애도는 죽음의 등록에 의해 상징계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애도의 정치는 사회적 애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애도도 결코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애도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죽은 자와 완전히 분리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성공적인 애도는 죽은 자와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고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심각한 (상징적) 폭력을 함축”한다. 따라서 적절한 애도는 완수할 수 없는 애도이며, 오히려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애도의 정치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죽은 혹은 살아 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 “타자와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애도의 정치는 죽은 자에 대한 사회적 애도와 더불어 타자와 마주하고 관계하는 양식을 전환시키는 일이다. 이를 ‘애도 간의 대화’에 기반한 새로운 연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민운동의 부상

    1991년 5월 이후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1997년 외환위기와 IMF관리체제로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7년 동안 1990년대에는 소비사회, 신세대, 대중문화,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시대를 대표하는 언어가 되었다. 1980년대의 민중 담론은 촌스러운 옛 시절의 것이 되었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더 혁명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90년대는 매끄러운 시대는 아니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자본과 노동의 문제는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며, 여성 차별과 생태 위기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도 생겨났다. 1980년대와는 달리 개혁, 시민사회, 민주주의 담론들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1980년대에 제기된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의 현실은 변화했지만 어떤 이들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시대착오적이었다. 어쩌면 200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때로는 반복적으로 때로는 새롭게 터져 나오는 사회적 모순과 균열은 1990년대에 예비된 후과(後果)일지도 모른다. 한 시대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다음 시대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적 대표자들은 바뀌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인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아닌 상황에서 난처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바탕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대외적으로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종언과, 대내적으로 1991년 5월 투쟁의 실패를 계기로 갑작스럽게 도래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이후 지식 사회에서 재발견된 김일성-마르크스주의와 레닌-마르크스주의는 냉전 및 분단 체제를 배경으로 5공화국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이념적・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쇠퇴하고,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의 전망이 더욱 불투명해지는 세계사적 시간과 어긋나 있었다. 1991년 5월 투쟁은 1980년대 민중운동의 대중적 정치력, 조직적 동원력, 문화적 군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의 한계를 모두 드러내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더 급진적으로 촉발하지 못했다. 그 효과로 1990년대에는 민중이라는 용어 자체가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혼란의 시대에 부상한 시민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반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고 민중운동의 반정립으로서 노동자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당시 시민운동은 “과거의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민중운동과 자신을 구별하면서―비민중운동 혹은 반민중운동적 정체성―온건한 이념을 표방하고 합법적・제도적 수단과 통로를 활용하는 운동으로, 나아가 계급・계층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중간층적 운동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였다.” 또한 다양한 포스트 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수용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포스트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국에 수용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본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이론화한 라클라우와 무페를 인용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와 무관한 반마르크스주의의 알리바이였다. 이와 달리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반자본주의 전략으로서 급진민주주의 기획을 제시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를 포함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이를 급진화함으로써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전략 자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반자본주의 기획을 기각하고 개혁이나 개량을 추구하는 이론적・정치적 입장이라는 비난은 오해에 의한 것이었다.

    급진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를 포함한다. 이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을 기각하고 일정한 개혁을 지향한다는 한국적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입론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물론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사회주의는 급진민주주의의 하나의 구성 요소일 뿐이다. 생태주의,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등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사회운동들 또한 급진민주주의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는 자본주의적 모순과 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적대들이 있으며, 이 다원주의적 조건에서는 어떤 하나의 사회운동이 선험적으로 중심적인 지위나 지도적인 역할을 담지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운동들은 등가 관계에서 헤게모니적 실천을 전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좌파의 대안은 민주주의 혁명의 영역에 확고히 위치하고, 억압에 맞서는 다양한 투쟁들 사이의 등가사슬을 확장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좌파의 과제는 자유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단념하는 것일 수 없으며, 이와 반대로 그것을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방향으로 심화하고 확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해가 일어난 당대의 지적・운동적 상황과 분위기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1980년대가 5・18 광주항쟁에서 1991년 5월 투쟁에 이르는 12년의 연대기를 갖고 있다면, 1990년대는 1991년 5월 투쟁의 실패 이후 1997년 민주노총 총파업과 외환위기로 나아가는 7년의 시공간을 가리킨다. 이 짧은 1990년대는 한편으로는 문민정부의 출범, 경제 성장에 대한 상찬, 신세대의 출현, 각종 포스트 담론의 유행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비합법 전위 조직의 해산, 마르크스주의의 청산과 전향, 1980년대에 대한 후일담의 유행으로 채워졌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대표적인 악법인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하려다가 보수 세력의 반발로 기존의 전향서를 준법서약서로 대체한다는 방침으로 후퇴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1990년대가 1980년대의 증상을 앓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궁리하거나 실천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반복적인 곤혹을 안겨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순수한’ 마르크스주의는 없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선언은 그 위기의 원인과 효과를 적합하게 인식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헤게모니 투쟁–계급투쟁-대중운동, 당신은 어디에 내기를 걸겠는가

    이 책의 2부는 ‘정치철학의 풍경’이다. 2부의 주요 등장인물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라클라우와 무페, 지젝, 라캉이다. 이들이 맺은 관계, 이들이 벌인 논쟁을 통해 1990년대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되짚는다.

    생전에도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극단적이었다. 이는 그가 항상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스탈린주의적 교조주의(경제주의와 인간주의)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려는 그의 시도는 탈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공산당 당적을 유지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스탈린주의라는 비판이 따라다녔다. 더구나 이론적‧정치적 정세에 대한 철학적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알튀세르의 작업은 이런 극단적인 반응을 더 강화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런 알튀세르의 특징은 이례적으로 주목할 만한 설전을 벌인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원적 헤게모니 투쟁을 주장하는 라클라우와 계급투쟁의 예외성을 강조하는 지젝의 모습은, 탈마르크스주의적 알튀세르와 스탈린주의적 알튀세르 사이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논쟁의 지형은 달라졌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20여 년 동안 좌파 담론에서 적대, 모순, 변혁, 이행 등의 용어는 고색창연해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시민사회, 정당, 선거/투표 등을 배치하는 각종 ‘수식어(자유, 참여, 다원 등) 민주주의’ 담론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를 긍정하는 한에서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모두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며 한때 자유민주주의로 전향했다고 ‘오해’받은 라클라우와, 그의 기획에 참여하는 사상적 동료로 한때 ‘오해’받은 지젝이 서로 주고받은 격렬한 응전, 특히 적대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그 자체로도 세간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마주침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는 아니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주요 이론적 자원으로 삼아 강단과 시장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라클라우는 무페와 공저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서 그람시, 알튀세르, 라캉을 결합한 ‘급진민주주의 전략’을 정립하여 당대 논쟁을 주도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에서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결합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정체된 학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단 한 권의 책으로 세상의 주목을 끌어냈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의 이력은 닮아 있다.

    사실 라클라우가 호언하듯이 지난 20여 년의 정세에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자는 그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정치의 기본 논리로 작동해왔으며,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대부분의 (신)사회운동들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헤게모니 투쟁을 충실히 수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회운동들이 세계 자본주의를 변혁하거나 개혁하는 데 실패하고 상당 부분 자본에 포섭되거나 애초의 활력을 상실해온 것도 사실이다. 지젝이 급진민주주의 전략을 내세우는 라클라우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반기를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상징계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는 자본주의는커녕 현실의 민주주의조차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헤게모니 투쟁을 상대화하고 다시 계급투쟁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러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계급투쟁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조직 형태를 통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알튀세르는 단 하나의 희망은 대중운동 속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어떻게 기존의 오류와 한계를 넘어서 공산주의에 다가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선언한 바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속에 여전히 살고 있고 그것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이 탈마르크스주의적 알튀세르와 스탈린주의적 알튀세르의 대립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구획하도록 만든 알튀세르적인 이론적·실천적 지형을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헤게모니 투쟁’(라클라우), ‘계급투쟁’(지젝), 그리고 ‘대중운동’(알튀세르)이라는 세 개의 카드가 쥐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어디에 내기를 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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