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쭤이, 기습으로
마오쩌둥 생포 계획하다
[국공내전㊹] 공산당, 화북인민정부와 군정대학 설립 등 체제를 정비
    2020년 07월 15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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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투에서 승리하고 요서 지역의 진저우 등에서 결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공산당은 차근차근 체제를 정비하였다. 1948년 9월, 공산당은 화북지역에 화북 인민정부를 설립하였다. 본래 화북지역은 진찰기 해방구와 진기로예 해방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진찰기 해방구는 산시성과 내몽골의 차하르 지역, 허베이성 일부를 관할하였다. 진기로예 해방구는 산시성 일부와 허베이성 일부, 산둥성 일부와 허난성을 관할하였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류보청과 덩샤오핑 휘하의 중원 야전군은 1948년 하반기에 허난성의 카이펑, 뤄양과 난양 등을 잇따라 점령하며 주도권을 확립하였다.

공산당이 허베이성의 성도인 스자좡을 함락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동안 불리한 전황 속에서 고전하고 있던 화북지역의 판도를 일거에 바꿔놓게 된 것이다. 산시성(陝西省)에 머물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공 지도부는 허베이성 핑산현 시바이포로 자리를 옮겨 안정적으로 내전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전투의 승리는 칭다오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산둥성 전체를 사실상 평정한 것으로 공산당에게는 자신감을, 국민정부에게는 열패감을 안겨 주었다. 지난이 함락되자 미국도 크게 실망하였다. 앞날을 비관하게 된 미국이 장제스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국대사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rat)는 광시계 출신의 부총통 이쭝런과 접촉하며 장제스 이후를 준비하였다.

1946년 9월 26일, 공산당은 인민대표대회를 열어 화북 인민 정부의 출범을 선포하였다. 둥비우(蕫必武)가 주석을 맡았으며 보이보(薄一波)(1), 란공우(藍公武), 양슈펑(楊秀峰)이 부주석을 맡았다. 화북 인민정부의 성립은 광대한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대규모 전투를 벌이면서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화북 인민대표대회 모습

공산당은 또 1948년 9월에 중원군구 군정대학을 설립하였다. 이 대학은 중원지역의 인민 해방군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교육기관이었다. 본래 이름은 예섬악 군정대학이었는데 개칭한 것이었다. 예섬악이라면 허난성, 산시성(陝西省), 후베이성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중원 해방군이 관할했던 지역을 포괄했는데 이름을 바꿔 지역적 색채를 지우고 규모도 크게 확대하였다. 중원 야전군 사령인 류보청이 교장을 맡았다. 이 무렵 류보청은 중원지역 해방군 지휘관을 대량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내전이 국지전에서 전면적 결전으로 확산되었고 작전 규모도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씩 맞붙는 대규모 회전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처음에 허난성 루산(魯山)현에 설립하였다가 1948년 10월에 정저우(鄭州)로 이전하였다. 1949년에는 난징으로 갔다가 충칭으로 이전했는데 난징 시절에는 1만명이나 되는 청년이 입교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공산당은 11월 1일, 군대 조직개편도 단행하였다. 기존의 지역 명칭에 해방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던 것에서 지역과 야전군을 붙여서 사용하였다. 즉 각 지역 인민해방군의 칭호가 서북 야전군, 중원 야전군, 화동 야전군, 동북 야전군, 화북 야전군으로 되었으며 과거의 ‘종대’는 ‘군’으로 개칭하였다. 인민 해방군의 편제는 야전군 산하에 병단, 병단 산하에 군, 군 산하에 사단, 사단 산하에 연대로 되었다. 이 편제는 얼마 후인 1949년 1월 15일, 서북 야전군부터 위에 기록한 차례대로 제 1야전군 등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화북 야전군은 산하 3개 병단과 함께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직할부대로 귀속되었다.

마오쩌둥, ‘9월 회의 통지’를 직접 기초하다

1948년 10월 10일, 공산당은 이른바 ‘9월 회의 통지’를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내전 발발 후 5년 이내에 장제스와 국민당의 반동통치를 뒤엎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공산당은 모든 민주당파, 모든 인민단체와 무당파 민주인사를 포괄하는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통지는 마오쩌둥이 직접 기초한 것으로 상당히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사 없이 혁명 없다.”는 그의 철학대로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혁명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주목할만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7월부터 1948년 6월까지 작전에서 인민해방군은 적 264만명을 섬멸하였다. 그중 포로가 163만명이다. 2년간 인민해방군은 120만명이 증가하여 현재 280만명이다. 정규군 176개 여단이 증가하였으며 병사도 61만명이 증가하였다. 해방구의 면적은 235만 평방킬로미터로 전 국토의 약 25퍼센트에 해당한다. 해방구 인구는 1억 6천 8백만으로 전체 인구의 35.3 퍼센트에 이르렀다. 확보한 현성 이상의 도시가 586개로 전체 도시의 29퍼센트에 이른다.” 그는 그 외에도 “토지개혁을 통해 1억 인구가 혜택을 보았으며 지주계급과 부농의 토지를 농촌 인민들에게 분배했는데 소작농이 우선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우리 당원은 1945년 5월 121만명이었는데 현재는 300만명에 이르렀다. 1927년 국민당의 배신때에 5만여명, 그후 1만명까지 줄었는데 1934년 토지개혁 등을 통해 30만명으로 증가하였다. 1937년에는 남부 혁명의 실패로 다시 4만명으로 줄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기록하는 마오쩌둥의 심사도 감개무량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곡절이 많은 과정이었다.

그는 경계할만한 요소도 거론하였다. “우리 당은 최근 1년간 당내에 존재하던 문제들을 극복해 왔다. 지주와 부농 등 성분의 불순, 지주 부농사상 등 사상의 불순, 관료주의와 명령주의 등 사업작풍 불순 등 현상을 시정한 것이 그것이다. 토지개혁과정에서 중농의 토지를 침해한 일, 소상공인들을 공격한 것도 바로 잡았다. 일부 지역에서 반혁명을 무리하게 진압하는 등의 좌경적 오류를 교정하였다. 과거 3년간, 특히 최근 1년간 위대하고 격렬한 혁명투쟁에서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아 전 당의 정치적 성숙이 크게 진보하였다.”

국민당 통치지역 내의 상황도 거론하였다. “우리 당은 대도시에서 노동자, 학생, 교원, 교수, 문화인사, 시민과 민족 자산가들을 우리 편에 서게 하였다. 모든 민주당파, 인민단체가 우리 편에 서 있으며 국민당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푸젠, 광둥, 장시, 후난, 후베이와 광시 경계, 구이린과 윈난, 안후이와 저장 경계 등 남부의 광대한 지역에 유격전쟁 근거지를 세웠으며 유격부대가 3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국민당의 군사역량은 1946년 7월에 430만명이었다. 2년간 섬멸당하고 탈주한 병사가 309만 명에 이르렀다. 244만명을 보충하여 지금은 355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300만명을 보충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섬멸당하거나 탈주하는 자가 450만명에 이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5년이 지나면 국민당 병력은 200만명 남짓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편입시킬 포로병이 170만명으로 예상하는데 전체 포로 중 6할에 해당한다. 농민 약 200만명이 참전하면 현재의 병력 280만명 중 일부가 소모된다고 하여도 500만명이 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국민당 반동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근거로 한 수치는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예상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한 것이니 이 통지문을 읽는 공산당 인사들이나 해방군 지휘관들은 자신감과 낙관을 가졌을 것이다. 전황은 마오쩌둥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호전되어 1948년 말에 이르면 해방군의 숫자가 국민당의 총병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지난 전투의 승리와 동북 결전의 완전한 승리, 타이위안 공격 등 각지의 전투에서 대부분 공산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공산당, 전범자 명단을 발표하다

공산당의 자신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48년 11월 1일, 공산당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 부총사령 펑더화이의 명의로 ‘전쟁 범죄자의 처리에 관한 명령’을 발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공산당에 맞서 싸운 군인뿐 아니라 국민당의 전쟁을 돕는 사람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당 지휘관 및 당조직, 정부 각급 관리들, 그 명령을 받아 각종 범죄 행위를 저지른 자들은 모두 전범으로 논죄할 것이다.

1. 인민을 도살한 자, 인민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훼손한 자. 인민의 가옥을 불태운 자.
2. 독가스를 살포한 자
3. 포로를 살해한 자
4. 무기 및 탄약을 파손한 자
5. 통신 기자재 및 일체의 문건을 훼손한 자
6. 양식 및 피복창고와 기타 군용물자를 훼손한 자
7. 수도나 전기설비, 공장건물 및 각종 기자재를 훼손한 자
8. 육해공군의 교통시설 및 수단을 훼손한 자
9. 은행금고를 훼손한 자
10.문화재나 고적을 훼손한 자
11.공공재산이나 건축물을 훼손한 자
12.해방지역 도시등을 공습하거나 폭격하는 자

전범자 43명 명단을 발표한 신화사 통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군은 국민당 반대파 군정인사를 우대할 것이다. 주동자는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부득이 명령에 따른 자는 불문에 부칠 것이다. 공이 있는 자는 포상할 것이다.”

한마디로 국민당 편에 서서 하는 모든 군사적 활동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면 우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후 1948년 12월 25일, 공산당은 신화사 통신을 통해 ‘내전 전범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명단에는 장제스를 필두로 리쫑런, 천청, 바이충시, 허잉친, 구쭈통 등 국민정부 군대 수뇌부를 비롯하여 천궈푸, 천리푸, 쿵상시, 쑹즈원, 쑹메이링 등 정계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주요 지휘관으로는 웨이리황, 후쫑난, 푸쭤이, 옌시산, 두위밍, 탕언보 쑨리런 등이 올랐다. 장제스를 포함해 43명은 ‘일급 전범’이 되었으며 그 외에도 국민당 정부 당정군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포함되었다. 특히 화이하이 전역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12병단 사령관 황웨이는 “전투 중 독가스를 사용하여 전범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여 전범 명단에 올랐다.

이에 대응하여 장제스는 1949년 원단에 ‘전국 군민 동포에게 드리는 편지’를 발표했다. 장제스는 이 편지에서 중공과 회담하기를 원하며 5개항의 조건이 있다고 썼다. “국가의 독립이 완성되는데 해로움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인민들의 휴양과 생업을 도와야 한다. 신성한 헌법을 함부로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사항을 군대가 확실하게 보장하여야 한다. 그래야 인민들의 자유로운 생활과 최저한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전황은 국민당 측에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949년 1월 27일 ‘런민일보’는 신화사의 전문을 전재하며 주요 전범 37명을 추가하였다. 거기에는 장제스의 큰 아들인 장징궈와 전쟁을 고무했다는 이유로 후스(胡適) 등이 포함되었다. 전쟁범죄자 명단 발표는 내전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려는 공산당의 의도가 담겨 있다. 공산당 쪽 인사들에게는 자신감으로 국민당 쪽 인사들에게는 커다란 압력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1959년 석방된 국민당 전범들의 모습

푸쭤이 시바이포 기습 계획의 전말

이 무렵 장제스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맞이한 현실은 전투에서 패배한 소식, 정치와 경제가 혼란스러운 소식뿐이었다.

9월 장징궈가 경제 혼란에 대응하여 상하이에서 ‘호랑이 때려잡기 시작’
9월 24일, 지난 함락과 수비군 10만명 섬멸
10월 5일, 해방군 타이위안 공격
10월 15일 진저우 함락
10월 15일 해방군 옌타이 점령, 이로써 칭다오를 제외한 산둥성 전체 공산당이 차지함
10월 19일 창춘 수비사령관 정동궈 투항 및 창춘 함락
10월 22일 해방군 허난성 정저우 점령
10월 26일 랴오야오샹 부대 궤멸과 주요 지휘관 모두 포로로 잡힘

장제스는 화북 초비사령관 푸쭤이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장제스는 푸쭤이의 군사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본래 바이충시, 웨이리황과 함께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었다. 그래도 장제스는 세 사람의 능력을 사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사령관으로 배치하였다. 동북을 맡았던 웨이리황은 장제스와 마찰을 거듭한 끝에 신임을 잃어버렸다. 창장을 방어하는 바이충시는 광시계 군벌의 맏형격으로 주요 견제 대상이었다.

이에 비해 푸쭤이는 처신도 조심스러웠으며 장제스와 관계도 비교적 원만하였다. 드라마에 보면 장제스가 푸쭤이에게 “국면을 전환할 방책이 있느냐?”고 간절하게 묻는다. 푸쭤이는 “국면을 일거에 호전시킬 수 있다. 지금 공산당은 동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럴 때 스자좡을 기습하여 마오쩌둥을 사로잡겠다.”고 보고하였다. 장제스는 희색이 만면하여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각별히 비밀을 유지하여 성공하라.”고 격려한다.

기습으로 마오쩌둥 생포를 시도했던 푸쭤이

푸쭤이의 계획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기책이었다. 수세에 몰린 군대라면 수비에만 골몰하지 기습으로 국면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한다. 푸쭤이는 본래 성동격서, 기습, 양동작전 등 해방군이 주로 쓰는 전술을 예사로 썼다. 그는 내전 초기 공산당 화북의 근거지인 장자커우를 기습하여 네룽전 휘하의 해방군을 패퇴시킨 일이 있었다. 따퉁의 전투에서도 그는 위위구조(圍魏救趙)의 전술로 훨씬 많은 네룽전의 화북 해방군을 격퇴한 바 있었다. 특히 장자커우의 패배는 화북의 전황에 결정적이었다. 병력이 절대 열세였던 서북을 화북지역에서 엄호해야 하는데 참패하자 공산당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공산당은 수도인 옌안까지 내주고 섬북 고원으로 후퇴하였던 것이다.

푸쭤이의 계획은 그가 보유한 기병사단, 즉 차량과 장갑차 등을 위주로 한 기계화사단이 있었으므로 가능하였다. 항공기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푸쭤이가 계획대로 스자좡을 기습했다면 성공할 가망이 높았다. 그랬더라면 스자좡 부근의 시바이포에 자리잡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가 커다란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푸쭤이에게는 예기치 않은 불안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부대 핵심부에서 암약하는 공산당 첩자의 존재였다.

공산당 첩보원, 푸쭤이의 기습계획을 당에 통지하다.

1948년 10월 장제스와 화북 초비사령부 사령관 푸쭤이는 비밀리에 스자좡과 중공 중앙이 자리잡고 있는 시바이포를 기습하려 하였다. 현재 밝혀진 사료에 따르면 중공 중앙은 사전에 이를 알고 있었다. 최소한 4개조의 지하 공작조가 이 계획을 입수하여 중공 중앙에 통지했다는 것이다.

푸쭤이의 비밀명령은 극도의 보안 속에 이루어져 부대이동 등이 모두 암호화되어 전달되었다. 구체적인 임무는 푸쭤이가 신임하던 참모처장 허주슈(何祖修)가 하달하였다. 그런데 화북 초비사령부 참모처에 첩자가 암약하였으니 류광궈(劉光國)와 또 한 사람 김아무개라는 인물이었다. 류광궈는 공산당 정보조직인 화북국 사회부 간링(甘陵) 정보조에 속한 정보원이었다. 그들은 부대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감지하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부대가 어느 지역을 공격할지, 어떻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참모처의 동료이자 지도 제작원인 추이더이(崔德義)에게 무심한 어조로 물어 보았다. “요즘 바쁘냐?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추이더이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대로 대답하였다. “위에서 스먼(石門)(2), 푸핑(阜平) 일대 지도를 그리라 하네. 푸핑지역 지도 위에 폭격목표도 표시해서 공군에 즉시 발송하라는데.” 그것으로 류광궈는 부대의 공격목표가 스자좡과 푸핑 지역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10월 22일, 작전처 참모 허주슈는 직접 국군의 스자좡, 푸핑, 핑산 등에 대한 습격 작전명령을 류광궈에게 넘겼다. 류광궈가 문서를 정서하는 사서였던 것이다. 류광궈는 흥분을 애써 감추면서 문서를 베꼈다. 그는 잘 훈련된 첩자여서 작전명령과 계획 등을 모두 암기하였다.

10월 23일 오전, 화북 초비사령부는 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같은 날 새벽에 첩자 김아무개는 베이핑 시안먼(西安門) 부근의 한 회족 식당에서 정보를 간링의 정보책임자에게 빠짐없이 전달하였다. 상황은 위급하였다. 화북 초비사령부의 습격 날짜가 겨우 3일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의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무선 전신기로 정보를 발송했으나 간링의 비밀 무선전신기 선이 한 개 끊겨 있었던 것이다. 노출될 것을 우려한 간링의 정보원은 급히 해방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급히 보고했다. “상황이 위급합니다. 푸쭤이가 4개 기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 그리고 폭파대를 파견하려 하고 있습니다. 10월 27일 바오딩을 거쳐 스자좡, 푸핑, 핑산 등을 기습할 것입니다. 아울러 아군 후방기관, 학교, 공장, 창고 등을 폭파하려 합니다.” 이 보고는 즉시 군구 사령원인 네룽전에게 전달되었다.

정보가 마오쩌둥이 있는 시바이포로 계속 전달되었다. 드라마에 보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인민해방군 총사령인 주더가 농담조로 주고받는다. 마오쩌둥이 “내가 제갈량이 되어 공성계를 펼쳐볼까? 푸쭤이는 사마의가 되어 헛물을 켜는 거요.” 하고 웃자 저우언라이는 “주석이 공성계를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요. 차라리 내가 공성계를 하는 것이…”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웃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10월 26일, 마오쩌둥은 두 개의 전문을 기초하였다. 하나는 “화북 각 지휘관들은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바오딩과 스자좡 사이 인민을 보호하라. 비적들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라.” 다른 하나는 같은 내용으로 10월 28일자 런민일보에 보도되었다. 이에 따라 기중군구(허베이 중부를 관할하였다.) 부대와 민병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공성계가 아니라 실제로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10월 30일, 저녁 푸쭤이의 국군 선두부대가 탕허(唐河) 남안에 이르렀다. 스자좡과 불과 100킬로 거리였다. 이때 화동 야전군 3종대가 푸쭤이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밤낮없이 강행군하여 이동했다. 10월 31일 새벽, 화동 야전군 부대가 샤허에 도달하여(沙河) 푸쭤이군을 저지하였다. 숨가쁘게 방어부대 배치를 완료한 것이다.

10월 31일, 런민일보는 “스먼 인민들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푸쭤이 비적부대를 섬멸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날 마오쩌둥은 신화사를 통해 “푸쭤이의 도적들은 북방 전선에서 몇 개월 내 끝장날 것이다. 지금 스자좡 기습 계획을 망상하는데 베이핑은 안전한가?“ 하고 압박하였다. 이 기사는 11월 2일 런민일보 초판에도 실렸다. 우리가 기습계획을 모두 알고 준비를 완료했으니 싸울 테면 싸우자는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베이핑을 기습할 수도 있다는 심리전을 펼친 것이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동북 야전군 종대에 산하이관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선으로 구분된 지역이 핑산현. 별표가 시바이포

푸쭤이는 기습계획이 어긋난 것을 알고 즉시 후퇴명령을 하달했다. 드라마에 보면 푸쭤이는 한가로이 권법을 연습하다가 라디오 방송을 듣고 화들짝 놀란다. 용병의 귀재답게 그는 결단도 빨랐다. 해방군이 미리 알고 부대를 배치했다면 기습이 전혀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기습계획이 실패한 뒤 푸쭤이는 내부 조사에 착수하였다. 류광궈 등이 혐의를 받고 조사대상이 되었다. 엄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류광궈는 배반하는 척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하여 공산당에 정보를 보고하였다. 그의 활약은 내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의 공산당 조직이 가진 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로써 장제스가 기대했던 마오쩌둥 생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서북을 전전할 때에도 후쫑난에게 마오를 생포할 것을 당부하였다. 후쫑난의 명령을 받은 류칸이 마오를 줄곧 쫓았지만 실패하였다. 그때에도 후쫑난의 참모로 있던 숑샹후이의 역할이 컸다. 숑샹후이는 후쫑난 부대의 옌안 공격계획도 미리 알려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였다.

청난좡에서도 국민정부 공군이 국민당 첩자의 활약으로 숙소를 폭격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마오쩌둥의 이발사 등이 폭격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수뇌부 몇 사람을 암살한다고 하여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한때 마오쩌둥과 어깨를 겨뤘던 장궈타오도 국민당에 귀순했지만 공산당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뇌부를 암살하거나 모해하여 국면을 바꾸려는 시도는 예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수뇌부 암살은 상대에게 매우 큰 유혹이라는 반증이다.

10월 23일, 중원의 요지 정저우가 해방군의 손에 떨어졌다. 정저우는 허난성 제1의 도시로 징한철도(베이징-한커우)와 룽하이 철도(란저우-롄윈강)의 교차점으로 전략적 요지였다. 11월 5일에는 해방군이 국군이 다시 점령했던 난양을 점령했다.

1948년 11월 4일, 상하이에서 호랑이 때려잡기를 진행하던 장징궈가 사임했다. 장징궈의 사임은 국민정부의 경제정책 및 물가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1월 5일에는 미국 대사관이 난징, 푸커우, 장쑤, 안후이성 등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미군 권속을 본국에 송환할 것을 선언하였다. 장제스의 위세가 급전직하로 추락하는 시절이 되었다.

<주석>

1. 보이보는 몇해 전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薄熙来)의 아버지이다. 신중국 성립후 화북국 제 1서기를 비롯하여 중국 경제위원회 주임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2. 스먼은 스자좡의 옛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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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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