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하지 못한 '중재'와 보이지 않는 '원칙'
        2006년 09월 21일 06:53 오후

    Print Friendly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문제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한 본회의 표결로 결론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청와대가 전효숙 헌법재판관 인사청문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지만 한나라당이 ‘원천무효, 자진사퇴’ 당론을 고수하며 이를 수용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임명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한나라당이 물리적 저지에 나설 경우 표결 자체가 쉽지 않다.

    사법권력 구성을 둘러싼 정치 투쟁 

    어렵사리 임명동의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지루한 법적 분쟁이 기다리고 있다. 한나라당은 전 후보자가 헌재소장이 될 경우 헌법 소송을 벌일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21일 "전효숙이라는 사람이 헌재소장이 된다면 헌법 차원의 소송이나 권한쟁의 심판 등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헌재의 중립성을 지킬 것"이라며 "만약 소송을 헌재로 가져간다면 전 씨는 자신이 관련된 업무이기 때문에 권한이 정지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법권력 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을 다시 사법적 판단에 회부하겠다는 것으로, 이번 헌재 소장 인준 파문은 사법과 정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전망이다. 사법의 정치성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 사법이 중립성과 보편타당성의 거추장스런 의장을 찢어버리고 순수한 정치성의 알몸을 드러냈다는 것이야말로 이번 파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거둔 최대의 수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번 싸움이 사법권력 내의 진보와 보수, 혹은 개혁과 수구와 같은 거창한 대결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있었던 김병준 교육부총리 불가론이나 문재인 법무장관 불가론처럼 ‘코드인사’냐 아니냐 하는 구도에 좀 더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전 후보자가 헌재소장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와 한나라당의 주요 의제였을 뿐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이해관계의 바깥에 위치했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거대 양당과 거리를 두고 ‘절차적 흠결의 보완’을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법적 하자를 보정한 후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최초로 절차의 문제를 제기한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주장도 이 정도였다.

    민주노동당 "우리가 불섶에 뛰어들 명분이 없다"

    전효숙 후보자라는 컨텐츠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양당으로서는 당연한 ‘처신’이라고 보여진다. 전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가 무산된 지난 19일 민주노동당 핵심 관계자는 "우리가 나서 불섶에 뛰어들 명분이 없더라"고 했다.

    한나라당도 초기에는 ‘절차의 흠결’을 주로 지적했다. 그 때만 해도 한나라당과 민주, 민노당은 대체로 입장을 같이 했다. 그러던 한나라당이 당 내부의 권력투쟁과 맞물려 절차의 문제에서 전효숙 불가론으로 급속히 무게중심을 옮겼고, 절차의 문제와 사람의 문제를 단단히 결박하기 시작했다.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민노당의 입장은 갈라졌다. 그리고 지난 11일 민주, 민노, 국중 등 비교섭 3당은 14일 본회의를 앞두고 ▲대통령 사과 ▲국회의장 사과 ▲법사위 청문 절차 수용 등 3개항을 여당과 한나라당에 요구했다.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는 "합리적인 안을 마련했다"며 "상식적으로 어느 당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 때까지는 비교섭 3당의 공조가 ‘절차적 흠결의 보완’이라는 초기의 원칙에 부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 3당 중재 수순에 문제 없었나

       
     ▲ 야3당 원내대표 회담 (사진=연합뉴스)

    이들 야 3당의 요구를 여당은 13일 수용했고 한나라당은 거부했다. 야 3당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열린우리당과 협의해서 법사위 청문절차를 진행하거나 한나라당을 좀 더 설득하거나 하는 것이었다. 야 3당은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전자를 택하고 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에 대한 설득을 병행하는 것이 절차적 흠결의 보완이라는 당초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 한나라당의 1차 중재안 거부 직후만 해도 민주노동당은 원칙대로 간다는 분위기가 강했던 듯 하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교섭 3당은 14일 본회의 표결에 불참하면서 ‘여야 합의처리’를 들고 나왔다. 이 때부터 ‘절차적 흠결의 보완’이라는 원칙과 ‘여야 합의처리’라는 원칙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한나라당를 설득하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노회찬 의원의 말대로 "원칙과 중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비교섭 3당이 실제 보인 것은 ‘중재’가 원칙이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비교섭 3당의 행동은 ‘절차적 흠결의 보완’이라는 원칙보다는 ‘여야 합의처리’라는 ‘중재’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적어도 언론에 비친 모습만 놓고 보면 그렇다.

    민주당은 비교섭 3당의 공조를 통한 ‘중재’의 프레임에서 가장 큰 수혜자다. 이번 인준 절차 논란의 지적재산권은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 갖고 있다. 야 3당의 공조는 민주당의 역할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출발했고, 공조의 틀은 민주당이 조순형 효과를 지속하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중재와 합의’ 틀에 갇혀버린 민주노동당

    또 거대양당 사이에서 ‘중재’의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정계개편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민주당은 이번 파문을 통해 얻을 과실은 이미 다 얻었으며 적당한 수준에서 사태가 종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는 민주노동당의 주장과 달리 ‘중재’와 ‘합의’의 프레임에 갇혀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국민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또 향후 표결 처리에 참여하더라도 여당에 마음의 ‘빚’을 남기지도 못할 것 같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21일 "판을 깨는 세력을 응징하지 않는 중재자는 중재자가 아니다"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여당의 태도는 ‘도와줘서 고맙다’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도와주지 않을거냐’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과 공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는 경우 듣게 될 ‘여당 2중대론’에 대한 우려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향후 전 헌재소장 임명동의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 표결에 참여할 경우 동일한 공격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미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20일 "민주노동당이 여당과 야합한다"고 비난하며 이를 예고했다.

    민주노동당이 선택한 명분 잘 안 보인다

    박용진 대변인은 전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의 본회의 처리가 무산된 지난 19일 기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은 실리가 아니라 명분을 택했다"고 말했다. 원래 ‘실리’는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만 쌓여도 상관 없다. 그러나 명분이란 오직 드러남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택한 ‘명분’과 그를 위한 민주노동당의 고투의 모습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만 보면 이번 사태는 이항대립적 대결정치로 특징되는 현 의회정치의 환경에서 원칙과 실리를 아울러 거머쥐며 독립적으로 운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지혜로워야 하는가도 아울러.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