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파TV] '서울의 붉은유산 답사기⑦'
    몽양 여운형 선생의 종로구 계동 집터
        2020년 06월 16일 03: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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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상훈 유하라의 편파TV

    1918년 상해에서 여운형 신채호 김규식 조동호 등 150여명이 모여 신한청년당을 결성.

    대표는 여운형.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가 상해에 도착. 파리에서 민족자결을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대표를 파견하기로 함. 여운형은 본인이 원했으나 대표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회원들의 만류로 좌절. 대신 5개 국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차관급과 실무직을 장악.

    상해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여운형은 의정원의원에 당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상해에 오자 국무총리 이동휘는 사퇴를 주도함. 이승만이 조선을 미국이 한 주로 편입시켜 달라는 청원을 했다는 것이 이유. 여운형을 포함해 신한청년당 다수가 이동휘를 지지함. 기호파(다수파)의 반대로 실패.

    임시정부를 탈퇴한 이동휘는 한인공산당 조직. 여운형 조동호 등 참여. 이동휘는 코민테른 자금을 자파(한인사회당) 조직원들만 사용하면서 당은 와해. 여운형은 김규식 조동호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담.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모스크바로 변경) 극동민족대회에 김규식 등과 참여. 레닌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독립 지원을 요청함.

    중국으로 돌아와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며 중국공산당에 참여. 장개석의 쿠데타로 중국공산당이 위기에 처하고 여운형도 피신. 29년 여름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로돼 국내로 압송.

    4년을 살고 출옥하자 유명 정치인이 됨.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 재정적으로 위기인 신문사를 번창시킴. 하지만 손기정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전면에 내보내 강제폐간. 동아일보가 나중.

    1944년 조동호 등과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우익과 무엇보다 미군정이 강력 반대해 좌초. 1947년 봄 근로인민당을 창당 좌우합작을 추진하다 극우파 한지근에게 피격되어 사망. 김구 살해범과 마찬가지로 한지근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음.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 1948년 런던올림픽 참여를 위해 대표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체육회 명의로 최초로 복권을 발행함. 여운형이 최초의 IOC위원이 될 수도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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