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둥병단 쉬스유,
    옌저우·지난을 함락하다.
    [국공내전㊴] 장제스와 감란 검토회
        2020년 06월 10일 10: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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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8월 1일, 국군의 각 초비사령부 지휘관들과 각 수정공서의 책임자들, 각 군의 군단장과 참모장들이 난징에 속속 도착했다. ‘감란 검토회(戡亂檢討會)’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감란’이란 반란평정을 뜻하니 국민정부는 내전을 이렇게 불렀다. 그동안 치렀던 내전에 대한 평가와 대책을 숙의하기 위한 회의였는데 장제스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었다.

    국군은 내전 2년 동안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병력과 장비는 물론이고 점령했던 도시와 지역을 계속 잃기만 하였다. 화북에서 국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은 베이핑, 텐진, 천황다오, 장자커우등 일부 도시였다. 동북은 더욱 심각해서 선양, 창춘, 진저우 등 세 개의 고립된 거점에 몰려 있었다. 서북 지역도 점령했던 옌안 이북의 땅을 모두 내주고 시안으로 물러났으며 산둥도 성도 지난이 해방군의 공격권에 놓여 있었다. 중원은 혼전을 거듭했으나 뤄양, 카이펑 등 허난성의 전략적 요지를 잃어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패배가 거듭되자 국군의 사기도 급격히 떨어졌다. 국군 지휘관들 사이에 패배감이 팽배하였고 통수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하지만 장제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의 실패는 일시적인 것이고 분위기를 일신한다면 충분히 국면을 바꿀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제스는 검토회를 통해 지휘관들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생각이었다.

    난징 군사검토회를 그린 연속극 화면

    1948년 8월 3일 오전 9시, 국군 통수부를 필두로 국방부, 총참모부 및 각급 고위 지휘관 등 120명이 참가한 검토회가 시작되었다. 난징의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하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장제스가 먼저 단상에 올랐다. 그는 ‘정신무장을 강화하여 장병들의 심리를 바꿔야 한다.’는 훈시를 직접 써와 지휘관들에게 역설하였다. 그는 먼저 각지의 전황을 두루 짚었다. “우리는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계속 실패만 거듭하니 전국 인민들이 동요할 뿐 아니라 군대의 장병들도 믿음을 잃었다. 해외 인사들도 우리 국군을 멸시하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일을 어찌 참을 수 있는가?” 하고 통탄했다. 장제스는 또 “이런 국면은 우리 혁명 역사에서 최대 오점이다. 나로서도 가장 큰 치욕이 아닐 수 없다.”고 한탄했다.

    장제스는 국군 장교들의 무능과 부패를 질타했다. “우리 군 장령들의 정신은 타락하고 생활은 부패했다. 혁명에 대한 신심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책임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고위 지휘관들이 잇따라 포로가 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다. 이들이 감연히 죽지 못하니 더 많은 하급 장교들이 도적들에게 포로가 된 뒤 전우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그러면서도 반기를 들지 못하니 아아, 이게 우리 혁명군 역사상 일찍이 없던 치욕이 아니고 무엇이냐?” 장제스는 분위기를 바꿔 훈시를 마무리했다. “그대들은 모두 황푸의 자제들 아닌가? 싸움은 엉망으로 하면서 죽지도 못하니 교장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혁명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회복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 “공산군들에게 절대로 무기를 넘겨줄 수는 없다. 북벌할 때의 사기, 항전 시기의 용기를 되찾아 공산군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자. 우리는 모두 양심을 격발시키자. 통절하게 회개하자. 평소의 정신과 생활을 검토회를 통해 절실하게 바꾸자. 그러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장제스는 열변을 토했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만큼 전장의 형세가 좋지 않았다. 8월 5일, 국방부장 허잉친이 군사형세에 대하여 구체적인 보고를 했다. “2년동안 아군의 병력 손실이 모두 264만명이다. 무기 손실을 보면 소총 100만정, 기관총 7만정, 산포와 야포 중포의 손실이 1,000여문, 박격포와 소형포가 15,000문이다. 그리고 탱크, 자동차, 통신용 기자재와 각종 탄약을 무수히 잃었다.” 허잉친은 “여분이 없다. 조만간 모두 소진될 것이다.”하고 비관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주위가 일시 소연해졌다. 생각보다 병력 손실과 물자의 소모가 너무 컸던 것이다. 장제스가 그날 보고를 마무리하여 훈시했다. “철학과 사상전쟁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공비들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경계심을 가지고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장제스의 훈시가 끝난 뒤에도 분위기가 진정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천청의 실패 책임을 물어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지휘관은 창춘의 포위를 풀어 급한 불을 꺼야 한다고 요구했다. 어떤 지휘관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병력을 보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날 점심에 장제스는 주요 지휘관 삼십여명을 불러 점심을 함께 하였다. 검토회를 하는 목적은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난징 반란평정 검토회는 전장 3곳의 전투 경과를 분석했다. 그러나 사실상 장제스의 의중을 지휘관들에게 각인시키는데 그쳤다.

    검토회에서는 서북의 이촨전투와 화중의 샹판전투, 중원의 위둥전투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촨 전투는 후쫑난이 지휘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후쫑난의 지휘 실수를 짚은 다음 류칸, 왕잉쥔(王英俊), 옌밍의 전사를 찬탄하였다. 살신성인의 혁명적 용기를 본받아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장제스는 위둥전투에서 치우칭첸이 지휘에 따르지 않고 어우수넨 병단이 모두 섬멸되는 것을 좌시했다고 질타하였다.

    샹판 전투는 더욱 집중적으로 검토가 이루어졌다. 8월 6일, 검토회에서 저우젠타오(周建陶)가 작성한 ‘샹판작전 경과보고’를 집중 검토하였다. 저우젠타오는 국군 중장으로 장제스가 특별히 파견하여 현지를 시찰한 사람이었다. 저우젠타오는 바이충시가 구원하는 데 힘을 쓰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광시계 지휘관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저우의 보고가 끝난 뒤 바이충시의 참모장인 자오위안(趙援)이 성을 내며 일어나 말했다. “제고점(제고점은 전장에서 주위를 둘러볼수 있는 높은 지역을 말한다)을 포기하고 성으로 물러나지 않았소? 적이 고지에서 내려다 보고 싸우니 될 리가 있소? 우리 사령관은 그걸 중요하게 보고 있소.” 자오위안의 지적은 장제스가 캉저에게 상양성의 감제 고지를 포기하고 성안으로 철수하라고 한 지시를 말한 것이었다.

    저우젠타오는 “상양성 전투가 7월 2일 시작되어 16일에 끝이 났소. 보름 동안 나는 바이충시 장군이 7월 2일 비행기 한 대를 띄워 상양성에 전단을 설포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오. 전단에 공산당 군대는 어둠을 버리고 광명을 찾으라고 써 놓았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소? 구원가던 7사단이 이청(宜城) 부근에서 미적거리며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오? 7사단이 하루 오십리를 갔으면 도중에 쉰다고 해도 7월 16일이면 상양성 부근에 도달했을 것이오. 나는 이게 상양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오. 바이 사령관은 여기에 무슨 감상이 있소?”하고 추궁했다. 그러자 자오위안이 승복하지 않고 손을 들고 일어섰다. “총통, 나는 할 말이 더 있습니다.” 그러자 장제스 직계쪽 지휘관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할말이 있으면 하라.” 그러나 장제스가 제지했다. “자오 참모장 오늘은 시간이 없네. 기회가 되면 따로 이야기하세.” 그날 저녁 장제스는 토론회 참가자 전원과 저녁을 함께 하며 한시간 15분 동안 훈시했다.

    내전 3년을 결산하는 회의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공산당 첩보원 궈루구이의 존재였다. 궈루구이는 8월 6일 국방부 제3청장 자격으로 30분 동안 ‘중원작전 검토 결과’를 보고했다. 장제스는 궈루구이의 보고를 듣고 평가했다. “궈루구이의 보고는 정곡을 찔렀다. 국방부의 지휘에 대한 평가나 전략적 예비대가 없는 점등은 적절하다. 하지만 각 부대가 상급에 대하여 믿음이 떨어지면 안되니 인쇄해서 배포하지는 말라.”

    장제스는 궈의 보고 후 문제의식을 느껴 다시 4시간 동안 훈시했다. 장제스는 “강력한 병단을 편성하여 적시에 비적의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 맹렬하게 공격하고 맹렬하게 추격해야 한다. 어떤 군용물자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비적들이 질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 기간에 궈루구이는 공산당 동북 야전군이 인쇄하여 사용한 ‘현재의 전략문제’의 부록을 장제스에게 바쳤다. 그것은 마오쩌둥이 쓴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과 ‘지구전을 논한다.’의 요약본이었다. 장제스는 그것을 보더니 “인쇄하여 배포하라.”고 기입했다. 학습자료로 쓰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가 마오쩌둥의 저작을 읽은 적이 있어 어안이 벙벙해서 혼잣말을 했다. “이거 우리보고 마오쩌둥주의를 학습하라는 것인가?”

    바이충시는 국군에서 손끕히는 지장. 아래는 바이충시의 글씨. 책략을 세운 뒤 행동하라

    8월 7일, 이날은 바이충시가 발언했다. 리쫑런은 검토회에 참가하지 않아 바이충시가 광시계의 맏형이 된 셈이었다. “이촨 전투에서는 5개 사단이 섬멸당했다. 뤄양의 일전은 치우싱샹이 포로가 되었고 위둥전투는 어우수넨 병단의 6개 사단과 황바이타오 병단 일부 등 9만명을 잃었다. 샹판 전투는 캉저가 포로로 잡혔고 요지인 샹판을 잃었다. 항전 뒤 초공을 시작할 때 아군과 적의 비율이 5대 1로 절대 우세하였다. 그런데 2년이 채 되지 않아 전략적 주도권이 정부에서 공산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바이충시는 화중 초비 총사령관이었다. 샹판 전투에서 실패한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가장 총애하던 특무를 보낸 장제스도 책임을 벗을 수는 없었다.

    이날 바이충시는 작심하고 자신이 생각한 방안을 밝혔다. “1.수정구를 폐지하고 각 성을 경계로 삼아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2. 전략적인 ‘면’을 중시하고 ‘점’을 포기해야 한다. 전략적인 ‘선’을 중시하여 비롯한 고립된 싸움을 탈피해야 한다. 3. 난징, 우한, 베이핑, 시안, 선양등 5개 전략적 요충지의 공군 기지에 각각 10개 사단을 집결시켜 필요할 경우 즉시 공중수송하여 전략적 결전을 해야 한다. 4. 10개 기병사단을 증편하여 국군의 기동력을 제고해야 한다. 5. 장병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최저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6. 통수부는 각급 지휘계통을 존중해야 한다. 상급은 하급 부대의 지휘에 월권을 해서는 안되며 하급 부대는 상급을 뛰어넘어 보고를 해서는 안된다. ”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제안을 듣다가 화를 참지 못하였다. 특히 여섯 번째 제안은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다. 장제스가 노기를 띠게 되자 누구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8월 7일, 93군단장 성자싱(盛家興)(성자싱은 1948년 10월 동북 진저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이 장제스에게 서면으로 진언하는 글을 써서 올렸다. “공산군은 군민이 일치되어 있고 인민의 이익을 존중합니다. 기율이 엄할 뿐 아니라 아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술은 민활하고 교묘하며 전투력이 강합니다. 희생정신도 왕성합니다. 국군이 공산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면 안됩니다. 민심을 얻지 않으면 귀머거리, 소경이 됩니다. 기율이 엄정해야 민심을 얻고 백성의 지지를 얻어야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우리도 공산군에게 배워야 합니다. 정찰을 강화하고 전략전술을 민활하게 운용해야 합니다. 부대 재정은 공개되어야 하고 병사들을 애호해야 합니다. 공격할 때 장교가 앞장서야 전투력이 강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제스는 서신을 읽고 대노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정신적으로 이미 공비의 포로가 되지 않았나?” 장제스는 회의를 준비하는 비서처를 질책했다. “이런 물건을 연구없이 인쇄하여 배포하다니. 참으로 무책임하구나.”

    8월 7일, 참모총장인 구쭈통이 장제스가 준비한 방안을 대신하여 발표했다. “창장 이남의 방어선을 공고히 하고 공산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전략적인 공격을 잠시 중단한다. 현재 창장 북쪽과 황허 남쪽에 있는 부대를 몇 개의 강력한 기동병단으로 편성한다. 본래의 작은 병단들은 기동병단에 귀속한다. 기동병단들은 쉬저우와 벙부, 샹판, 신양(信陽)지역에 위치한다. 이 부대들의 주요 임무는 공산군의 창장 도하를 방어하며 기회를 보아 공산군을 타격하는 것이다. 창장 남쪽은 150만명으로 신속하게 2선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하게 한다. 동북 전장은 모든 병력을 러허(熱河), 랴오둥(遼東)에 집중시켜 화북을 확보한다.”

    장제스는 중점을 창장 북쪽과 황허 남쪽 사이에 두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방안조차 효과적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장제스 직계와 광시계 간의 모순으로 서로 협력이 되지 않았다. 특히 화중 전장의 샹판과 신양쪽 집단군은 쉬저우와 벙부 집단군의 작전에 호응하기 힘들었다. 동북의 국군은 계륵과도 같아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였다. 8월 7일, 난징 반란평정 검토회가 정식으로 끝이 났다.

    8월 9일, 장제스는 두위밍, 쑹시롄(宋希濂), 황웨이(黄维) 등 고위 장교 15명을 따로 불러 훈시했다. “충용하게 분발하여 우리 혁명군의 영광스런 역사를 빛내기 바란다.” 그런데 이것이 황푸군관학교 출신 고급장교들의 마지막 회합이 되었다.

    8월 12일, 장제스는 황바이타오의 7병단이 위둥전투에서 공로가 탁월하다고 하여 포상했다. 본래 법폐 100억 위안을 책정했다가 50억위안을 더하여 지급했다. 이 당시의 화폐가치는 중일전쟁 전의 47만배에 이르러 실제로 얼마인지 계산하기는 어렵다. 1948년 난징의 군사 검토회는 떠들썩하기는 했으나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쉬스유, 산둥성 옌저우를 디딤돌 삼아 지난을 공격하다

    산둥성 성도가 지난인데 지난에서 난징으로 가는 도중에 쉬저우가 있다. 지닝과 쉬저우 사이에는 지닝이 자리잡고 있다. 지닝과 쉬저우는 현재 인구 천만에 육박하는 큰 도시들이다. 옌저우는 지닝에 속한 구이다. 내전 때는 현이었는데 최근에 구로 바뀌었다. 옌저우에서 공자, 맹자, 관자 등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이 이곳에서 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옌저우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할 것 같은데 지금은 ‘역사 문화도시’라는 명성을 엔저우를 포괄한 지닝시가 내세우고 있다. 옌저우를 점령하면 북으로는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을 위협할 수 있고 남으로는 난징의 관문인 쉬저우를 발아래 두게 된다. 당연히 해방군이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고 국군은 이를 막기 위해 부심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수세에 몰린 국민정부는 산동의 국군을 지난과 칭다오 등 주요 대도시로 집중시켰다. 산둥에서 국군의 작전 방침은 거점도시를 수비하면서 진푸철도(텐진-푸커우간) 중 지난-쉬저우 구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해방군은 철도선을 공격하여 이를 차단하거나 파괴하여 국군의 병력수송 및 보급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중공 중앙군사위는 화동야전군에게 타이안 남쪽으로 진격하여 진푸 철도선을 수비하는 국군을 섬멸하고 쉬저우를 압박하라고 지시했다. 화동 야전군에서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산둥병단 사령원인 맹장 쉬스유와 정치위원 탄전린이었다. 쉬스유는 1947년 자오둥 반도 전투에서 반도끝까지 밀렸다가 국군의 공세를 끝까지 버텨 사수한 바 있었다. 그때 장제스가 자오둥 반도를 공격하던 국군을 중원으로 돌려 기사회생하였던 것이다.

    1948년 여름, 쉬스유 휘하의 산둥병단은 타이안으로 출격하여 타이안(泰安)과 취푸(曲阜)등을 점령했다. 해방군 부대가 옌저우를 포위하자 국군 쉬저우 사령부는 쉬저우에 주둔하던 25사단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자 해방군은 지난 부근으로 접근하던 2개 종대를 돌려 구원군 공격에 나섰다. 그때 화동 야전군 서부병단이 마침 국군의 다른 부대 어우수넨 부대를 포위한 때였다. 그러자 국군 통수부는 방향을 돌려 어우수넨 부대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해방군은 구원군이 철수하여 고립무원이 된 옌저우 공격에 나섰다. 7월 1일, 옌저우성을 포위한 해방군은 먼저 외곽을 소탕한 뒤 7월 13일 총공격에 나서 성을 점령했다. 쉬저우의 국군은 해방군이 다시 옌저우를 포위하자 2개 사단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구원군 선두부대가 성에 접근하기도 전에 옌저우 성이 함락되어 쉬저우로 발길을 돌렸다. 승세를 탄 해방군이 구원군 공격에 나서 1만여명을 섬멸했다. 옌저우 전투와 구원군 공격에서 해방군은 국군 3만 7천명을 섬멸했다. 옌저우가 실함되자 지난에 있는 국군은 쉬저우와 연결이 끊겨 고립되었다.

    쉬스유의 다음 목표는 지난이었다. 지난은 산둥성의 성도로 당시 인구는 70만명이었다. 지금은 90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이지만 당시에도 칭다오와 함께 산둥성의 거점 도시였다. 쉬스유는 휘하 부대를 출동시켜 지난-칭다오를 잇는 자오지로(胶濟路)와 진푸로(津浦路: 텐진-푸커우) 중 지난에서 쉬저우까지 구간에 있는 국군 잔여병력을 소탕했다. 지난을 완전히 고립시킨 뒤 대병으로 공격할 셈이었다.

    항일명장 왕야오우

    지난을 수비하는 국군 지휘관은 왕야오우 중장이었다. 왕야오우는 황푸군관학교 3기 출신의 맹장으로 지금도 중국에서 ‘항일명장’ ‘항일혁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산둥성 타이안(泰安)출신으로 타이산(泰山)을 보며 자랐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하는 시조에 나오는 그 타이산 출신이다.

    왕야오우 손꼽히는 항일명장이었으나 지난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왕야오우는 연대장이던 1932년 장시성의 공산당 소비에트를 공격하다가 장시성 이황(宜黄)에서 홍군에게 포위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상관인 여단장 바이티엔민(柏天民)이 철군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지만 오히려 무력을 사용하며 사수할 것을 강권하였다. 결국 왕의 부대는 24일간이나 성을 사수하며 홍군을 물리쳤고 그 결과 왕은 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34년 왕야오우는 여단장으로 출정하여 안후이성 남부에서 홍군 2개 군단과 맞붙었다. 그때 왕의 부대는 홍군 사단장 한 명을 포로로 잡고 한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왕은 그 전투 뒤에 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왕야오우는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연속으로 전투를 치렀다. 상하이 사수전투, 난징 사수전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승진을 거듭했다. 1945년 그는 24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30만 대병을 이끌고 후난성 쉐펑산(雪峯山) 부근에서 일본군 10만명과 맞붙었다. 그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두달 가까이 견결히 저항하다가 마침내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의 휘하 부대는 일본군을 3만명 가까이 사살하고 무수한 전리품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왕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왕야오우는 산둥성 주석 겸 성의 당정군 통일지휘부 주임을 맡았다. 명실상부한 산둥성 책임자가 된 것이다. 왕은 내전에서 산둥성에서 일어난 주요 전투에 관여했지만 중요한 전투는 장제스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여 결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라이우 전투에서 왕은 쑤위가 린이를 포기하고 후퇴하자 속임수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산둥성 제2 수정구 부사령 리센저우에게 포위망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참모총장이던 천청의 지시를 받은 리센저우가 무모하게 돌격하다 부대는 전멸하고 리센저우는 포로로 잡혔다. 라이우 전투에서 왕야오우는 휘하의 맹장 장링푸를 잃고 장제스에게 지난을 포기할 것을 진언하였다. 지난에서 물러나 2선에서 방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이때 장제스가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복선이 되었다.

    지난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미군쪽에서도 있었다.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인 데이비드(David G. Barr,1895-1970)가 “지난의 병력을 쉬저우로 물리자.”고 건의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하고 지난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장졔스는 쉬저우(徐州)를 병풍으로 하여 공산당 화동과 화북 해방구의 연결을 끊고자 하였다. 화동 지역의 유일하고 강력한 집단군인 산둥 병단이 남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난 공격 때 해방군 참전병력은 쉬스유의 산둥병단 휘하 14만명이었다. 국군은 왕야오우 휘하 12만명이었다. 그러나 국군은 지난성과 외곽진지에 병력이 몰려 있었다. 해방군은 화동야전군 사령원인 쑤위가 지휘할 수 있는 18만명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다. 쑤위는 이 병력으로 여차하면 지난을 증원하거나 국군 구원병력을 저지 공격할 셈이었다. 행동이 자유로운 해방군에 비해 오로지 성을 사수해야 하는 국군은 병력 운용의 숫자나 주도권 행사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지난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자 왕야요우는 방어진지 공사를 서둘렀다. 왕야오우는 지난성과 상업지역을 기본 진지로 삼고 성 교외의 100여개 방어거점으로 외곽 진지를 구축했다. 각 진지에는 영구적이거나 반영구적인 튼튼한 방어설비를 공사했다. 각 진지는 독립적으로 전투할 수 있었으며 장기간 수비할 수 있게 하였다.

    고립되어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요새나 성은 없다. 고립된 부대가 버티려면 구원군에 대한 희망이나 전황이 유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 지난의 싸움은 시작부터 국군에게는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 해방군은 지난을 공격하기 앞서 우선 자오지로에 있는 저우춘(周村), 웨이현(潍县)을 점령했다. 그때 저우춘에서 포로로 잡힌 국군 32사단 휘하 36여단장인 장한둬(張漢鐸)가 지난의 병력배치도를 그려 주었다. 싸우기도 전에 국군의 허실이 해방군에게 소상하게 알려진 셈이었다. 왕야오우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왕야오우 휘하 96군 군단장 우화원(吳化文)이 병력 2만명을 이끌고 공산당쪽에 귀순해버린 것이다.

    우화원의 귀순으로 대세가 기울다.

    우화원은 다른 국군 지휘관들과 달리 곡절많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본래 군벌 펑위샹 휘하의 지휘관이었다. 장제스가 실권을 쥔 뒤 국민당 군대에 기용된 그는 항일전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1943년 왕징웨이의 괴뢰정부에 투항하여 괴뢰정부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다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기용되었다. 장제스로서는 자신의 라이벌이던 펑위샹 휘하 출신에다 일본의 괴뢰정부에 투항했으니 그를 신임할 이유가 없었다. 우화원도 장제스가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알아 늘 노심초사하였다.

    내전이 발발하자 장제스는 그에게 진푸철도의 산둥성 남단 구간 수비를 맡겼다. 1946년 7월, 우화원은 저우언라이와 선이 닿았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난징의 공산당 판사처에 파견되어 있었다. 아직 국공 간 교섭이 진행되던 때였는데 펑위샹, 리지선 등이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우화원은 저우언라이에게 “공산당 편에 서고 싶다.”고 토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당신이 인민의 편에 선다면 우리는 환영이다. 지금 당신 주둔지인 산둥성 옌저우쪽 아군 지휘관이 천이이니 천사령쪽에 연락해 두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후 우화원은 화동 야전군 휘하 루난(魯南)군구와 연결을 꾀하였다. 천이가 루난군구에 우화원 기의 공작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화원은 계속 눈치를 보며 기의를 차일피일 미뤘다. 기의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우화원은 약속대로 해방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장제스가 우화원에게 부대를 이끌고 포위당한 국군 부대를 구원하러 출동하라고 명령했지만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 장제스는 우화원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의심을 품고 왕야오우에게 밀명을 내렸다. “우화원 부대를 불러들이되 듣지 않으면 명령 위반죄로 처단하라.” 그 사실을 우화원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이가 있어 우화원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지난으로 갔다. 왕야오우는 우화원에게 지난 서쪽의 방어를 맡게 하였다.

    한편 화동야전군 사령원인 쑤위는 지난 공격에 대한 사전 병력배치를 완료하였다. 칭다오와 쉬저우 방면에서 오는 국군 지원군을 요격하는 한편 지난성 주변의 국군을 공격할 부대를 배치하였다. 공격부대는 12만명이었으며 구원병 요격 및 주변 소탕부대는 18만명이었다. 쑤위는 지난 공격을 1948년 9월 16일에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5일에서 20일 안에 지난을 공격, 점령하기로 하고 중앙 군사위에 이런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얻었다. 대병을 움직이는 데는 준비할 일도 많았다. 화동군구 및 산둥병단의 보급과 전선지원을 위해 50만명의 노무자를 동원하기로 하였다. 지원군 저지에 참여하는 예환소(허난성과 안후이성, 장쑤성 관할) 군구 부대는 탄약, 식량, 군장, 의약품등을 보급하기로 하였다. 지난 접수 관련 공작을 위해 지난시 군사관제 위원회를 편성하고 도시 경비부대를 지정하였다. 이제 지난성에 대한 총공격과 우화원에 대한 기의공작만 남게 되었다. 우화원이 기의를 차일피일 미루자 쉬스유의 화가 폭발했다. “이 자가 눈치를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강력하게 공격하여 본때를 보인 뒤 다시 기의공작을 하라.”

    9월 16일 해방군 산둥병단 부대들이 전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지난 수비사령관인 왕야오우는 주공 방향이 동쪽이라고 판단하고 성 서쪽 수비부대 일부를 동쪽 방어에 투입했다. 한편 난징의 장제스는 쉬저우의 초비 부사령관인 두위밍에게 2개 병단을 이끌고 구원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쑤위는 류보청 덩샤오핑의 중원 야전군에 전보를 보내어 두위밍군을 요격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쉬저우에 있는 초비사령관 류즈도 치우칭첸, 황바이타오 등 국군이 자랑하는 맹장들에게 구원 출동할 수 있도록 린청(臨城)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공격군의 성패는 구원군이 접근하기 전에 지난성을 점령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해방군은 지난성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비행장을 포격하여 공중수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9월 19일, 우화원이 마침내 부대원 2만명을 이끌고 해방군에 귀순했다. 우화원의 부대가 귀순하자 국군의 서쪽 방어선이 뚫렸다. 이제 지난성은 외곽진지의 엄호없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였다. 왕야오우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장제스에게 포위망을 돌파하겠다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지난성 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국군 구원병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견결히 사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왕야오우는 외곽의 병력을 지난성으로 철수시켜 부대배치를 단행하였다.

    서로 밀고 밀리는 혈전이 9월 24일까지 이어졌다. 장제스는 공군을 동원하여 해방군이 점령한 시가지역을 맹폭격했다. 민가가 부서지고 불타며 해방군 병사와 민간인이 함께 희생되었다. 장제스는 두위밍이 지휘하는 구원병의 진격을 더욱 다그쳤으나 산둥성 청우(成武)까지 접근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은 출동하기 위한 집결을 완료하지도 못하였다. 그만큼 해방군의 공격이 전광석화와 같았던 것이다. 국군은 왕야오우의 지휘 아래 외성을 빼앗기면 내성으로, 내성이 점령당하면 시가전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의 전투를 지원하러 공군이 375회 출격하였고 폭격기가 71회에 걸친 폭격을 하였다. 전투기는 50회가 넘는 기총소사등을 진행했다. 그밖에 수송기가 27회 보급품을 공중투하했으나 지난 수비군은 전멸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였다.

    지난전투에서 돌격하는 해방군

    9월 24일 새벽, 지난 수비군 10만 4천명이 모두 섬멸되었다. 이중 우화원이 이끌고 기의한 병력이 2만명, 사살된 병력이 2만 3천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왕야오우는 변장하고 탈출했으나 해방군 지방부대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2만 6천명이 사상했다. 마오쩌둥은 기의한 우화원에게 전보를 보내어 환영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난을 점령한 것은 인민 해방군의 강력한 공격능력을 증명한 것이다. 국민당 군대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떤 국민당 도시도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우화원은 귀순한 뒤 해방군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는 해방군 다른 부대와 합병되어 35군으로 편성되었다. 35군은 나중에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의 총통부에 최초로 입성한 부대가 되었다. 우화원은 신중국 성립 뒤 저장성 교통청장 등을 지냈다. 우화원의 기의에는 부인인 린스잉(林世英)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린스잉은 망설이는 우화원을 독촉하고 격려하여 귀순으로 이끌었다. 또한 국민당 특무의 추적을 따돌리며 산둥성 남부의 해방군 부대 인사들을 직접 접촉했다고 한다. 결정적인 국면에서 우화원은 부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포로로 잡힌 왕야오우는 전범 감옥에서 개조 교육을 받은 뒤 1959년 2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전범 중 첫 번째로 사면되었는데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인사들의 호의가 작용했을 것이다. 인민해방군 최고지휘관들은 왕야오우를 “국민당 지휘관 중에서 보기 드물게 총명한 사람”으로 꼽았다 한다. 마오쩌둥은 뤄루이칭을 시켜 개조교육을 받고 있는 왕야오우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게 하였다. 마오는 “당신은 공도 있고 과도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항일전에서 세운 공로를 우리 공산당원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안심하고 개조에 임하라. 당신이 하루속히 인민 가운데로 돌아오기를 바란다.”하고 격려했다.

    전범 개조 중의 왕야오우

    왕야오우는 특사 뒤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문사 전문위원으로 발탁되었다가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6년에는 중학교 교사와 재혼했는데 저우언라이가 뒤에서 힘을 보탰다고 한다. 왕야오우는 국민당 출신 인사들이 그렇듯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었다. 문화혁명 직후인 1968년 사망했는데 비판을 당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초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980년 중국 통일전선부와 정치협상회의는 왕야오우와 랴오야오샹,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하여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 뒤 왕야오우는 베이징 빠바오산(八寶山) 혁명열사 능원에 안장되었다. 왕야오우의 신산한 삶이 중국사회에서 복권되었던 것이다.

    쉬스유의 산둥병단이 지난을 점령하여 공산당은 산둥성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획득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지난을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는 참모총장을 지냈던 천청의 회고록으로 대신한다.

    “지난을 잃은 것은 반란 평정과 공산당 토벌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 전에는 승패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국군이 노력하면 이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 뒤에는 강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날마다 형세가 나빠져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지난은 산둥의 심장이다..<중략>….. 지난을 잃으면 산둥성 전체가 버리는 돌이 된다. 진푸(津浦)로를 잃고 적의 남북이 서로 통하게 되어 희망이 없게 되었다. 공산군이 산둥까지 장악하고 산둥의 공산군을 이동시켜 다른 전장에 쓸 수 있게 되었다. 둥북, 화동, 화중에서 아군은 날로 쇠약해지고 적은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지난의 패배는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물론 미국에도 큰 중격을 안겼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의회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국민당 정부는 1948년 하반기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첫 번때 대규모 붕괴는 1948년 9월에 지난을 잃은 것이다. 국민당 정부군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 물자와 장비를 상대방에게 가져다 바쳤다. ”

    스튜어트 대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련과 논의하여 공산당과 회담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연합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스튜어트는 미국 국무부에 대음과 같이 건의했다. “1948년 이후 중국 군정 인사들이 소련과 조정을 거쳐 연합정부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총통이 하야하도록 권하면 안되는가? 리쫑런이나 국민당 내 다른 유망한 인사로 하여금 공산당이 참여하지 않은 연합정부를 구성하면 안되는가? 그러면 더 유효하게 반공투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장제스가 비공산주의 당파의 정치인에게 양위해서 이 내전을 유리한 조건에서 끝내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

    미국은 스튜어트에게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대사의 건의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구상에는 위험이 따른다. 미국이 리쫑런의 권력승계를 지지할 수 있도록 대사관은 최대한 재량을 가지고 행동하라. 형세에 따라 가부를 결정하라.“

    화동국 제2서기, 화동군구 사령원 천이(陈毅)는 전쟁 뒤에 시를 지어 쉬스유(许世友)에게 보냈다.

    루난대첩에서 전고를 두드리라 재촉하니
    쉬장군은 영웅이로다. 용맹하기가 호랑이 같다.
    오늘 서쪽에 진격하여 자오지에서 싸우고
    촨청에서 왕야오우를 산채로 잡았구나.

    鲁南大捷催戰鼓,許是英雄猛如虎。
    今日西進戰胶濟,泉城活捉王耀武。

    *.자오지: 산둥성의 지난, 칭다오, 옌타이 일대를 일컫는말/ *.泉城: 지난의 옛이름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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