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일 만에 집으로 가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
국회 앞 농성 해단식···"다른 아픔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듣겠다"
    2020년 05월 21일 04: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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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향한 걸음 멈추지 않겠다”

“모두가 축하한다고 말하는 이 순간, 제 가슴 속은 모래성처럼 무너진 상태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이 모래알갱이가 먼지가 될 때까지 할 것이다. 그 역할이라는 것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당사자로서 또 다른 아픔을 마주하는 일이다. 말할 권리가 주어진 우리는 어쩌면 권력자일 수도 있다. 우리도 다른 이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 한종선 씨 발언 중)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인 한종선·최승우 씨가 21일 여의도 국회 앞 농성 해단식 자리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오늘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의 국회 앞 농성을 끝낸다. 927일 만에 최승우, 한종선은 집에 돌아간다”며 “오늘 농성장을 해체하지만 진실을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왼쪽) 씨와 한종선 씨(사진=유하라)

국회는 전날인 20일 본회의를 열고 과거사법을 재석 의원 171명 중 162명 찬성으로 처리했다. 두 사람이 한 평짜리 텐트에서 지내며 천 일 가까이 이어온 농성도 마무리하게 됐다.

해단식 직전까지도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던 한종선 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마이크를 든 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채 평생을 살아온 것에 대한 원통함과 억울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과거사법)이 통과되기까지의 고단함 그리고 연대해준 많은 이들에 대한 감사 등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 듯 보였다. 한종선 씨는 “저희들이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끔, 버티게 해줬던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거듭 연대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연대단체들도 이날 회견에서 “시간은 모질고 매몰찼지만 세상에 국가폭력의 책임을 따져 물을 수 있었던 것은 아픔을 공감하는 따뜻한 시선, 곁을 지켜준 연대의 손길 덕분이다. 고맙다.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과거사법 통과까지 연대해온 민주당과 정의당 국회의원, 보좌진들, 시민단체들에도 감사함을 표했다.

과거사법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적 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공권력 행사로 인한 국가 인권유린 사건을 진상규명하기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를 재가동하는 내용이다.

앞서 1기 과거사위는 2006~2010년까지 활동했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활동시한이 끝나 버렸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됨에 따라 출범할 2기 과거사위가 추가 조사를 벌일 수 있게 됐다. 조사 대상에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롯해 6.25 민간인 학살사건이나 서산개척단과 선감학원 사건 등이 포함된다.

김하종 한국전쟁유족회특별법추진위원회 회장은 “독재정권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우리 유족들은 연좌제의 고통 속에서 신원 특이자로 몰려 평생을 가난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살아왔다”며 “국가범죄에 대한 진상을 밝혀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만이 통한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발언을 시작하자마자 눈물을 보인 정영철 서산개척단사건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요즘에 와서야 민주주의가 있다는 걸 느낀다”며 “이 정부 들어 과거사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렵게 본회의를 통한 과거사법은 피해자들이 원하는 내용이 모두 담기진 못했다. 반대에 반대를 거듭 미래통합당에 의해 피해자들이 요구해온 피해자 배·보상에 관한 조항 등은 빠졌다. 이들은 “일부 조항이 삭제돼 유감스럽지만 2기 과거사위의 준비에 매진하려 한다”며 “이번 과거사법에 빠진 명예회복과 배보상 문제는 21대 국회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길을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해단식에 참석한 이재정 민주당 의원도 “정치적 타협으로 요구를 모두 담지 못했다. 아직 부족하다. 이 때문에 법안 통과를 확인하고 기권표를 던졌다. 이는 마지막까지 노력하겠다는 저의 또 다른 약속으로 받아 달라. 이제부터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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