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재소장 파문 '패-패(loss-loss) 게임'
        2006년 09월 09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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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청문 절차를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소모적 논란은 ‘로스-로스(loss-loss) 게임’을 양산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지루한 공방 끝에 전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의 국회 본회의 처리 시한을 사실상 넘긴 지금, 모든 정파에게 ‘득’은 모호하고 ‘실’은 뚜렷하다.

    논란의 빌미 제공한 청와대

    이번 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헌재 재판관이던 전 후보자를 헌재 소장으로 곧바로 지명했으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전 후보자를 헌재 재판관에서 사퇴시킨 후 헌재 소장으로 지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전 후보자가 헌재 소장의 6년 임기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편법이다.

    이 과정에서 헌재 재판관직을 사퇴한 전 후보자는 ‘민간인’ 신분이 됐다. 우리 헌법 제111조 4항은 "헌법재판소의 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재판관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야당이 "헌법재판관 청문 절차부터 다시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이번 논란을 거치면서 전효숙 후보자는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추후 헌재 소장으로 임명되더라도 리더십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무엇보다 청와대와의 협의를 통해 헌재 재판관을 사퇴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정치적 독립성에 의심이 가도록 했다. 또 결과적으로 ‘편법’에 동조한 꼴이 됨으로써 헌법수호기관 수장으로서의 자질 시비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정치력 부재, 전략 부재 열린우리당

    청와대의 편법 지명에 따른 법적 하자를 사전에 확인하지 못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원죄다.

    보다 심각한 것은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문제제기로 법적 논란이 불거진 이후 열린우리당이 보인 정치적 무기력이다. 한나라당과 지리한 법리 공방을 벌이면서 이리저리 끌려다닌 꼴이 됐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한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탓이 크다.

    전략 부재도 짚어야 한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8일 오후까지도 본회의 표결을 전제로 표 계산에 골몰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청문특위의 심사경과보고서 채택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면서 인준안의 본회의 상정이 원천봉쇄되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앞으로다. 열린우리당의 무기력이 과연 이번 한 번으로 그치겠느냐는 얘기다. 이번 정기국회는 사학법 재개정, 비정규직 법안 등 민감한 쟁점 법안이 유독 많다. 정기국회의 초두에 열린우리당이 보인 모습은 앞으로의 험로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처뿐인 승리 얻은 한나라당

    전 후보자 인준안의 본회의 처리를 저지한 한나라당은 승리했는가. 굳이 승리라고 부른다면 상처뿐인 승리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먼저 ‘변호사’당이라는 별칭을 얻을만큼 법률가들로 그득한 한나라당이 ‘편법’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순형 의원의 문제제기가 있고 난 후에야 ‘감’을 잡고 기름을 끼얹는 행태를 보였다. 이를 두고 김형오 원내대표는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도 무식했다"고 자책했다. 한나라당도 ‘편법’ 논란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이 이번에 보인 오락가락 행보는 ‘집권야당’이 보여야 할 책임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사소한 문제로 국정을 발목 잡는다’는 세간의 평가도 부담스럽다. 당 지도부의 방침이 수시로 뒤집히면서 당내 지도력의 부재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열린우리당은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인준안을 표결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인준동의안 처리 시한(10일)을 3일 이상 경과하도록 심사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상정 할 수 있다는 국회법을 근거로 한 것이다.

    여당, 민노-민주 협조 얻어 14일 처리하겠다

    이 경우 찬반의 표결은 각 당 ‘청문특위’가 개별적으로 제출한 의견들을 근거로 이뤄지게 된다. 노웅래 공보부대표는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문제는 더 이상 쟁점이 아니다"면서 14일 본회의 상정을 전제로 민주당이나 민노당의 협조를 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나라당은 지금까지의 청문 절차를 ‘원천무효’로 규정하고, ‘헌법재판관 지명 – 법사위 헌법재판관 청문 – 헌법재판관 최종 지명 – 헌법재판소장 지명 –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청문 –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 본회의 표결’의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헌법수호기관의 장을 선출하는 것이니만큼 법에 철저하게 근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그래야 헌재의 권위와 지도력이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다른 야당과의 공조를 전제로 본회의 표결 절차를 밟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미 진행된 헌법재판소장 청문 절차는 이뤄진 것으로 간주하고 심사경과보고서를 채택하되, 헌법재판관에 대한 내정 및 청문 절차를 형식적으로라도 밟도록 함으로써 위법 논란을 비껴가자는 입장이다.

    이번 법적 논란에 불을 지른 조순형 민주당측 인사청문특위 위원은 9일 "같은 사람에 대해서 인사청문회를 두 번 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고 낭비"라며 "개인적인 의견으론 국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열 대변인은 "헌재 소장 청문회의 심사경과보고서로 (헌재 재판관 청문 심사경과보고서를) 갈음하는 방법으로 청문의 법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14일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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