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 사령관 오동진의
항일무장투쟁과 피검·순국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맹장, 오동진 장군 회상②] 망각해서는 안 돼
    2020년 02월 17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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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맹장, 오동진 장군 회상①

오동진 장군은 1924년 11월 통의부가 남만주 여타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해 정의부를 조직하자 정의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생계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다. 즉 정의부 사령관 오동진 장군은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평안북도 의주경찰서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국경지방 일제 식민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대표적인 국내진공작전으로 평안북도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와 외연주재소를 습격한 사건과 벽동경찰서의 여해주재소와 차련관주재소를 공격한 전투를 들 수 있다. 특히 1925년 3월 19일 초산경찰서 습격 사건은 한 달 전 고마령 전투 당시 일경에 의해 독립군 참의부 간부들이 피살된 사건에 대한 복수전이었다. 정의부 제8중대장 김석하는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제6중대 3소대장 김정호는 외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제6중대장 정이형은 압록강을 건너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를 습격해 경찰 3명을 사살하고 경찰주재소를 전소시켰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었는데 오동진 장군이 군사위원장이고 정이형, 문학빈, 양세봉 등 주로 평안도 출신들이 소대장과 중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과 친일주구와 친일부호 처단, 그리고 독립운동 선전공작활동, 일본인 관리 사살과 적 기관 방화공작이 주된 임무였다.

오동진 장군(세계한민족문화대전)

 

오동진 장군의 국내진공작전은 국경 일대 일제 식민당국을 한순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식민통치의 첨병 일제 경찰을 사살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관공서를 파괴했다. 그리고 준동하는 친일 주구배들과 밀정들을 어김없이 처단했다. 그것은 정의부 활동 가운데 일상적인 임무였다. 1920년대 오동진 장군은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일경과 수백 차례 교전을 벌였다. 오동진 장군은 1922년 통의부 시절부터 정의부와 고려혁명당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체포된 1927년까지 연인원 14,149명의 독립군을 지휘했다. 관공서 143개소를 불태우거나 파괴했으며 일경과 관공리, 밀정, 친일부호 따위 914명을 처단했다. 이는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가 밝힌 통계 수치로서 오동진 장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투쟁 경력이다.

그만큼 대한광복군 총영과 통의부-정의부 시절 보여준 오동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사는 찬란했다. 오동진 장군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 인물로 일제 수뇌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투쟁으로 일제 총독부 고위관료들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다. 따라서 일제 식민당국은 10만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오동진 장군을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실제로 일제는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10만원 현상금을 내걸 정도였다. 당시 10만원이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13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현상금인 셈이다.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1926년 4월 오동진 장군은 정의부 양기탁, 현정경, 고활신, 정이형과 함께 정의부를 주축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고려혁명당을 창건했다. 천도교 혁신파 김봉국, 이동락과 형평사 운동의 이동구, 송헌,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온 공산주의자 주진수, 최소수, 이규풍와 함께 1500명 당원을 거느린 고려혁명당을 조직, 결성했다.

오동진 장군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이자 고려혁명당 군사위원장으로 맹활약을 하였으나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 위원 이동락이 체포되면서 고려혁명당 관련자 명단이 노출되었다. 이후 고려혁명당 핵심 간부들 20여 명이 차례차례 일제에 피검되었고 오동진 장군 역시 1927년 12월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들어 체포되었다. 오동진 장군이 일경에 피검되면서 고려혁명당은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해체 수순을 밟았다. 정의부 역시 세력이 약화되면서 3부 통합운동으로 위기를 돌파하려고 노력하였다.

오동진 선생의 부인 회견기(<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

오동진 장군이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든 것은 남만주 한인사회 내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개선 그리고 민정활동과 관련이 깊다. 남만주 한인사회 정착과 생활개선 그리고 민정활동에는 많은 운동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성립 초기 하얼빈 이남 길림성과 봉천성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17,000여 가구, 87,000여 명에 이르는 이주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였다. 따라서 오동진 장군을 비롯한 정의부 지도부는 무장투쟁과 함께 한인사회 경제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주력했다. 이주 한인들이 생활하는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류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과 길림성 화전현에 화성의숙을, 그리고 흥경현 왕청문에 화흥중학, 삼성중학을 세워 혁명인재 양성과 함께 독립군 무관을 배양했다. 그리고 정의부 군 장교들 가운데 일부와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해 광동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 무관학교에 파견 형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정의부는 야학과 강습소를 운영하고 1926년에 『대동민보(大同民報)』와 『전우(戰友)』를 발간하여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전쟁이 지구전의 성격을 띠고 장기적인 전망을 요구받자 정의부는 남만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항일 독립운동역량을 드높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정의부는 안창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농민호조사' 사업을 실천했다. 오동진, 양기탁, 김동삼 등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이 '농민호조사' 사업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인사회 농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생활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근대 농법의 도입과 근대 교육의 실현, 그리고 산업을 장려하여 한인사회에 새로운 농촌 모델을 뿌리내리고자 하였다.

농업과 상업 활동을 발전시켜 이주 한인의 생활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것은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자 항일독립운동 단체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농업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군벌당국과 교섭을 벌여 황무지와 정전을 공동으로 사들여 신안촌(新安村)농장, 삼일(三一)농장을 경영했다. 나아가 농민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조직하고 농기구 대여와 공농금(公農金) 대여를 시행했다. 또한 합자(合資)에 기초한 공동사업으로 흥업실사(興業實社)를 설립하는 등 식산흥업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활안정자금과 독립군 군자금은 항상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 즈음 오동진 장군은 평안북도 금광개발로 조선 제1의 친일부호가 된 최창학을 통해 독립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한때 항일독립투사였던 김종원은 "삼성 금광업주 최창학이 독립자금과 관련하여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 제안을 흘린 것이다. 물론 일제의 음흉한 계략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동진 장군은 자신과 한때 싸웠던 동지이자 항일독립운동가 김종원을 신임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미 김종원은 일제의 첩자로 변절한 시점이었다.

오동진 장군은 주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원을 만나기 위해 1927년 12월 16일 약속 장소인 장춘역 부근 신음하(新蔭河)로 향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약속 장소인 신음하(新蔭河)로 향하던 오동진 장군은 계략에 말려든 걸 뒤늦게 눈치 채고 장춘시 길림-장춘선(吉長線) 흥도진역(興陶鎭驛)에서 내렸다. 그러나 오동진 장군을 기다린 것은 밀정 김종원이 아니라 악질 친일 경찰 김덕기와 신의주 형사대였다.

고등계형사 김덕기에게 피검돼 무기징역형으로 감옥에서 순국하다

김덕기는 악질 친일경찰 최연,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 이상으로 항일독립지사들을 총으로 사살하거나 고문으로 죽였던 희대의 인물이었다. 김덕기는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뒤늦게 39살에 경찰에 투신한 '고문의 황제'였다. 김덕기는 23년 경찰 생활 가운데 무려 16년 동안을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했다. 그가 체포한 항일지사들은 오동진 장군을 비롯해 조봉암, 안창호, 박헌영, 홍증식 등 1,000명이 넘었다. 김덕기가 체포한 항일독립지사들 가운데 10%는 사형을 언도받고 순국했다. 그리고 10%는 오동진 장군처럼 무기징역을, 10%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런 공로로 고등계 형사 김덕기는 일제 강점기 경찰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경찰공로기장을 받았으며 일제 말기 평안북도 산업부장까지 지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풀려났다.

오동진 장군은 신의주 형무소에서 재판을 거부하며 1929년 11월 11일 33일간 지속된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그런가하면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후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 2차 단식투쟁을 또다시 감행했다. 경성형무소 수감 도중 1944년 정신병자로 분류돼 공주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었다. 당시 공주형무소는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한 감옥으로 오동진 장군은 공주형무소에서 1944년 5월 20일 광복을 1년여 앞두고 순국했다. 33일과 48일! 두 차례에 걸친 옥중 단식투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 것이다.

특히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일인 판사가 무기징역을 선고할 때 오동진 장군은 판사들을 향해 "이놈 감히 어른 함자를 함부로 부르느냐!"고 호통을 친 뒤 "너희들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어서 "이놈들! 심판을 받아야 할 네 놈들이 나를 심판해? 이놈들 이리 내려 와서 내 심판을 받아봐라!"며 준열히 호통을 쳤다. 그리고 비호처럼 달려들어 일인재판장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후 오동진 장군은 일체 심문을 거부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옥중 법정투쟁에서도 오동진 장군은 견결하게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당시 일인재판장은 오동진 장군 변론을 맡은 항일변호사 가인 김병로와 애산 이인을 불러 어떻게 해서라도 공판을 해야겠으니 부탁조로 사정을 했다고 한다.

7년간의 수형 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몸으로 1934년 2차 단식 투쟁에 돌입한 오동진 장군의 정신력은 수형 생활 도중, 수인들로부터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특히 옥중 항일투쟁이 거세지자 일제는 오동진 선생을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토굴 속에 100일 동안 가두었다. 주먹밥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난 징벌방인데 100일이 지난 뒤에 미치지 않고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왜놈 간수장조차 '가미사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가미사마'는 신(神)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일인 간수들 사이에 오동진 장군은 신(神)으로 불리며 특별대접을 받았다. 특히 일인 형무소장조차 오동진 장군이 나타나면 그 앞에서 예를 갖출 정도였다.

오동진 장군이 일제에 피검된 지 4달이 지나가는 1928년 4월, 정의부 소속 김여연과 최봉복 등 제10중대 대원들은 오동진 장군을 구출하러 국내에 잠입했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넓은 도량과 인품,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 앞에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을 비롯해 수많은 피 끓는 청년들이 오동진 장군을 흠모하며 그분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분이 걸어갔던 항일무장투쟁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실제로 오동진 장군은 일제와 맞설 때는 성난 호랑이가 포효하듯이 달려들었지만 인자한 성품은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훌륭한 인품을 간직했다. 정중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맞는 오동진 장군의 인품에 압도되어 항일변호사 애산 이인은 이렇게 감회를 술회한 적이 있다.

“내가 목격한 대로 과연 대륙의 천지를 진동케 했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우리 독립군의 영웅이로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독립군들은 배달민족의 자부심이 담긴 천부경을 수첩에 필사하고 외면서 무장투쟁에 임했다. 홍범도, 여운형 선생처럼 오동진 장군 역시 천부경 구절을 암송했다. "하늘과 땅의 바른 기운이 배달을 만들었고 천부(天符)를 주니 장수들을 이끌어 주인 되었다. (중략) 인간의 몸을 가탁하여 교화하신 덕은 홍익인간이 되어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한 때문이다."

광복군 총영과 서로군정서 시절 동지이자 절친인 운초 계연수 선생이 1911년 『환단고기』를 최초로 출판할 때 홍범도 장군과 함께 오동진 장군은 선뜻 성금을 건넸다. 일제의 한국사 말살과 왜곡에 맞서 한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지키고 독립을 전취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환단고기』 30부는 출간되자마자 일제 헌병대가 수거령을 내렸다. 그리고 『환단고기』 저자 운초 계연수 선생을 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 끝에 사지를 절단하여 죽인 뒤 압록강에 던져버렸다.

오동진 장군은 1934년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지만 형무소 모진 고문으로 해방 1년을 앞두고 1944년 순국한다. 오동진 장군은 남쪽에 혈육(후손)이 없어서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 '무후(無後)선열제단'에 133위 순국선열과 함께 위패가 안치돼 있다. 북쪽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오동진 장군의 묘가 조성돼 있어서 양세봉, 최동오, 류동열과 함께 남과 북 모두에서 항일독립투사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오동진 장군은 김일성(김정은 국무위원장 조부)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했다. 김형직이 1926년 사망한 직후, 14살 어린 김일성을 도와 정의부 소속 민족학교인 ‘화성의숙’(교장 최동오)에 입학시킨 인물이 오동진 장군이다.

오동진은 김좌진 장군처럼 아나키스트도 아니고 더더욱 코뮤니스트도 아닌 공화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도량이 넓고 평민적이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줄 정도로 애국청년들에게 헌신적이고 매우 친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열정으로 청년들을 감화, 탄복시키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정의부 중대장이자 우당 이회영과 사돈인 정이형(본명 정원흠)은 오동진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 동지'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를 만나본 애국청년들은 오동진 장군을 '평생 함께할 항일투쟁의 동지로서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동진 장군 곁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었고 항일운동단체들이 결집하였다.

남과 북에서 모두 인정받는 항일투사임에도 정작 대중의 기억 속에선 망각의 인물이 송암 오동진 장군이다. 오동진 장군은 1944년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했다.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 주차장 근처에 오동진 장군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외로이 서 있을 뿐, 해방된 지 75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오동진 장군의 유해조차 찾질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자소개
고교 교사, 저서 <미래 100년을 향한 근현대 인물 한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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